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98화 (9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98화

    시릴스(2)

    리제의 군대는 무언가에 쫓기듯 빠른 진격을 거듭했다. 한 번 휘청이기 시작한 누자베스가 다시 자세를 잡고 응전하기 전에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호족장들은 리제에게 수성전 준비를 강요하듯 권유했지만, 리제는 전투의 결과로 호족장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해 냈다.

    누자베스가 111호 둥지를 온전히 흡수한다면 아리카 섬의 인간들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성채 안에 틀어박히더라도, 일주일이면 거대한 공동묘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누자베스가 111호 둥지의 거대한 몸뚱이를 흡수하고 있는 탓에 무방비해진 틈을 몰아치는 게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리제는 로아의 꼬리를 바짝 쫓으며 밀어붙이고 있는 형세였다.

    마치 태양의 여신 스텔라께서 그녀의 승리를 축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뭐, 그런 축복이라면.

    꽤나 불쾌하게도 감사한 축복이다.

    리제는 그런 자조적인 감상을 떠올리며, 천막의 바깥으로 나섰다.

    청명한 밤하늘에 무수한 별빛이 반짝였다.

    리제의 주치의가 담배는 입에도 대지 말라고 노발대발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사람의 목숨이 죽거나, 죽지 않거나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까.

    저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의 어딘가에 서서 보자면, 모든 것이 보잘것없는 사소한 문제처럼 느껴질 것이다.

    섬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이 다툼조차 수십억 년이 지나서야 찰나 반짝이는 빛의 일부로 보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안심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리제는 밤하늘의 반짝임에 아주 조금 빛을 더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궐련의 끝을 단검으로 잘라 입술 사이에 끼워넣었다.

    “아가씨. 아직 잠에 들지 않았군요.”

    “아, 레오번.”

    리제는 궐련에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초로의 남성. 레오번은 리제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잠들지 못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나 보네.”

    “나이를 먹을 수록 밤잠이 줄어드는군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멀지 않았네.”

    리제의 농담에 레오번이 눈살을 찌푸리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리제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무서운 표정 좀 짓지마!”

    리제는 궐련을 하나 더 꺼내 레오번에게 권했지만, 레오번은 정중하게 거절하며 말했다.

    “어쩌면 아가씨께서 선조님들의 숙원을 이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벅차 올라 잠이 오지 않는군요.”

    “갈라우드 가의 숙원은 온전한 아리카 섬을 손에 넣는 것이었지.”

    섬의 호족들과 하이브 마인드.

    모두가 필요없는 불순물이었다.

    갈라우드는 언제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순수하게 정제된 영지를 갈망해 왔다.

    레오번은 여기까지 도달한 리제가 대견한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리제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발을 들이길 원치 않았다. 이런 잔혹한 일은 오롯이 사내의 몫이었으니까.

    레오번은 리제가 한 사람의 여성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길 간절히 바랬지만, 이제는 늦어버린 희망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가씨는 이런 전쟁을 겪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군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곳에서 평생을 안락하게 지내시길 바랬습니다. 이런, 이런 잔혹한 전쟁은 아이나 부녀자들의 몫이 아닙니다.”

    이렇게나 혼란스러운 시대라지만, 여자가 전장에서 나서야 될 만큼 세상의 도리가 잊혀져서는 안 된다.

    세상이 바뀌어도, 개인과 세간의 통속적 가치가 변화하더라도. 여자는 부군을 보필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거기서 삶의 행복을 느껴야 하는 법이다.

    레오번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스텔라 님의 가르침이 고금을 막론하고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것처럼. 이 세상엔 변해서는 안 되는 가치가 있었다.

    “레오번, 가슴 펴.”

    리제는 궐련을 깊게 빨아들이며 고개를 떨군 레오번을 향해 말했다.

    “갈라우드의 가신이 그렇게 볼썽사납게 움츠리고 있으면 안 되잖아.”

    “하지만…….”

    “그, 저기…… 내가 오히려 조신하지 못한 아가씨라 미안해. 나도 나름대로 노력해 봤는데 잘 안 되더라.”

    리제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레오번도 그런 리제를 바라보며 후련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 생애에도 여자로 태어나면 진짜 애도 잔뜩 낳고, 남편 내조도 끝장나게 잘하고 그럴게. 약속, 약속.”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진짜라니까! 누군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나도 말이야 편하게 집에서 애나 돌보면서 살고 싶었어.”

    “선택의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레오번의 떨리는 목소리엔 미약하게 책망의 기색이 묻어났다. 리제에겐 그런 기회가 있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기회였지만, 레오번은 리제를 끝까지 말리지 못했던 자신을 수없이 자책했다.

    “없었어. 그런 선택지는.”

    하지만 리제는 한숨과 함께 새하얀 담배 연기를 토해내며 말했다.

    “내가 갈라우드의 피를 이어받아 태어난 순간부터 그런 선택지는 없지 않았을까.”

    리제는 한 사람의 여성이기 이전에 갈라우드의 후계였다. 피와 화약에 광분하는 본성을 타고난 투견이었던 것이다.

    “레오번. 다음 생애에도 내 집사 해줄 거지?”

    “또 이 빌어먹을 가문이면 안 할 겁니다.”

    도저히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리제와 레오번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은 후 리제는 궐련을 구두굽에 비벼 끄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 다음 생애엔 이런 빌어먹을 짓거리 하지 말자.”

    리제는 별이 수없이 흐드러진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만약 모든 영혼이 삶과 죽음을 거듭하며 윤회하고 있다면.

    어쩌면 오늘 밤 보이는 저 별빛 중 하나에 전생의 자신이 더한 담배불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담배를 태우는 동안 레오번과 리제는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리제가 아직 어린애였을 때부터 레오번이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둘은 오랜 추억을 쌓아온 친한 친구처럼 가까웠다. 어느덧 리제가 물고 있던 담배가 절반의 크기가 되었고, 이야기를 먼저 매듭지은 쪽은 레오번이었다.

    “이 말괄량이를 기어코 숙녀로 만들어 놓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만.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군요.”

    “오, 이제는 포기해주는 거야?”

    “아무래도 이번 생애엔 무리였던 모양입니다.”

    그 웃음이 마지막이었다.

    리제와 레오번은 천막 앞에서 헤어졌다. 리제가 들어간 천막의 등불이 꺼지는 걸 본 후, 레오번이 발걸음을 돌렸다.

    적막한 밤의 야영지를 지나,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려던 중.

    저벅.

    가벼운 발소리가 진흙을 짓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은 전부터 느껴졌지만, 이렇게 발소리를 냈다는 건 더 이상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역시 너였군. 영주 님과 파오루 님을 살해한 것도, 조시네스를 죽인 것도.”

    “아가씨에게 말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내가 조시네스를 죽였다는 사실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릴스가 묵빛으로 도금된 단검을 뽑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에 레오번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가씨를 지키겠다고 약속해 주게.”

    그게 레오번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걸 알게 된 늙은이가 어떤 결말을 맞이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시릴스는 단검을 역수로 쥔 채 레오번을 향해 다가갔다.

    * * *

    “어렸을 때 꼬마 흡혈귀 시리즈를 읽는 게 아니었어. 자아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에 그런 요망한 소설을 읽은 탓에 내 성적 기호가 삐뚤어진 거야.”

    고백하자면 그렇다.

    어렸을 적 읽었던 소설 때문에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관이 형성되어 버리다니. 이건 솔직히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어린애가 무슨 판단 능력이 있다고 그런 중요한 결정을 맡긴단 말인가?

    아니, 적어도 책의 표지에 주의 문구라도 써놨어야 한다. 그게 어른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책무란 것이다.

    주의! 댁의 자녀가 흡혈귀 박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뭐 이런 경고 문구 말이다!

    어쨌거나 꼬마 흡혈귀 안나 덕분이다.

    내 이그니션 서킷이 10살 전후의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 100살이 넘은 흡혈귀 외엔 점화되지 않는 이유가 말이다.

    “이보게, 주군. 꼭 내가 옆에 있을 때 그런 상상을 해야겠나? 애초에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흡혈귀라니, 솔직히 역겹네.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시끄럽다, 스칼렛. 그 이상 나의 공주 밤피 님을 모욕한다면 참지 않겠다.”

    “안 참으면 어쩔 건가?”

    스칼렛이 내 정강이를 툭 걷어차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런 도발에 발끈할 만큼 내 아량은 얕지 않았다.

    이래뵈도 시트란테의 엘베제 누자베스 변경백 아닌가.

    “당연히 참아야죠. 제 미천한 둥지의 유일한 히로인 스칼렛 님이신데…….”

    혹여나 스칼렛이 삐져서 둥지 멤버에서 탈퇴라도 한다면 대참사다! 그때는 정말 고추밭이 되는 거다.

    이번 소설의 장르는 하렘물이라고 마음속으로 정해놨는데. 여자가 한 사람도 없으면 곤란하다.

    다른 의미의 하렘물이 될 거 같지 않나!? 혹여나 내 소설을 어린아이가 읽다가 잘못된 가치관을 지니게 되면 큰일이다!

    지금이라도 이런 힙스터 소설은 그만 읽고, 유튜브로 달려가 익현이 형 채널을 구독하는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꿈나무들이 받아야 할 올바른 성교육이다.

    “어쨌거나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그거. 캐릭터 조형의 핵심은 마땅한 과거가 필요하다는 얘기지.”

    이 세상이 악질적인 퇴고 작업 그 자체라면.

    그런 가정이라면 말이다.

    세상은 내게 ‘시릴스’라는 캐릭터의 재조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용사의 동료로서 조금 더 완성된 형태이길 바라고 있는 것뿐이다.

    “아리카 섬은 손에 넣는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급조한 탓에 엉망으로 완성된 캐릭터도 수정한다.”

    이것이 하이브 마인드 누자베스로서.

    삼류 웹소설 작가 한주호로서 맺어야 할 매듭이었다.

    의식을 전환시킨 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누자베스 : 내 생각엔 아리카 섬 통일까지를 1부로 취급하면 될 것 같은데. 론트라 섬을 통일하고 마왕이 되는 것까지를 2부. 인기가 괜찮으면 대륙 진출까지 생각해 볼까?]

    [루칸다 : 점령지의 면적으로 따지면 1부가 너무 길어졌군요.]

    [로아 : 13차폐구만 뚫으면 론트라의 중부 점령은 순식간이야.]

    [스칼렛 : 그렇군. 확실히 프로릴과 접경하기 전까진 순조롭겠어.]

    론트라의 중부를 파고들기 위해서 넘어야 할 장애물은 둘.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

    불사의 왕이자 프로릴의 프린스 브람스.

    어느 쪽이든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었지만.

    [누자베스 : 걱정들 하지 마라. 이 형아가 이미 시놉시스 다 짜놨어.]

    마인드 모드로 섬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리제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1부의 엔딩을 두들겨 줄 차례다.

    [누자베스 : 로아와 스칼렛은 각자 부대 점검 후 진격 방향 검토.]

    [로아 : 오케이.]

    [스칼렛 : 이견은 없네.]

    [누자베스 : 루칸다. 내가 산책 좀 하려는데 양산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루칸다 : 덕분에 특등석에서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겠군요.]

    브리핑은 끝났다.

    남은 건 아리카 섬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