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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04화 (10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04화

    늑대와 삵(4)

    “역시 우리 로아야. 아주 자비가 없는 배빵에 각하가 감동해 버렸다는 거 아니냐! 스칼렛? 푸가 그놈 표정 봤어? 둥지 챔피언이 배빵 한 방에 승천하는 걸 실시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보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해지네.”

    “덕분에 얼굴 도장은 확실하게 찍었군.”

    “그래, 아주 경우 없는 미친 또라이라고 확실하게 기억했겠지.”

    그냥 내일이 없는 진지한 병신 새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지론대로라면 이런 병신이 예의 바른 샌님보다 쓸 구석이 많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PR’ 시간이었다.

    내가 이만큼 앞뒤 없는 병신이고, 싸움질이라면 가리지 않으니. 조력이 필요한 놈은 알아서 연락하라고 광고하고 온 것이다.

    “당장 본도 진출을 노릴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근방에서 좋은 일거리가 있다면 받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나저나 우리 로아 너무 예쁜 거 아니냐? 젠장, 남동생만…… 남동생만 아니었어도…… 하아, 여동생이었으면…….”

    여동생이었으면 현관문을 잠그는 것도 깜빡할 만큼 귀여워해 줬을 텐데 말이다!

    로아가 아주 상남자 중의 상남자지만.

    얼굴이나 체형 자체는 실제로 미소녀에 가깝다. 커다란 눈이나, 겨울날에 눈송이가 내리 앉을 만큼 긴 속눈썹이라던가.

    치마만 입혀 놓으면 그냥 의심의 여지없이 미소녀란 말이다!

    잠깐? 이런 캐릭터를 지칭하는 업계의 전문 용어가 뭐였더라…….

    갑자기 설단 현상이 왔는지 입 밖으로 그 말이 안 나온다.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댓글로 부탁한다.

    “그냥, 입자. 로아야 오늘부터 그냥 치마 입자. 그런 말이 있잖냐. 남자애든 여자애든 여자애처럼 다루면 여자애가 된다고.”

    “뜬금없긴 합니다만…… 각하께서 그걸로 기쁘시다면.”

    아까부터 내 칭찬 세례에 헤롱헤롱거리던 로아가 배시시 웃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너무 욕망이 적나라해서 이젠 역겹지도 않네. 주군, 아직 다른 하이브 마인드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으니 표정이나 관리하게.”

    “스칼렛. 내게 욕망이 있다면 그건 로아와 형제애를 돈독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뿐이다.”

    “개소리 말게. 분가의 반푼이가 무슨 형제란 말인가? 아무리 루스날이라고 해도 헬베르카 그 자체의 고결함에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없이 공격적인 언사였지만, 로아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지 별다른 반박은 없었다. 그저 스칼렛을 죽일 듯이 노려봤을 뿐이다.

    ‘흠…… 지금까지 하이브 마인드가 셋 정도 다녀갔는데.’

    푸가의 챔피언을 날려버린 후.

    내게 관심을 보인 하이브 마인드는 셋이었다. 그중에서 두 녀석은 자신이 직접 오지 않고, 부관을 보내 이야기를 전했다.

    ‘마제 투아하, 그리고 대수림의 유리아.’

    부관을 보낸 하이브 마인드 두 놈은 내 소설에서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놈들이었다.

    특히나 유리아.

    이 녀석은 특급 요주의 인물이다.

    전쟁 군주 투아하도 한가락 하는 녀석이지만, 유리아는 직접적으로 마왕을 압박할 수단과 능력을 지닌 하이브 마인드다.

    실제로 마왕 아일라드나 마계의회는 조금씩 유리아의 압박을 받아들이고, 타협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까.

    ‘영악한 년이지.’

    자신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대수림을 인간들에게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마왕군에게 어마어마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가장 견고한 방어 축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유리아는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무서운 속도로 군세를 늘려가고 있는 하이브 마인드였다.

    ‘대수림…… 대수림이라. 벌써부터 입에 침 고이네. 거기만큼 노른자 땅도 없는데.’

    주인공 류시혁도 돌파를 포기하고, 우회하는 길을 택했을 정도다. 물론 마왕성으로 스트레이트하게 달리면 전개가 너무 빠르니까 나온 전개지만.

    그 전개에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대수림의 하이브 마인드는 어마어마한 강자라는 설정을 덧붙인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유리아’였다.

    “투아하와 유리아는 서로에게 포식 선언을 한 상황입니다. 현재까진 지진부진한 상황이지만, 한쪽이 기우뚱거리는 순간 물어뜯기 시작할 겁니다.”

    “먼저 이쪽을 찾아온 건 유리아의 부관. 투아하 쪽도 그걸 보고 잽싸게 쫓아온 거겠지.”

    양쪽의 제안은 비스무리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파트너십 제안이다.

    내 후견인을 자처하며 성장을 도울 테니, 이후 상응하는 보답을 기대한다는 의미다.

    ‘위험도만 놓고 따지자면, 먼저 짓밟아놔야 하는 건 유리아 쪽이지.’

    내 목숨을 노리는 건 소설의 주인공인 류시혁이나 백주월뿐만이 아니다. 다른 모험가들도 있을 테고, 강성한 둥지의 하이브 마인드들 역시 내 목덜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것이다.

    일단 두 거물의 제안은 보류해 놓고 진짜 일거리 쪽을 생각해 보자.

    “직접 찾아왔던 하이브 마인드는 어때?”

    내가 묻자, 로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듯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포 힐케인 섬입니다. 시트란테 서도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섬입니다만. 아, 포 힐케인이란 게르나의 고어입니다.”

    “그런 어려운 고어는 여기 계신 어르신한테 물어야지. 그게 공용어로 해석하면 무슨 뜻이야?”

    스칼렛은 코웃음을 치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삼중 봉인이란 뜻일세.”

    “생각보다 흉흉한 이름이잖아…… 도대체 무슨 괴물 새끼를 봉인한 건데?”

    이번엔 로아가 대답했다.

    “그 봉인된 괴물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통 셋으로 나뉘어 봉인되는 족속은 대부분.”

    로아가 스칼렛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상속 신분의 흡혈귀들이죠.”

    “잘 알고 있군. 언제부터 그렇게 흡혈귀에 관심이 많았나?”

    상속 신분의 흡혈귀가 매장된 섬이라.

    ‘포 힐케인. 본도에 향하기 전에 거쳐가는 디딤돌로 삼을 만한 곳일까?’

    일단 의뢰의 내역을 상세히 확인하기 위해 의뢰주와 만날 필요가 있었다.

    * * *

    연회가 끝난 후 연회장을 빠져나오자.

    호화찬란한 복도의 모퉁이 쪽에서 거구의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연미복을 멋스럽게 차려 입었지만, 거대한 체구와 풍성한 수염이 돋보이는 녀석이다.

    그 이미지만 보자면 ‘숫사자’에 가까운 외견. 녀석은 잠시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더니 이쪽을 향해 곧장 다가오기 시작했다.

    “잠깐, 저 녀석 설마…….”

    “예, 각하. 불사왕입니다.”

    바체트 제도의 거물 중 한 놈이다.

    바체트령은 마왕 아일라드와 글로레나 왕조. 양자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제3세력도 있었다.

    왜 저런 거물이 바체트령 하꼬 둥지 경영자 파티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지? 왜 내쪽으로 갑자기 오는 거야?

    일단 손이라도 들어서 인사라도 해줘야 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브람스는 내 옆을 스치듯 지나쳐 스칼렛의 앞에 섰다.

    “격조하였습니다. 프로릴의 프린스로써 대모님의 존안을 뵙습니다.”

    “아, 자네로군. 요즘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얼굴이 곧장 떠오르지 않았네.”

    브람스는 허리를 굽혀 스칼렛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프린스인가? 코흘리개 꼬맹이가 훌쩍 커버렸구만.”

    “대모님께선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일전에 성도에서 엘더의 집회에서 뵈었을 때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성도에서 집회?

    도대체 몇 천 년 전의 일을 얼마 전이라고 하는 거야? 게다가 말투가 오글거려서 손가락이 오그라든다!

    “대모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연락을 받고 곧장 찾아왔습니다만…… 이쪽은 종복들입니까?”

    종복?

    내가 종복이라고?

    이 모기 새끼가 아침에 구제역 걸린 돼지 피를 빨고 왔나……. 말은 똑바로 해야 된다. 내가 스칼렛의 주인이란 말이다!

    그리고 만약 주인이 아니라면, 종복이 아니라 성노예 같은 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 아닐세. 지금 내가 모시고 있는 주군일세.”

    스칼렛이 바로 정보를 정정해 줬고.

    브람스는 대놓고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내 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꼬라 보냐. 흡혈귀들은 그렇게 야리면 무슨 혈액형인지 스캔이라도 돼?”

    “호기로운 건 좋지만, 그 저렴한 입을 가벼이 놀리지 않는 게 좋겠군.”

    “왜? 털보 아저씨가 혼쭐이라도 내주려고? 여기서 자리잡고 맞다이 한 번 까든가.”

    브람스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솔직히 숨이 턱 막힐 만큼의 압박감이었다.

    흡혈귀는 공포만으로도 모든 생물을 압도할 수 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심장이 꽉 조여서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였으니까.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자.

    브람스가 갑자기 빙긋 웃어 보였다.

    “크하하핫! 담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역시 대모님입니다. 어디서 이런 물건을 찾아내신 겁니까?”

    브람스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린 뒤 내게 두툼한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프로릴의 프린스 브람스다.”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

    악수를 하듯 오른손을 붙잡자 브람스가 기세 좋게 흔들은 후 말했다.

    “역시나 헬베르카인가. 대모님의 취향은 여전하시군요.”

    “딱히 그런 취향은 아니지만, 어찌어찌 늘 그리 되는 것뿐일세.”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섭리라. 헬베르카의 입버릇 같군요.”

    브람스와 짧은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의 종복으로 보이는 흡혈귀들이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쉴 새 없이 무언가를 귓가에 속삭이고 돌아가길 반복했다.

    아무래도 더럽게 바쁘신 양반인가 보다.

    “이보게, 누자베스 경. 이후에 프로릴 근처에 오게 되면 연락이나 하게. 아, 그리고 연로하신 분을 너무 혹사시키지 말고.”

    “자네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게.”

    스칼렛은 연로한 분이란 소리를 들어서 뾰로통했는지 입을 삐죽이며 핀잔했다.

    “아, 그리고 대모님께 급히 말씀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브람스는 주변을 곁눈질로 한 번 살핀 후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이 기괴한 이계의 존재를 소환해 낸 모양입니다. 균열 파장이 관측되긴 했지만, 어느 쪽으로 연결된 것인지 아직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혹시 무언가 알고 계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낌새가 있었군. 하지만 그쪽 분야는 전문이 아니라, 리쿼렐에게 묻는 편이 빠르겠네.”

    “리쿼렐 님께서도 행방이 묘연하신지라…….”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는 동안.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가정사실이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인간들이 소환해낸 기괴한 이계의 존재.

    그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시혁아.’

    최악최흉의 주인공이 드디어 이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전개가 이상하게 흘러서 여차저차 소환되지 않았다는 결말이길 바랐건만.

    손발이 바들바들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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