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01화 (10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01화

    늑대와 삵(1)

    “대다수의 병력은 투항했습니다. 이쪽이 크게 손을 쓸 것도 없었군요.”

    “그러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오합지졸뿐이네. 잘도 이런 놈들을 데리고 전쟁을 했어.”

    “그래.”

    “호족장들도 모두 죽이고 구울로 만들어 놨네. 일단은 허수아비로 있어 줄 필요가 있으니까.”

    “고생했다.”

    아리카 섬의 정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누자베스의 예상대로 카타쿨라를 처치한 후엔 그저 명분의 싸움이었을 뿐이다.

    리제는 그저 영주가 되기 위해 자신의 친부와 형제를 죽인 인면수심의 패륜아여야 했고. 리제를 지원한 호족장들도 하이브 마인드에게 협력하며 영지민들을 돌보지 않았던 부패한 지배계층이어야만 했다.

    그것이 누자베스가 아리카 섬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한 조건이었다.

    “조금 피곤하네.”

    누자베스는 눈 사이를 꾹꾹 누르며 터덜터덜 걸었다. 그리고 그 뒤를 가장 먼저 쫓아온 건 루칸다였다.

    “어째서 시릴스를 살려서 보내준 겁니까?”

    “아, 시릴스?”

    누자베스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약간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

    “그것도 고대 유물인 아르테간트까지 넘겨주고 섬 밖으로 탈출하게 한 건 역시 저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루칸다, 이 세상에 우리의 이해가 닿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냐.”

    “궤변이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누자베스는 끌끌 웃은 뒤 루칸다 쪽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술을 톡톡 쳤다. 루칸다는 한숨과 함께 품에 지니고 있던 궐련을 꺼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궐련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리제와의 전투 때 튄 피가 궐련에 스민 모양이었다.

    “그거라도 줘라.”

    “이런 거라도 괜찮으신다면야.”

    궐련을 입에 문 누자베스는 깊게 담배 연기를 토해내며 말했다.

    “캐릭터 완성도가 괜찮았어. 이런 이유라면 납득이 되겠냐?”

    “이 미천한 고블린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이브 마인드에게 속아 평생을 모시던 아가씨를 배신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품어 왔던 감정의 보답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상대가 마지막에 토해낸 것이 원망의 말이라면.

    누자베스의 기준에선 꽤나 잘 조형된 캐릭터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주호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시릴스는 하이브 마인드를 증오하고,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마족을 살육해도 이상하지 않은 인간이 되지 않았나?

    용사의 동료로써 나름대로 괜찮은 캐릭터로 완성된 것이다.

    급작스럽게 류시혁의 모험에 따라나선 시릴스, 아니 리제보다는 완성도가 괜찮았다.

    리제의 피가 스민 자국도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고, 그대로 전투화 위에 툭 떨어졌다.

    누자베스는 한참 떨어진 재를 바라보다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결국 잿더미가 되면 다 똑같아 보이는구나.”

    피곤했다.

    아무나 끌어 안고 꼬박 하루를 잠들고 싶을 만큼 피곤했다. 누자베스는 그런 생각을 하나둘씩 떠올리며 터덜터덜 걸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진정한 아리카의 주인은 누자베스였다.

    * * *

    “키야! 이거 봐라, 햄토리야. 이게 시트란테 서도의 총독이 보낸 정식임명서라는 거 아니냐! 뭐라고 썼는지 읽어 봐라!”

    “쮸우, 쮸쮸! 쮸쮸, 쮸-쮸-쮸쮸!”

    “그래! 형아가 오늘부터 정식으로 누자베스 변경백이라는 말이지! 아리카의 엘베제!”

    “쮸쮸!”

    “그래그래, 자식아! 더럽게 오래 걸렸다!”

    “쮸우-!”

    침대 위에서 바둥거리는 햄토리를 붙잡아 복슬복슬한 털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아리카 섬을 통일시킨지 이틀이 지나자, 드디어 시트란테 서도의 총독 ‘쉘리너’에게서 정식임명서가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765호 둥지가 아니다!”

    “쮸!”

    지금까지 아리카 섬에만 쳐박혀 있었을 땐 765호 둥지라는 명칭으로 불려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섬을 통일시키는데 성공하고, 활동 반경이 넓어지기 시작한 이상 계속해서 765호 둥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법이다.

    전국 각지에도 다른 765호 둥지가 수두룩할 테니까!

    그렇기에 정식 둥지명이 새롭게 정해지는 것이다. 둥지명은 감찰관과 관할 총독이 의견을 내고, 마계의회에서 처리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아릿카사! 아릿카사다! 크……!!”

    “아리까짜! 아리까쨔!”

    “그래, 임마! 형아가 돈 많이 벌어서 혀 길어지는 수술 받게 해줄게. 좀만 더 참아라.”

    “쮸-! 아리까쨔!”

    둥지 아릿카사.

    관리자 누자베스 변경백!

    이 호칭의 변화만으로도 지난 날의 고역과 고통이 눈녹듯 사라졌다.

    “돌이켜 보면 정말 지랄 맞은 나날이었지. 그치 햄토리야?”

    “쮸쮸!”

    코볼트 10마리로 시작한 둥지 경영이었다. 죽을둥 살둥 시궁쥐를 잡아 족치고, 꾸역꾸역 병력을 만들어내고!

    고블린 사냥에 나섰다가 그곳에서 루칸다와 만나게 됐고.

    첫 번째 동족포식 상대였던 워포레이의 둥지에서는 스칼렛과 조우하게 됐다.

    그 다음은 뭐였더라?

    “맞다, 아비엥 그 게새끼였지. 아주 황장이 녹찐한 새끼였어.”

    아비엥까지 처리한 후엔 아리카 섬의 북동부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엔 카타쿨라의 둥지까지 박살냈다! 거기서 로아를 새롭게 챔피언으로 영입했고 말이다.

    그렇게 내 둥지는 ‘판데믹’급에 해당하는 규격이 되었다. 인간 모험가들의 분류법에 따르면 ‘준재앙’급이다.

    여기서 두 단계만 더 상승한다면 드디어 내 첫 번째 목표인 ‘성역’등급의 둥지가 된다.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인 류시혁이나 백주월 외엔 그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경지였다.

    “슬슬 류시혁 그 새끼가 소환될 시기가 됐는데.”

    날짜를 확인하자 바로 내일이었다!

    ‘우와…… 시간 더럽게 빨리 가네.’

    침착하자, 침착.

    심호흡을 하며 햄토리 털이나 쓰다듬자.

    이제는 누자베스 변경백인데 경거망동할 수는 없지 않나? 지위를 지닌 전쟁 군주답게 진중하게 행동할 때다.

    ‘일단 소환되자마자 아리카 섬으로 튀어오는 건 아니니까.’

    아무리 나라도 그런 정신나간 전개는 쓰지 않았다.

    애초에 아리카 섬 자체가 박태준 팀장의 강요와 압박에 못 이겨서 급조한…… 아니, 이런 얘기는 됐다.

    ‘우선은 페페를 무사히 돌려보냈으니.’

    류시혁이 아리카 섬을 찾아오게 되는 계기는 제거해 둔 것이다. 모험가 팀이 헬베르카의 혈액을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하이브 마인드 토벌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 뒷수습을 류시혁이 맡게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도 없다.

    리제도 내가 알고 있던 전개와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나?

    “햄토리, 애들 좀 불러와라.”

    “쮸!”

    햄토리의 궁둥이를 툭 쳐서 침대 밖으로 밀어내자, 바로 방밖으로 호다닥 뛰어 나갔다.

    “그럼 슬슬 사후 대책도 마련해 둬야겠지.”

    침대에서 일어나 초커 형태의 검은 링을 목에 걸었다. 초커에서 바로 검은 액체가 흘러나와 제복 차림으로 바뀌었다.

    슬슬 다시 업무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 말이지.”

    “응, 일단은 우리가 본도로 진출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그 녀석들이야.”

    10여 분이 지난 후 둥지의 챔피언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루칸다, 스칼렛, 그리고 로아.

    각자 둥지의 업무를 분할하여 전담하고 있었기에 평소에 마찰을 빚을 일은 거의 없지만. 이렇게 가끔씩 모이게 되면 내가 조마조마해진다.

    “그래서 카타쿨라보다 더 까다로울까?”

    “체급 자체가 다릅니다, 각하.”

    루칸다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로아뿐만이 아니었다.

    스칼렛을 제외하고, 루칸다나 로아는 본도 론트라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카타쿨라는 고작해야 1만 마리가 조금 넘는 수준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13차폐구의 병력은 모두 합치면 6만은 족히 넘을걸?”

    6만 대군이라니.

    그런 얘기를 들으면 상대적 박탈감이 들지 않나? 이쪽은 고생고생해서 가까스로 5천 정도의 규모가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도 흡족해서 햄토리하고 둘이서 자축 파티를 열었단 말이다! 그런데 6만이라니…… 아무리 전쟁 군주 셋이 뭉친 것이라고 해도 너무한다.

    “애초에 우린 해상 병력도 없잖아? 전부 땅개라고, 땅개!”

    물론 공수 부대에 해당하는 로아의 직속 부대 ‘크라울 비젠’이 있었지만. 그런 소규모의 병력으로 상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해상 전력이 필요해진 시점이다.

    “뭐, 당장 13차폐구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아리카 섬을 거점 삼아 본도를 공략하려면 해상 병력이 필요하긴 해.”

    “문제는 내가 진화도 하고 꽤 성장했는데 지배력이 지금도 간당간당하다는 거다! 해상 병력을 추가하겠다고 육상 병력을 감축할 수도 없고…….”

    루칸다는 꽤나 심각한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턱을 괸 채 미간을 찌푸렸다.

    “아리카 섬에서 더 이상 전투를 벌일만한 적대 세력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트란테 서도 내의 다른 섬을 공격한다고 해도, 잔챙이 같은 하이브 마인드뿐입니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내가 시트란테의 에이스겠지…….”

    지배력을 늘리기 위해선 내가 레벨업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레벨업을 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움직여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일대에 더 이상 적이 될만한 상대가 없다는 게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바로 13차폐구 놈들한테 시비를 털기엔 부담스러운데.’

    병력의 규모도 내 10배를 넘었고.

    한쪽 옆구리에 바다를 끼고 있던 놈들이다. 당연하게도 상당한 수준의 해상 병력도 갖췄을 것이다.

    아무리 아리카 섬이 방어에 용이한 지형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6만 대군은 솔직히 무리다.

    게다가 또 카타쿨라처럼 비장의 수가 되는 고대 병기를 하나나 둘 정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나?

    ‘물론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조만간 13차폐구는 정리가 되지만.’

    어째서?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겠나.

    그 일대에서 감히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갖춘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가 뭐에 당하겠나?

    답은 하나뿐이다.

    ‘류시혁이 지나가는 경로니까.’

    그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리카 섬에 오기 전에 들린 곳이 바로 13차폐구였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했던 아리카 섬의 하이브 마인드들이나, 카타쿨라에 비해.

    13차폐구의 하이브 마인드들에 대해선 나도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만들어낸 창작물들이 아니던가?

    5호 둥지 뤼클라 남작.

    88호 둥지 아일크라나.

    24호 둥지 세도루프.

    ‘뤼클라는 흡혈귀의 혈계. 아일크라나는 리케릴 성찬회의 정회원이던가? 뭐 비스무리한 거고. 세도루프는 드래곤족이었지.’

    세 놈 모두가 이 근방에선 가오 좀 털고 다닐 만큼 막강한 전쟁 군주들이었다.

    그러면 뭐하나?

    먼치킨 주인공 류시혁의 희생양이 될 운명이란 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류시혁이 털고 지나가면 빈자리를 냉큼 집어 삼킬 것인가?’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잘하면 이 기회에 괴물 한 놈을 골로 보낼 수 있는 거 아냐?’

    찰나의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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