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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97화 (9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97화

    시릴스(1)

    갈라우드의 군대는 누자베스의 군세를 몰아냈다. 전선에서 바쁘게 이탈하는 하이오크 척탄병들을 바라보며 병사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크하핫! 하이브 마인드의 군대도 별거 없구만!”

    “이겼다! 이겼다고! 제엔장, 믿고 있었다구!”

    “놈들을 쫓아서 둥지까지 모조리 박살 내는 게 어떻습니까!”

    비가 그쳤다.

    청명한 하늘이 먹구름 사이로 드러났고,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었다.

    승리의 달콤함에 취한 병사들의 뒤편에서 리제는 거칠어진 숨을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바위에 걸터 앉아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기 위해 헐떡이길 반복했다.

    “쿨럭……!”

    리제의 입에서 검게 변색된 선혈이 토해졌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이 덮쳐왔다.

    리제는 손등으로 거칠게 피를 훔쳐냈다.

    그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시릴스가 다급하게 다가왔지만, 리제는 시릴스의 가슴을 부드럽게 밀쳐내며 거리를 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동요와 불안은 전염되니까.”

    리제는 빙긋 웃어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은 가시지 않았지만, 태연하게 걷기 시작했다.

    “갈라우드는 언제나. 적보다 먼저 쓰러지지 않아. 그러지, 시릴스?”

    아직이다.

    아직이었다.

    아직 쓰러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의 이야기를 제대로 매듭지어야만 했다.

    * * *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인원이 모여 있었다. 루칸다와 스칼렛이 싸우지 않고 제대로 일을 해준 모양이다.

    성채의 안쪽에 위치한 스텔라 교단의 예배당. 이 웅장한 건물의 내부엔 이미 아리카 섬의 호족장들이 모여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쪽의 중앙엔 5미터는 훌쩍 넘을 듯 거대한 스텔라 여신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엔 8명의 호족장들이 모두 앉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원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꼴찌야? 이거 어르신들 모셔놓고 기다리게 만들어버렸네. 미안, 너네들이 풀어놓은 미친개 한 마리 상대하느라 바빴거든.”

    야전 코트를 벗어 고블린 살수에게 대충 던져준 후 원탁 쪽으로 다가갔다.

    “이야, 저게 스텔라야? 겁나 크네. 머리통이 세 개 달린 줄 알았잖아. 태양의 여신인지, 거유의 여신인지 정의를 다시 해봐야겠어. 노친네들 생각은 어때?”

    원탁에 걸터앉아 묻자.

    호족장들은 난색을 표하며 헛기침을 하거나, 시선을 피했다.

    “질문이 너무 천박했나?”

    “아니, 그런 건 아니네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워낙 근본 없이 자라서 교양이 없어. 여기 모여 계신 고결하신 호족장님들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못할 만큼 말이야. 아주 경우가 없는 새끼지.”

    원탁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고개를 들자.

    거대한 석상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높은 곳에서 하계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스텔라 님은 태양의 빛처럼 모두를 지켜보고 계신다, 였던가? 참으로 지랄맞은 소리다.

    “루칸다. 나는 스텔라의 흉부는 마음에 드는데, 저 낯짝이 마음에 안 드네. 저 건방진 눈빛은 필요 없지 않을까?”

    “필요 없는 곳은 도려내면 그만입니다.”

    순간 루칸다의 모습이 잔상처럼 흔들렸고.

    스겅!

    절삭음과 함께 석상의 머리 부분이 미끄러지듯 흘러 아래로 추락했다.

    쿠웅!

    “으아악!”

    “헉!!”

    잘려진 스텔라의 머리가 원탁 위에 떨어지며 원탁을 완전히 으깨 부쉈고, 호족장들이 질겁을 하며 벌떡 일어나 뒤편으로 물러났다.

    목이 잘린 스텔라의 석상은 한결 볼만한 형태가 되어 있었다.

    “잘 들어, 노친네들. 필요 없는 부분은 도려낼 수 있어. 방금 봤지? 어렵지도 않아.”

    호족장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조시네스를 누가 죽였을까? 그딴 게 이제 와서 중요할 거라고 생각해? 경우와 도리에 기반한 의로운 판단이 당신네들 명줄을 책임져주진 않을 텐데.”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일지. 그런 판단을 하기엔 이미 늦은 시기다.

    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고지할 필요가 있었다.

    “누구 밑에 붙어야 할지 눈치밥 먹으며 살아온 양반들이니 금방 알겠지? 어느쪽이 적인지는 중요치 않아. 어느 쪽을 적으로 삼아야 할지가 중요한 거야.”

    아리카 섬의 지배자는 매번 바뀌어 왔다.

    수천 년의 역사 동안 말이다.

    하지만 이 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호족들은 매번 새로운 지배자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순응하는 식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글로레나 왕조가 바체트령을 침략하기 전까진, 마왕 아일라드의 지배를 받았고. 그 전엔 윤왕 루아 카날다의 통치하에서 살아왔다.

    이제와서 새로울 건 무엇 하나 없었다.

    그저 새로운 주인이 하이브 마인드가 될 뿐이었으니까.

    “하, 하지만…… 제도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오. 본도에서 병력을 파견한다면…….”

    “너 이리와 봐.”

    호족장 토골라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어느새 루칸다가 그의 뒤에 나타나 목덜미를 붙잡았다.

    “끄아악! 사, 살려 주시오! 크악!”

    짝! 짜악!

    토골라의 뺨을 몇 번인가 후려치자 이내 조용해졌다. 피와 부러진 치아가 흘러나오는 입을 꽉 틀어막은 채 바들바들 떠는 게 전부였다.

    “안 잡아먹어 새끼야. 그래, 좋은 질문이었어. 너희들한테도 명분이 있어야겠지.”

    손가락을 튕기자 고블린 몇 마리가 두 구의 시체를 가지고 예배당 안쪽으로 들어왔다.

    “저건…….”

    “서, 설마.”

    비대하게 살이 찐 남성의 시체다.

    손가락을 모조리 자르고, 얼굴을 갈아 놓고, 치아를 모조리 발치한 상태. 부패하지 않게 이쪽이 따로 처리는 해놨지만.

    “면상을 이 꼴로 만들어놔서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이쪽은 다행히도 신분을 확인할 수단이 있지.”

    스칼렛에게 눈짓을 하자. 고블린들이 가져온 시체 두 구가 발작을 일으키듯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호족장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말이다. 발작하던 시체 중 한쪽이 먼저 바람 섞인 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끄…… 주, 죽기… 흐, 죽기 싫… 아, 아파… 아파, 아파, 카… 시, 시릴스…… 그, 그만…… 카아…….”

    “이쪽이 영주의 장남 파오루였고.”

    “으, 가아악……! 카… 허억…… 어, 어떻게… 시릴, 스……! 네가 내게…….”

    “이쪽은 영주 갈라우드였군.”

    루칸다가 우연히 카테라도의 해변에서 발견한 배에 태워져 있던 시체였다.

    그리고 시체를 스칼렛의 피에 감염시켜 뇌에  저장되어 있던 마지막 반응을 억지로 재생시킨 결과다.

    호족장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시릴스라면…….”

    “리제의 호위무사다. 물론 그 녀석이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게 있어서 독단적으로 영주와 장남을 죽였을 리 없겠지?”

    리제의 사주가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친오빠를 죽이고, 영주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짐승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카타쿨라의 처치 후 자신이 영주 자리에 오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한 호족장 조시네스를 가장 먼저 처리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지 않겠나?”

    호족장들은 내 말에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이 녀석들은 리제를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리제가 영주가 된다면 어디를 얼마나 더 뜯어먹을 수 있을지 행복한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욕심이 과했던 놈이 조시네스다. 호족장들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이건 조시네스 그 음흉한 노친네가 하이브 마인드인 카타쿨라에게 협력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겠군.”

    시릴스는 명확한 물증을 가지고 있었다.

    오베론은 조시네스의 가신이자, 동시에 111호 둥지의 챔피언이었다.

    조시네스와 카타쿨라가 오베론을 사이에 두고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시릴스가 카타쿨라의 둥지에서 슬쩍 챙겨온 서신을 꺼내 호족장들에게 보였다.

    “조시네스를 누가 죽였을까? 그 질의에 대한 해답이다.”

    정황상의 추측이다.

    리제는 이 서신을 손에 넣었고, 조시네스가 하이브 마인드와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이 섬의 인간 대표자로서 정의로운 결단을 내린 것일까? 호족장들은 그런 식으로 추론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호족장들이 경우와 상황에 따라 하이브 마인드에게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기에 리제는 조시네스를 암살하여 잠재적인 협위 세력을 줄이려 했다.

    이 추론이 사실이든, 아니든 호족장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리제가 언제든 자신들을 향해 검을 들이밀 수 있는 짐승이라고 인지한다면?

    “네놈들이 풀어놓은 개가 엽견이 아니라 광견이었다는 결말이군. 이제 남은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호족장들에게 누가 적인지 명확하게 인식을 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리제에게 검을 들이밀 수 있는 도의와 명분을 주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길을 제시했다.

    친부를 살해하고 영주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짐승을 처단한다는 싸구려 정의도 마련되었다.

    “자, 그럼 얘기도 끝났고. 질문 있나?”

    “저…… 지금의 영주를 처리하는데 협조한다면 이후 얼마나 보장해줄 수 있나?”

    “이런 상황에서 밥그릇 크기 따지는 거 보니 꽤나 용감한 늙은인데.”

    실소가 나올 만큼 탐욕적이다.

    이럴 땐 뭐라고 해줘야 할까?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살려는 드릴게.”

    이번 오마주 대사가 사망 플래그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예배당을 나섰다.

    내 뒤로 루칸다와 스칼렛이 따라 나왔고, 그대로 걸으며 입을 열었다.

    “뻔한 대립의 구도와 싸구려 정의라. 인간들의 행동원리는 때때로 애처롭게 보이는군요.”

    “이쪽의 정리는 끝났으니 루칸다 너는 시릴스의 감시로 따라붙어. 스칼렛은 여기에 남아 호족장들의 병력을 지휘한다.”

    “남의 포크로 먹는 남의 고기만큼 맛있는 건 없지.”

    스칼렛은 쿡쿡 웃으며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소리를 툭 내뱉었다.

    “말을 곱게 해줘야지, 스칼렛. 이건 그냥 누적된 마일리지 환급받는 거야. 공짜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공짜가 아닌 뭐…… 그런 거지.”

    자, 무대와 배우는 모두 준비되었다.

    남은 건 관객석에 앉아 즉흥극의 결말을 관람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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