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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10화 (110/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10화

누군가의 방법(2)

나는 류시혁이 싫다.

그래,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류시혁이 끔찍할 만큼 역겨운 놈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라지만 눈곱만큼도 정이 가지 않는 놈이었다. 물론 이런 작가의 사심을 원고에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젠장, 알게 뭔가.

이제 나는 작가도 아니고 이건 소설도 아닌데.

그러니까 류시혁에 비하면 리제는 호감을 품을 수 있을 법한 인간이었다.

적어도 리제는 자신의 알량한 도덕에 취하지도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의 삶에 솔직했고 충실했다.

하수의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그 모습에 아련한 동질감과 연민을 품을 수 있었다.

과거의 나와 리제는 닮은꼴이었다.

변해가는 나와 변함없는 리제의 관계가 엇갈려, 비극으로 끝맺어졌다고 해도 이 감정은 변치 않는 것이다.

‘하지만 류시혁 이놈은 아니지.’

류시혁은 리제와 정반대의 캐릭터다.

만인의 정의를 대변하는 용사로써 싸구려 정의와 얄팍하고 상대적인 도덕성으로 전신을 무장한 놈이 아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정의처럼 보이는 명분만 있다면, 살인과 살육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는 사이코패스일 것이다.

결국은 그런 식의 의도로, 그런 기획으로 조형된 캐릭터다.

악당을 찢어 죽이고 속이 시원한가?

스테레오 타입의 악행과 즉흥적인 처벌이라. 그런 가짜 정의는 그저 명분을 충족시킬 뿐이다.

상쾌하고 유쾌한 정의 따윈 없다.

진짜 정의라는 건 행할수록 무거워지고, 숨이 차올라 힘겨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바라는 건 적당히 정의처럼 보이는 3분 인스턴트 인과응보뿐이다.

그리고 류시혁은 나의 그런 얄팍한 생각이 낳은 가짜 정의의 대행자였고.

“오늘도 허탕이었군. 생각보다 섬의 크기가 꽤 커서 시간이 걸리겠어.”

“용사님……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걷겠어요. 역시 흡혈귀의 파편을 찾는 건 다른 팀에게 맡기고, 하이브 마인드만 처리하고 돌아가요.”

인간 소년의 형상을 취해 류시혁에게 접근한지 이틀이 지났다.

처음 접촉했을 때 밀리아의 돌발 행동 때문에 적지 않게 놀라긴 했지만. 확실히 인간이라고 보증을 받은 덕분에 류시혁과 밀리아는 나를 더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하이브 마인드들에게 없는 게 내게는 있다는 게 이상하지만.’

그것보다 밀리아가 내뱉은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영혼이 없기에 선악의 선별이 없다고 했나?’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한 소리다.

영혼이 있는 나는 선과 악의 선별이 가능하단 말이다.

‘뭐 당장 생각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지.’

어쨌거나 류시혁과 밀리아에겐 넬쟈를 다시 둥지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 후. 둥지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칸다와 로아에게 내던지고 왔다.

넬쟈가 가지고 도망치려 했던 흡혈귀의 혈액까지 함께 말이다. 그리고 류시혁에겐 적당히 섬의 상황을 설명해 줬다.

‘포 힐케인 섬의 하이브 마인드 트올리카가 같은 하이브 마인드인 비올리네를 죽였다. 하지만 비올리네는 죽기 전 뼈를 숨겨 놨기에 빼앗기지 않았다.’

트올리카는 뒤이어 넬쟈가 지니고 있는 흡혈귀의 혈액도 노릴 것이다. 류시혁에겐 가시적인 적을 마련해주는 게 정석적인 전개다.

딱 봐도 악당 같은 놈이 나쁜 짓을 하고 있고, 류시혁이 나타나 다 때려부수는 게 내 소설의 기본 골조니까.

어쨌거나 당장 트올리카가 움직일 기세가 없었기에 먼저 비올리네가 숨겨 놓은 뼈를 찾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류시혁은 물론이고 밀리아까지 나를 완전히 믿기 시작했는지 꽤나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용사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아, 맞다! 누자베스도 하루 종일 걸어서 다리 아프지?”

“아뇨, 저는 괜찮아요. 이렇게 섬을 안내하면서 용사님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쁜 걸요.”

살짝 호흡을 거칠게 하고.

애써 방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이게 바로 누자베스류 인간 둔갑술 1초식이다. 성인에 비해 체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은근슬쩍 어필하며, 그럼에도 용사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다!

물컹.

갑자기 얼굴이 부드러운 무언가에 파묻혔고. 뒤늦게 밀리아가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사님 들었어요? 이런 어린 아이인데 너무 대견하지 않나요!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요.”

좋다.

이그니션 서킷 점화까지 최단 속도를 갱신했다. 스텔라가 계시한 극락은 그리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폭력적일 정도의 포근함과 감촉!

이 크기, 형태, 탄력! 땀에 젖은 희미한 체취! 게다가 적당한 열기를 머금은 체온! 백억점백억점만점이다!

내가 아까 진짜 정의가 이러쿵 가짜 정의가 저러쿵 떠들던 것이 모조리 헛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 개소리다! 오로지, 그래 오로지 이 자연산 왕가슴만이 진정한 유일무이한 정의다!

어떤 바보가 10살 전후의 외형을 지닌 흡혈귀를 좋아한단 말인가? 당연히 거유 누나가 최고란 말이다!

내 안을 침식하던 염세적인 생각들과, 쌓이고 쌓인 마음의 어둠이 빛무리에 휩싸여 모조리 증발되었다.

지금의 나라면 온인류에 대한 박애를 실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조, 좋은 인생이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박태준 팀장님.

당신이 옳았어…….

밀리아의 가슴 크기를 절대로 G컵으로 해야 된다고 우겼던 당신이 옳았어.

카페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 박태준 팀장이 밀리아의 가슴을 G컵으로 해야 된다고 샤우팅을 할 땐 솔직히 부끄러웠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등신아……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박태준 팀장님의 현안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요한 크라우저 2세…… 당신이 틀렸어…… 암퇘지 교향곡은 쓰레기 같은 노래야.’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은 없다.

사인은 유압사로 부탁한다.

나는 구원받은 것이다…….

“이봐, 밀리아. 누자베스가 싫어하니 너무 어린애처럼 대하지 말도록.”

“예? 아, 미안해 누자베스. 너무 귀여워서 그만…….”

“아니, 아니아니, 잠깐만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용사님.”

역시 나는 류시혁 저 자식이 싫다.

“그럼 슬슬 이 주변에서 야영을 준비해야겠군. 장작으로 쓸 만한 걸 구해오겠다.”

“아 저도 도울게요, 용사님! 누자베스는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밀리아는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은 후 류시혁의 뒤를 따라갔다.

[루칸다 : 각하, 한창 즐기시는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누자베스 : 공교롭군. 나도 저 용사 자식에 대한 증오심이 갱신된 참이다.]

[루칸다 : 트올리카가 아무래도 현화한 흡혈귀의 혼령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자베스 : 핵심 부품을 가장 먼저 손에 넣었군. 그러니까 나머지 부품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거야.]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이 섬에 봉인된 파편들을 모두 모으는데 성공해도, 혼령이 없다면 흡혈귀는 완성되지 않을 테니까.

[누자베스 : 루칸다, 도저히 무력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어떻게 상대해야 된다고 생각하냐?]

[루칸다 : 확실히 만만치 않은 상대일 것 같습니다만,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루칸다는 일대일의 승부에선 꽤나 자신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내 소설에 등장하는 마물들도 전부 그러지 않았나?

류시혁을 보고 ‘어? 할 만한데? 비벼볼만 한데?’ 같은 생각을 하다가 모조리 끔살당했다.

[루칸다 : 어쨌거나 각하의 질의에 답해드리자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점은 변치 않습니다.]

[누자베스 : 그래서?]

[루칸다 : 신념이 붕괴된 인간은 스스로 무너집니다. 그러니 신념에 구멍을 내는 작업만 착실히 진행한다면, 직접 검을 맞댈 필요도 없겠죠.]

이번에도 루칸다와 의견이 일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다.

* * *

하이브 마인드가 된 지 반 년 정도가 지났다. 이제는 하루의 수면 시간이 3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점점 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부품으로써 진화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식량이나 수면 시간이 줄어들고, 더 많은 병력을 지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점점 더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물론 변하고 있는 건 육체뿐만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검사 받았으려나. 멀쩡한데 돈 아깝게 검사는 뭐하러 받냐고 난리를 쳤을 텐데.’

개인용 천막에 누워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필요한 수면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 요즘 들어 이런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사라진 걸 알고 다들 놀라고 있겠지.’

다른 케이스도 있던가?

예를들어 현실의 나 ‘한주호’가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의외로 멀쩡히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열심히 원고 작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그 전화를 건 기점까지의 기억이 복사되어 붙여넣어진 하이브 마인드일 뿐이고. 그 기억을 기반으로 내가 ‘한주호’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그게 모두가 가장 행복해지는 결말이겠네.’

설령 내가 이 소설 속에서 죽게 되더라도,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군.”

눈을 뜨자 맞은편에 있던 류시혁이 옆으로 누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다. 물론 평소 표정이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긴 하지만. 녀석의 부드러운 중저음 목소리는 묘하게도 안심이 된다.

‘하긴 내가 그런 식으로 만든 캐릭터니까.’

그야말로 레퍼런스한 용사 캐릭터의 표본이다. 저 압도적인 기럭지 하며, 개쩌는 비율이며, 의지하고 싶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목소리라던가.

“그냥 좀…… 넬쟈의 둥지에서 멀어지니까 불안해서요. 언제 마물들이 습격할지 모르잖아요?”

하이브 마인드라서 그다지 수면이 필요하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지 않나?

대충 거짓말을 내뱉고, 다시 잠든 척이라도 하려던 찰나. 류시혁이 거리를 좁혀와 내 바로 옆에 누웠다.

“어린애 하나 지키지 못할 만큼 무능한 용사는 아니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너무 가까운데요…….”

“손이 닿지 않는 거리라면 지킬 수 없으니까.”

류시혁은 스스로 말하고 그게 웃겼는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결국은 손이 닿는 거리까지겠지. 완전무결한 용사라고 칭송받아도, 내가 인간인 이상 여기까지가 내 한계다.”

“손이 닿지 않는 거리의 사람들은요?”

“삶의 모든 고통을 용사의 무능함에 떠넘기면 마음이라도 가벼워지겠지.”

류시혁은 현실적인 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지전능한 용사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으로써 타협책을 택한 것이다.

“제게 지켜야 할 가치가 있을까요?”

“적어도 밤마다 밀리아가 찾아와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방지해주지 않나?”

이런 미친.

설마 지금까지 그렇게 적극적인 공세를 모두 거절해온 건가? 물론, 그래 물론 이해는 된다. 소설 속의 용사가 고자인 건 국룰이니까.

“그럼 이 세상은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

눈을 가늘게 뜨며 작은 목소리로 묻자.

류시혁은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여정에서 그 가치를 찾아내길 바라고 있을 뿐이지.”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용사다운 모범 답안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 이 세상에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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