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02화
늑대와 삵(2)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
삼각동맹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 군주들은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만든 중간 보스니까!
박태준 팀장의 처절한 반대를 무릅쓰고 바득바득 우겨서 넣은 중간 보스다!
“예? 히로인 하나를 죽이겠다구요?”
“아, 예! 팀장님 제가 생각해 봤는데 아직 30화 밖에 안 됐는데 히로인이 8명이나 있는 건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에서 강력한 하이브 마인드를 등장시키고, 히로인 중 한 명이 주인공 류시혁을 위해 희생하는 에피소드는 어떨까…… 해서 말씀드려 본 건데.”
“작가님. 진짜 고후박이에요?”
“예? 고후박이요?”
“고구마 후장에 박히고 싶냐고 이 새끼야아아아!! 히로인을 왜 죽여! 니가 뒤져 이 짜식아!? 어? 그냥 니가 뒤지라고!”
“팀장님 이번엔 그렇게 윽박질러도 죽일 겁니다. 이미 제 마음 속에선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그럼 이번에 죽는 히로인이 사실은 주인공을 속여서 이용해 먹으려고 한 악녀라고 설정하는 건 어떨까요?”
“주인공은 전지전능! 작가님 모르면 외워요 그냥. 주인공은 전지전능이라고! 이거 공식이니까 외워! 그깟 히로인의 잔꾀 정도는 1화에서 이미 간파하고 있어야죠, 안 그래요? 댓글창에 주인공 빡대가리라는 소리로 도배되고 싶어요? 예에?”
아니, 그런 것까지 류시혁이 무슨 수로 알고 있단 말인가?
말해두지만 기획 초기에 류시혁은 진짜 ‘평범한 일반인’이었단 말이다. 시발, 게다가 아직 1화 땐 이세계 전이도 안 했다.
박태준 팀장 이 미친 사이다패스 새끼야…….
‘박태준 팀장님…… 제가 현실로 귀환할 때 모든 능력을 잃기를 기도해야 할 겁니다.’
만약 하이브 마인드의 능력 그대로 현실로 귀환한다면? 그날은 박태준 팀장이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는 날이다!
바로 병력 풀어서 생포한 다음에 카타쿨라에게 전수받은 각종 고문 기술로…… 아니, 이런 소인배 같은 상상은 그만두자.
‘어쨌든 히로인을 죽이지 않는 대신 타협안을 내놨지.’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가 그 결과물이다. 한 마리가 아닌, 세 마리의 전쟁 군주가 동맹을 맺고 협력하는 형태!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가 작중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컴플렉스’ 형태의 둥지였다.
어쨌거나 한 마리만 있어도 무지막지하게 강한데 세 마리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류시혁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도 살짝 힘겹게 설계된 에피소드다.
‘실제로 류시혁을 거의 죽음까지 몰아넣었지.’
아이디어는 이곳에서 착안한다.
류시혁과 거의 비등하게 싸웠고, 거의 죽이는데 성공할 뻔한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
만약.
그래, 만약이다.
내 소설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에선 아깝게 류시혁을 죽이는데 실패했지만.
내가 조금만 더 힘을 보태면 어떨까?
살짝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류시혁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류시혁이 13차폐구를 털어버리고 얻은 아이템들 중에서 탐나는 것도 많고.’
특히 시공석이라는 아이템이 있는데.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24시간 한정으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왜 이런 아이템을 넣었냐고?
왜 넣었겠나? 박태준 팀장 그 자식이 효도 에피소드 넣으라고 발작을 일으켜서 넣었다!
류시혁은 이세계 왔는데 무슨 수로 효도를 한단 말인가? 그래서 효도시키려고 넣은 아이템이다!
하여간 집에서 부모님 발 한 번 주물러 드리지도 않는 놈들이 효도 에피소드는 더럽게 좋아하고…… 아차, 이건 실언이다.
어쨌거나 시공석을 손에 넣으면 24시간 동안 현실로 돌아가서 박태준 팀장 뚝배기를 깨버리자.
‘류시혁만 처리하면 내가 죽을 확률도 절반으로 줄어들겠지. 남은 건 백주월 뿐이니까.’
솔직히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는 류시혁이라는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녀석이 더 성장하기 전에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향후의 계획을 대략적으로 세운 직후.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런 식으로 문 벌컥벌컥 열고 그러면 각하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거나, 민망한 장면을 보일 수 있다고 몇 번인가 말하지 않았냐.”
“가능성을 따지자면 민망한 장면을 목격할 확률이 높겠군.”
고개를 돌리자, 스칼렛이…… 아니, 저건?
“누구세요?”
“주군은 그런 질문을 진심으로 하는 겐가?”
비교적 진심이다만.
목소리만 듣고 스칼렛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건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훤칠한 미녀였다.
로코코 양식을 그대로 재현한 듯 화려한 형태의 드레스까지 걸치고 있었고 말이다.
칠흑의 비단처럼 새까만 바탕에 붉은 자수로 포인트를 준 드레스다. 그리고 드레스 바깥으로 드러난 윗가슴의 크기가…… 내 추측이 타당하다면 D컵이다. 확실하다. 아니 틀림 없었다.
“그 계량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나 뚫어져라 쳐다보면 조금 부끄럽네.”
“왜 평소엔 그런 모습을 해주지 않는 거야?”
“……오늘은 마왕성에 초청되는 날이라고 준비를 하라고 주군이 말하지 않았나? 이 늙은이도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야 된단 말일세.”
그랬다.
오늘은 시트란테 서도의 제독인 쉘리너와 함께 마왕성에 가는 날이었다. 새롭게 임명된 시트란테의 에이스로써 군부의 핵심 인물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으러 말이다.
그리고 챔피언을 둘 정도 대동하라는 말을 들어서, 셋 모두에게 제안해 본 것이다.
‘그런 낯간지러운 모임은 저보다 흡혈귀가 더 적임자입니다.’
루칸다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고.
‘나!? 정말 나랑 단둘이 가고 싶어!? 나로 괜찮으면 단둘이 가는 것도…… 어? 흡혈귀도 같이? 그, 그렇구나…….’
도대체 로아는 무슨 오해를 하는 것이길래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일하게 별 불평없이 승낙해 준 건 스칼렛이었다.
‘안 될 것도 없네만. 하긴 예법과 무연한 미개종이나 문제아만 데려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지.’
그리하여 로아와 스칼렛으로 결정!
별생각도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스칼렛을 다시 보니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가 미형의 극치라는 건 과장이 아니었구나.’
과장을 살짝 섞자면.
지금의 스칼렛을 목격하는 순간 대다수의 남성은 아랫도리가 터져서 과다출혈로…… 아니, 이런 저질스러운 비유는 됐다.
어쨌거나 고양이라던가, 여우와 닮은 이미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폭풍 성장한 덕분에 살짝 유해진 눈매라던가, 살포시 치켜 올라간 입꼬리는 은은한 여유가 느껴진다.
‘내가 하이브 마인드가 아니라 평범한 남자였으면 여기서 바로 그랜절하면서 고백했을 정도군.’
이래서 흡혈귀한테 피를 빨리는 거다!
왜 흡혈귀가 안 굶어죽고 오랜 기간 살아 남았는지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오, 그게 정말인가?”
스칼렛은 또 내 머릿속을 읽었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코앞까지 다가왔다.
“가끔씩은 그런 것도 나쁘지 않더군. 높은 지위에 올라선 수컷을 무릎 꿇리는 느낌 말일세.”
“나중에 내가 마왕 되면 그 플레이에 어울려 줄게.”
“이 늙은이를 얼마나 더 기다리게 만들 셈인가?”
꾸욱.
부드러운 감촉이 쇄골 언저리를 압박하듯 다가왔다.
젠장, 나는 아주 가끔 내가 그냥 경우가 없는 미친 새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여기서 그냥 미친척 하면서 주물러 봤을 텐데.
스칼렛은 내 끝내주는 자제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쿡쿡 웃으며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렇군. 오늘만큼은 경우 없는 광인처럼 행동하는 편이 좋겠네.”
“정말……!?”
설마설마했던 그린라이트!
바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스칼렛이 내 손목을 붙잡아 다시 내렸다.
“아니…… 주군, 그런 게 아니라. 마왕성에서 말일세.”
“지자스 할렐루야…… 고맙다, 스칼렛. 0.3초 정도 진심으로 행복했다.”
스칼렛에게서 떨어져 복장을 갖춰 입었다. 곧 마왕성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 * *
마왕성이라고 말하면 그 형태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높은 언덕에 우뚝 솟은 거대한 성채를 상상하니 말이다.
하지만 관측 기지도 아니고 고지대에 본거지를 세우는 얼간이 짓을 할 만큼 마왕 아일라드는 병신이 아니었다.
실제 마왕성은 성채라기 보다는 ‘지하 벙커’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것도 거대한 지하 요새!
어떻게 보자면 하이브 마인드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둥지의 형태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이번 모임은 지하의 거대한 실내 공간에 마련된 연회장에서 개최되었다.
“로아, 이런 요리는 도대체 얼마일까? 고기 표면에 좔좔 흐르는 기름기 좀 봐라…… 어우, 내가 맨날 땅에 떨어진 과일이나 주워 먹다가 이런 거 먹으려니까 겁난다. 배탈 나는 거 아냐?”
“각하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다른 놈들이 손도 못 대게 하겠습니다.”
“우리 같은 하꼬 둥지는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돼. 조금 가져가서 루칸다도 줄까?”
10여 미터가 넘어 보이는 거대한 테이블. 그 위에는 각종 고급스러운 요리들이 자리가 부족할 만큼 늘어져 있었다.
한 병에 수만 벨은 족히 할 법한 고급술과 요리! 누구나 눈이 돌아갈 법한 진수성찬이었지만.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듯 걸터 앉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누자베스를 제외하자면 그 누구도 요리나 술에 관심이 없었다.
“야야, 로아. 이거 챙기자. 포도주 이거 두 병만 넣어서 가져가자. 딱 봐도 제일 비싸 보이는 건데 나중에 연맹 놈들한테 되팔아먹자고.”
“역시 각하의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바로 챙겨 놓겠습니다.”
“안 들키게 몰래 넣어, 몰래!”
정신없이 고기를 뜯던 누자베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연회장에 모인 놈들 모두가 누자베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마왕성에 초청을 받은 건 누자베스뿐만이 아니었다. 바체트령 각지에서 한 가닥 한다는 하이브 마인드와 그들의 챔피언들이 60여 명에 달했다.
“뭐야 저 녀석은?”
“시트란테 서도의 총독이 데려온 놈이라는데, 어디서 거지새끼를 주워온 모양이군.”
“시트란테? 그딴 촌구석의 하이브 마인드를 뭐하러 부른 건데?”
“크하핫! 어지간히 데려올 전쟁 군주가 없었나.”
연회장에 모인 하이브 마인드들과 챔피언들은 저마다 누자베스를 구경하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누자베스는 이 모임의 분위기와 이질적이다. 언제나 경직되어 있던 게 당연한 연회장에 처음 나타나서는 자기 집 안방인 것처럼 편하게 요리들을 집어먹고 있었으니까.
누자베스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로아도 눈에 띄었고, 그 뒤편에 다소곳이 서있는 스칼렛도 눈에 띄긴 마찬가지였다.
각 지방을 완전히 집어삼킨 대규모 둥지의 전쟁 군주들은 거리를 두고, 천천히 누자베스를 관찰했다.
그런 조심스러운 시선도 있는 반면.
“염병, 어디서 돼지 새끼를 주워왔나!”
쨍그랑!
조심스럽지 못한 시선도 있었다.
론트라 섬의 남쪽에 위치한 부속섬인 ‘테오르케 섬’의 하이브 마인드 ‘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