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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96화 (96/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96화

남겨진 일(4)

당신은 곧 죽는다.

리제의 주치의가 그녀에게 전한 말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날카로운 둔통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초침처럼 느껴진다.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리제는 거대한 거울 앞에 선 채로 자신의 나신을 바라봤다.

가슴골 사이에는 몇 번인가 절개했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발악했던 흔적이기도 하다.

‘미세한 테라니움 입자가 폐포를 가득 채웠습니다. 현재의 의술로는 이렇게 작은 조각들을 모두 제거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병이라거나, 부상이라면 치유 마법으로 고칠 수도 있겠지만. 폐포에 박힌 무수한 테라니움 입자를 제거할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리제의 혈액을 타고 흐르는 미량의 마나에 반응하여 테라니움 입자는 팽창을 거듭한다.

언젠가 테라니움 입자가 거대하게 팽창하여 폐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인생이 촌극이라고 생각했지만.”

리제는 거울에 한쪽 손을 대고,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촌극이 아닌, 또렷한 현실이었을 뿐이야.”

그녀는 이 세상의 침전물이었다.

무게감 없이 부유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리제는 어울리지 못한 채 가라앉는 침전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 죽는다.

세상의 여과 작용에 의해 걸러지듯 말이다.

“그렇기에 명확한 악역도 없고.”

리제는 몸을 돌려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주워 걸쳤다.

“가시적인 적도 없으며. 형편 좋게 마련되는 신도 없겠지.”

나름대로의 해답이었다.

리제가 자신의 짧은 인생 동안 도출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리제는 벨트를 허리에 두른 뒤 버클을 비틀어 열었다. 서둘러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시는 사용하지 말라고 주치의가 당부했던 병기.

아르테간트를 버클에 결속시킨 뒤 리제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세상은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어.”

어디부터가 희극이고, 어디까지가 비극인지 고심했던 밤은 지났다.

이것은 그저 현실일 뿐이다.

희극과 비극.

천국과 지옥.

선인과 악인.

피고인과 선고인.

그렇게 관념적으로 이분되지 않는 실존의 세계가 현실일 뿐이다.

리제는 망토를 크게 휘둘러 어깨에 걸쳤다.

“그러니까 이제와서 용서를 갈구할 수는 없잖아.”

누자베스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다.

그녀의 죽음과, 세상의 마땅한 섭리와, 용서받을 권리와, 터부를 범한 죄인을 동정하는 마음 따위와 지워지지 않는 얼룩과 남기지 못할 약간의 미련은.

서로를 향하는 시선을 흐리지 못할 것이다.

* * *

조시네스가 시체로 발견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자신의 침대 위에서 끔찍하게 난도질된 채로 발견되었고.

가장 큰 규모의 호족을 이끌고 있는 호족장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금새 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마족들의 소행이라는데?”

“설마 누자베스 님이 그럴 리가 있나! 이제와서 동맹을 깰 리가…….”

“이 양반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만. 동맹은 영주의 딸과 맺은 거고, 이제는 입을 줄이려는 것이겠지.”

“그래?”

아리카 섬의 영지민들까지 조시네스의 사망 소식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마족들의 소행이라는 점에 어렴풋이 납득하고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리제 님이 영주님을 죽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마족들의 둥지 문제는 처리가 됐으니 호족들 쪽으로 칼을 돌리려는 게 아닌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만…….”

만약 리제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친부까지 살해한 여자라면.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 역시 곱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어느쪽이 진실이든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다시 셋으로 나눠볼 셈이구나, 누자베스.”

리제는 조시네스를 살해한 것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암살을 사주한 것이 누구인지 여론이 갈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파악했다.

“겁 많은 늙은이들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려 하지는 않겠지.”

그들은 잃을 것이 너무나 많은 인종이었다.

자신의 병력들을 긁아모아 요새를 구축하기 바빴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않아야 할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호족들이 취하는 행동은 뻔했다.

뻔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가용 병력의 규모가 줄어든 리제는 취할 수 있는 수단이 적어졌다.

“클라이막스는 좀 더 화끈했으면 좋겠는데.”

리제가 사열된 병력의 앞에 나섰다.

이번에도 텐즈강이다. 텐즈강의 남쪽에 진지를 구축한 누자베스의 군대는 순식간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얘기로는 들었지만, 지하 인프라가 완성된 하이브 마인드의 군대는 상상 이상으로 지역을 점령하는 속도가 빨랐다.

보급 수단이 지상으로 옮기는 것밖에 없는 인간의 군대에 비해 안정성이나 속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장 덤벼들 기색은 없습니다. 일단 저희도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호족장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시릴스가 다가와 리제에게 조언을 했다.

현재의 병력으로 누자베스의 군대를 물릴 수 없다.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대한 버티며 지원군을 요청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상식적인 조언에서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호족장들이 과연 이번에도 병력을 출자할까? 조시네스 경이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느 쪽에 힘을 실어줘야 할지, 누구를 지원하는 게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길인지, 그런 과감한 결단을 그 늙은이들이 할 수 있을까?”

리제는 피식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슨 생각일까. 지금의 아리카는 먹기 쉽게 조각이 난 것 같지만.”

누자베스가 조각을 하나라도 집어 먹는 순간이 끝이다. 누자베스가 포식자로 돌변하는 순간 호족들은 재빠르게 리제를 구심점 삼아 뭉칠 것이다.

“지루하고 질척한 싸움을 바라고 있니, 누자베스?”

리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언덕의 끄트머리에 섰다. 시야의 아래로 새까맣게 몰려든 하이오크 척탄병 부대가 선명히 보였다.

“돌격 준비를.”

시릴스에겐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리제가 얼마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말이다.

* * *

“나이를 먹을수록 현명해지는 건 아니거든? 평생을 탐욕스럽게 살아온 늙은이들이 무슨 재주로 지혜를 얻겠어. 알량한 잔꾀와 뻔뻔함만 늘겠지. 그렇게 쌓아올린 재화와 비례하여 겁쟁이가 되는 법이야.”

누자베스는 출전 준비를 끝마친 하이오크 척탄병 사이를 빠르게 걸으며 입을 열었다.

“리제의 뒤를 지원하던 호족장 놈들은 자신의 같잖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소극적이게 되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않아야 할지 가늠도 못 하고 있겠지.”

“각하, 하지만 더 위협적인 적대 세력이 이빨을 드러낸다면 바로 다시 뭉칠 것입니다.”

호족장들과 리제의 연대가 약해진 지금이 아리카 섬을 집어삼킬 적기였지만. 지금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잡아 삼키려 든다면 반대편으로 도망칠 것이 뻔했다.

다시 리제와 결탁하여 발악을 시작한다면 누자베스의 입장에서도 삼키기 껄끄러운 식사가 될 것이다.

누자베스는 로아가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로아. 그러니까 고기를 먹기 전에 가시를 제거해야지.”

누자베스는 붉은빛이 감도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의자에 허리를 걸치며 텐즈강 너머를 바라봤다.

“이 전장이 누군가에겐 지독할 만큼 선명한 현실이겠지만.”

누자베스에게 있어서 이 전장은 일종의 가장극에 지나지 않았다.

“충돌에 대비한다. 천천히 안으로 끌어들여서 흠씬 두들겨 패주자고.”

“저쪽에서 먼저 공세를 가하리라곤 상상할 수 없습니다.”

로아가 누자베스의 판단을 의심하듯 그렇게 첨언을 덧붙였지만.

“그래그래. 계집애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왕자님이 도와주러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지.”

“인간 계집을 꽤나 높게 평가하고 계시는군요.”

“사나이끼린 그런 식으로 통하는 거야.”

리제는 이미 한 마리의 수컷 짐승이었다.

용서의 기회 따윈 감히 바라지 못하는 짐승이었을 뿐이다.

구원은 없다.

구제할 길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부질없이 초라한 마지막 날숨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만이 누자베스에게 허락된 유일한 일이었다.

* * *

쏴아아아아!

비가 내렸다.

강가 주변의 습지가 일순간에 질척해졌다. 예상 이상으로 굵은 빗줄기가 계속됐고, 텐즈 강은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갈라우드의 군대는 강을 넘어와 누자베스의 병단과 교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강물이 계속 불어나잖아!!”

“젠장, 제엔자아앙! 후퇴도 못 하겠구만.”

“오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덤벼라, 더러운 오크 자식들아!”

빗물과 피에 흠뻑 젖은 보병들은 악을 내지르며 하이오크 척탄병들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퇴로가 차단된 상황.

의도된 것이 아니지만, 배수의 진이 마련된 것이다.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고.

“…….”

이번 전투에서 야전 지휘를 맡게 된 로아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저 녀석이 대장이다! 죽여!”

보병 하나가 로아를 알아보고는 창을 내질렀지만!

콰득!

로아는 창이 날아오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창대를 붙잡았다.

“어, 어어……? 카악!”

창을 당기자 동시에 끌려온 병사의 목을 맨손으로 찢어 흙바닥에 버린 후. 로아는 품속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지상전에서 폭우라. 흑색 화약에 의존하는 부대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군.”

하이오크 척탄병은 이번에 765호 둥지에서 새롭게 구성하여 재편성한 신규 부대였다.

111호 둥지의 주력으로 삼던 정예 하이오크 투사보다 능력치는 낮지만, 보다 적은 비용으로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었다.

부족해진 능력치를 커버하기 위해 대검이 장착된 머스킷으로 무장을 바꿨지만.

갑작스러운 폭우에 머스킷은 모조리 사용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제대로 된 백병전 훈련도 받지 못한 하이오크 척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로아는 담배를 잘근잘근 물며 혀를 찼다.

‘언더 케이지 부대의 규모가 조금만 더 컸다면 진영을 무너뜨려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뒤늦은 후회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로아는 갈라우드와의 첫 접전에서 빠른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요행을 믿고 덤비는 놈은 상대해주지 않는 게 상책이지.’

로아는 빗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첫 번째 전투의 결과를 보고했다.

[로아 : 각하, 7전진 둔영까지 퇴각하겠습니다. 보급 지령을 부탁드립니다.]

[누자베스 : 오늘은 우리 로아의 날이 아니었네.]

[로아 : 죄송합니다, 각하. 하지만 두 번씩 일어나는 요행은 없을 것입니다.]

[누자베스 : 괜찮아괜찮아, 똥패면 눈치 봐서 얼른 죽는 것도 실력이야. 우리 아직 판돈은 많으니까 느긋하게 즐겨 보자고.]

창대처럼 굵은 빗줄기 사이로 리제와 로아의 시선이 교차했다.

거리는 30여 미터.

리제는 귀족의 영애처럼 격식을 차려 로아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명백하게 조롱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이번엔 비루한 승리를 양보하지.”

로아는 코웃음을 치며 발걸음을 돌렸다.

첫 승전보는 리제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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