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00화 (100/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00화

    시릴스(4)

    콰앙! 쾅!

    연달아 떨어지는 박격포 포격에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기 바빴다.

    포탄의 궤도로 거리를 가늠하자면 800미터 내외의 거리. 하지만 사격 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애초에 집탄의 정확도를 추구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리제의 군대보다 더 압도적인 후방 화력 지원 병대를 갖춘 누자베스의 위협에 불과하다.

    ‘박격포 부대가 이렇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고?’

    곡사 화기의 위력은 리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카타쿨라의 방위대를 효과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도 ‘비비큐 클럽’이라는 화력 지원 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제가 알고 있던 박격포 부대라고 하기엔 이동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화력 지원 부대부터 제압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겠네.’

    무슨 요술을 부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누자베스의 박격포 부대가 한층 더 강화되어 있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했다.

    포격의 영향으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고, 중심을 잡기 힘들 만큼 어지러웠다.

    리제가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아가씨…… 다치신 곳은…….”

    “멀쩡해. 그보다 당장 병력을 움직여야겠어. 이대로 두들겨 맞다가 끝날 수는 없잖아. 포격 지원을 섣불리 할 수 없는 거리까지 접근해야 돼.”

    리제의 시선은 올곧이 전장을 향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의를 상실하긴커녕 더욱 불타오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보다 말이야.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아무래도 상황이 돌아가는 게 이상하잖아.”

    “…….”

    리제는 망토에 묻은 흙먼지를 툭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 우유부단한 호족장들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순식간에 결집했을까? 누자베스는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내 병대를 상대로 소극적으로 싸움에 나섰던 걸까? 누자베스는 도대체 뭘 보고 있었던 건지 궁금하지 않아? 호족장들이 도대체 뭘 보게 된 건지도 신경 쓰이는데.”

    스릉!

    리제는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아르테간트를 뽑아들며 이어 말했다.

    “시릴스. 호족장들이 납득할 수 있는 대의명분은 하나 뿐이었어. 이후 수도에서 이 사태의 시비를 가릴 때 확실하게 제시할 수 있는 변명거리는 말이야. 나 아니면 시릴스 너밖에 모르고 있었다고.”

    “아가씨. 저는 오로지 아가씨를 위해…….”

    시릴스는 누자베스의 약속을 떠올렸다.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낸다면 리제의 목숨을 보장하겠다.

    시트란테 서도 내의 무인도에 가서 그곳에서 평생을 조용히 지내라고 말이다.

    리제에겐 승산 따윈 없었다.

    누자베스에게 대항한다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등불에 날아드는 나방 만큼이나 말이다.

    결국 시간의 문제다.

    그렇기에 누자베스는 합리적인 거래를 제시한 것이다.

    시간과 병력을 투자하여 리제를 처리하게 된다면, 곱게는 살려둘 수 없다.

    하지만 그 코스트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면 카타쿨라를 처치할 때까지 협력한 공을 봐서 목숨만큼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기에 시릴스는 누자베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평생을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리제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투항하셔야 됩니다, 아가씨! 누자베스 님께서 아가씨의 목숨까진 거두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투항?”

    리제는 그렇게 되묻고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포탄의 폭음과 병사들의 비명이 아우성치는 가운데. 리제는 한참을 미친 듯 웃었다.

    “그딴 건 처음부터 필요 없었어.”

    휘익!

    리제가 아르테간트를 치켜들었고.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고 있는 시릴스를 향해 휘둘렀다.

    날카롭게 세공된 검날이 시릴스의 머리를 갈라놓기 직전.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운이 좋으면 이렇게 맞붙을 기회가 있을 것 같았지. 역시,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썩은 상판이로군.”

    “아…… 누자베스네 고블린?”

    리제의 검을 막아낸 건 루칸다였다.

    리제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후. 터진 입 안에 고여 있던 피를 가래침과 함께 지면에 내뱉었다.

    “유언이라도 있나?”

    “그런 고상한 게 있을 것 같아 보여?”

    리제가 빙긋 웃어 보였고, 루칸다도 끌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슬슬 죗값을 치러야 할 시간이군.”

    “죗값이라…… 있으면 치러야겠지.”

    리제는 어깨를 으쓱인 후 검을 고쳐 잡았다.

    “그날은 언제나 오늘이 아닐 뿐이야.”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이걸로 확신이 섰다.

    리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용서받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녀를 용서해줄 사람이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자신의 들끓는 욕망뿐이다.

    그리하여 용서의 기회는 바닥을 드러냈다. 용서받고, 구원을 갈구하기엔 너무나 늦었다.

    “삶의 밑바닥에 떨어진 걸 환영한다.”

    그리고 이곳부터가 루아 카날다의 영역이었다.

    * * *

    “아이고, 적당히 겁만 주라고 했더니 아주 곤죽을 만들어 놨구만. 이렇게 박살내 놓으면 구울로 만들기도 힘들어서 스칼렛 어르신이 노발대발한다니까. 극대노야, 극대노!”

    “쮸-쮸, 쮸우-쮸!”

    “햄토리야. 꼭 지금 함박스테이크 얘기를 해야겠냐?”

    “쮸!”

    “그래그래, 우리 햄토리가 아주 비위가 좋아. 이런 징그러운 시체들 보고 함박스테이크를 떠올리고.”

    비비큐 클럽에게 포격 중지를 명령한 후. 바로 언더 케이지 부대와 고블린 서비스 부대를 대동하여 리제의 주둔지로 향했다.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블랙 비즈니스 부대의 위세에 짓눌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매 전투마다 가장 먼저 나서서 날뛰던 리제까지 없으니 뻔하지 않나?

    “흠.”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병사들을 둘러봤다. 이쪽을 향해 호기롭게 달려들 만한 놈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달려든다고 해도 고블린 사수들의 볼트 사격에 고슴도치가 되겠지만 말이다.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이 이상 무의미한 피는 흘리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병사들을 향해 우호적인 어조로 말하자. 대다수의 병사들은 경계하는 기색을 조금씩 풀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리카 섬은 통일되었습니다. 더 이상 여러분이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저벅저벅.

    거침없이 병사들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말해두지만 이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패자는 어디까지나 부패하여 무능해진 종래의 지배 계급일 뿐이죠.”

    하이브 마인드 중에는 인간만 보면 죄다 잡아 찢어 죽이는 걸 삶의 유일한 취미로 삼고 있는 놈들이 있는데.

    내 쪽에선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현재 지배할 수 있는 마물의 수는 한정적이고, 후방 지원을 위한 비전투 인력도 상당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쯤하면 됐습니다.”

    그리고 리제의 병력들 사이에서 내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는 점도 활용하자.

    “싸움은 이쯤하면 됐습니다. 계급적 위계에 종용당해 든 창을 내려놔도 될 때입니다.”

    가장 먼저 나서 있던 청년은 그대로 창대를 꼭 쥔 채 굳어 있었다. 청년의 손에 들린 창대를 붙잡아 천천히 당기자, 쉽사리 손을 떼고 물러났다.

    청년에게 빼앗은 창을 바닥에 내던졌다.

    “돌아갑시다. 당신들의 전장은 이곳이 아닙니다. 적어도 권세가의 깃발을 세워 놓기 위해 필요한 땅은 당신들의 전장이 아닐 것입니다.”

    반 바퀴를 빙 돌며 주변을 시선으로 훑자. 병사들이 차례차례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삶의 터전만이 여러분의 전장입니다. 진정으로 용기 있고, 진실된 충의를 보여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이걸로 대다수의 병사들이 무장을 해제했다. 햄토리에게 지시하여 언더 케이지 부대가 포로들을 인솔할 준비를 하고 있자.

    “내게는…… 나한테만큼은, 이곳이 진짜 내 전장이야. 꿈에 그렸던 내 무덤이라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리제.”

    만신창이가 된 리제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테간트를 지지대 삼아 몸을 끌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이미 왼팔이 잘렸고, 오른쪽 다리의 힘줄과 근육은 처참하게 찢겨져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했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 사선을 그리며 날아든 검에 맞았는지 아래턱이 반쯤 잘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리제의 처참한 모습에 병사들은 저마다 마른침을 삼키거나,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죽음을 바랬지만, 이런 싱거운 결말을 바라진…… 않았어, 누자베스…….”

    리제는 평범한 인간이다.

    고대 유물인 아르테간트를 다루는 덕분에 전투 능력이 일반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지만.

    육체 자체는 단련된 인간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저 정도의 부상을 입고도 멀쩡할 리 없었다.

    당장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처와 출혈량이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리제가 살아왔던 시간 만큼의 관성이 아주 잠깐 더 몸뚱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누자베스 : 루칸다.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하네.]

    [루칸다 : 어떤 고기든 너무 익히면 질긴 법입니다. 알맞게 조리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누자베스 : 녀석을 동정했군.]

    [루칸다 :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루칸다라면 리제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려서 내 앞까지 기어 오게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루칸다가 리제를 동정할 리가 없지.’

    그러니까 동정했다는 말은 그냥 싸구려 거짓말이다.

    루칸다는 그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은 것뿐이다. 어미 고양이가 사냥감을 물어와 새끼 고양이들에게 사냥을 가르치는 것처럼.

    “아가씨, 아가씨……!”

    뒤늦게 리제를 따라온 시릴스가 필사적으로 리제를 붙잡으려 했지만.

    “놔!”

    리제가 팔을 휘둘러 시릴스를 떨쳐냈다. 그러고는 피에 젖은 두 눈으로 이쪽을 똑바로 응시했다.

    “누자베스…… 내 이야기는 너의 손으로 끝맺어지는 거야…… 하, 하하…… 멋지지? 모두가, 질투하거나…… 시기할 만큼, 멋진…… 일이야.”

    비틀거리던 리제가 아르테간트를 지면에서 뽑아냈다.

    그리고는 한쪽 다리의 각력만으로 도약하여 아르테간트를 휘둘렀다.

    퍼억!

    리제의 복부를 걷어차자 그대로 흙바닥을 몇 바퀴나 나뒹굴었다.

    “더 멋진 일이 있었을 텐데.”

    “카학, 헉…… 허억, 윽…… 그딴 게…….”

    리제는 몇 번이고 일어서려 바둥거렸지만, 이미 육체가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슬슬 목을 쳐주는 게 내가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검을 한 자루 소환하여 오른손에 쥐고 다가가자, 그보다 더 재빠르게 시릴스가 달려왔다.

    “누자베스 님……! 아가씨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부디, 부디 자비를…….”

    바둥거리는 리제를 감싸듯 꽉 끌어안으며 시릴스가 오열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리제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시릴스를 밀쳐내고 흙바닥에 얼굴을 쳐박았다.

    ‘용서의 기회가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도.’

    결국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리제의 눈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릴스가 다시 한 번 리제를 끌어안았지만.

    리제는 탁해진 눈동자로 시릴스를 멍하니 바라보다, 더듬더듬 마지막 숨을 토해냈다.

    “네가, 다 망쳤어…… 시릴스.”

    시릴스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물을 흘렸다. 축 늘어진 리제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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