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95화 (95/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95화

    남겨진 일(3)

    “엘베제라. 우리 꼬맹이가 엘베제의 신분을 인정받다니 감회가 새롭군.”

    스칼렛이 혈루목의 수액을 와인잔에 따르며 그렇게 말했고.

    “시트란테 서도 내에선 최고위 등급입니다. 총독도 각하의 행보에 사활을 걸었다는 의미일 겁니다. 이제부터 마왕 아일라드도 각하의 활동을 직접 살피기 시작하겠죠.”

    루칸다는 내 지위가 갖는 객관적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설명을 덧붙였다.

    쉽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트란테 서도의 에이스’ 정도겠지.

    “하지만 동시에 모욕적이네. 엘베제라면 흡혈귀들의 프리스커스와 격이 크게 다르지 않잖아? 최소한 그란델의 신분은 받았어야 해.”

    로아가 팔짱을 끼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내뱉자. 스칼렛과 루칸다가 동시에 로아를 향해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이봐, 반푼이. 장난하나? 그란델은 혈계의 프린스와 나란히 앉는 지위일세. 우리 주군이 아무리 대견해도 아직까지 그 정도의 관록은 없네.”

    “이번엔 흡혈귀의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군. 그란델은 본부직계의 군단 총사령관에게 허락되는 지위다. 고작 이런 촌구석 섬 하나를 차지했다고 그란델의 지위를 허락했다간, 개나소나 다 그란델이겠군. 세상물정을 모르면 입이라도 다무는 게 어떤가, 로아?”

    잠깐 이번 작전의 개요에 대해 설명하려고 챔피언들을 불러 모았는데. 셋이 모이자마자 또 이 지랄이다.

    봐라! 루칸다와 스칼렛이 마치 텃새를 부리듯 로아를 쪼기 시작하지 않나?

    여기서 로아가 폭발해서 덤벼들면 이제 본격적으로 개판이 나는 거다. 냉큼 로아를 진정시킬 준비를 했지만.

    “아, 그래?”

    예상과는 달리 로아는 여유롭게 둘의 가시돋힌 말들을 흘려버렸다.

    “아차, 깜빡했네. 둥지의 챔피언들이라고 해도 피도 안 이어진 놈들이니까. 모르는 것도 어쩔 수 없나, 하핫.”

    “…….”

    “…….”

    “하기야 그런 이야기는 긴밀한 관계가 아니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는 따지자면 누자베스와 형제 관계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만.”

    되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이 자식……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모양인데…….’

    로아가 혹여나 신나서 쓸데없는 소리까지 할까 봐 내가 조마조마하는 동안. 스칼렛과 루칸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개소리하지 말게. 분가 출신 주제에 무슨 형제인가?”

    “드디어 머리가 돌았군. 각하, 이 건방진 놈에게 한 마디 해주시죠.”

    역으로 루칸다와 스칼렛의 기분이 언짢아진 모양이다. 어째선지 가만히 있던 나한테 로아를 주의시키라고 항의해 왔다!

    “로, 로아……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서 앉아. 작전 브리핑할 거니까.”

    “알았어.”

    로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와 앉았다. 마치 친밀도를 과시하듯 옆에 바짝 붙어서!

    보인다. 그래 보인다. 로아는 지금 눈빛으로 루칸다와 스칼렛에게 말하고 있는 거다. 이게 바로 너희와 나의 차이라고 말이다!

    ‘아니, 무슨 둥지가 이래…….’

    이미 스칼렛과 루칸다는 눈빛에 이성을 잃은 기색이다. 당장 여기서 로아의 죽빵을 한 대 날리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처럼 어금니를 꽉 물고 있지 않나?

    “얘들아 각하는 너희가 이럴 때마다 위장이 쓰려서 천공이 날 것 같아. 응? 그냥 다 때려치우고 귀농하고 싶어진다고! 각하가 위암 걸려서 개 구충제 주워 먹고 다녀야 그만할래?”

    햄토리의 복실복실한 털이라도 쓰다듬으며 심신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오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드르륵!

    갑자기 스칼렛이 의자를 뒤로 빼며 다시 앉았다. 시발, 깜짝이야! 드디어 오늘 여기서 죽음의 데스매치라도 열리는 줄 알았다!

    “주군.”

    톡톡.

    스칼렛이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가볍게 두들기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대로 여기에 앉게.”

    이번엔 로아의 싸늘한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별로 새로운 챔피언이 왔다고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 않나? 주군은 이 늙은이에게 어리광을 부릴 때가 가장 안심된다고 했으니 언제든 괜찮네.”

    “아냐아냐. 평소에 안 앉았어! 사이즈를 봐라, 사이즈를! 앉을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잖아.”

    “아하…… 누자베스는 무릎 위에 앉아서 어리광부리는 걸 좋아하는구나.”

    “아니라고!! 루칸다 해명 좀 해줘라. 내가 평소에도 로리마망 취향은 아니었다고 로아한테 말해줘.”

    루칸다라면 내 결백함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늘 밤은 마침 시간이 있으니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시겠습니까? 각하와 목욕을 함께한지도 꽤 오래됐군요.”

    “누자베스 너…… 저런 고블린하고 목욕을 같이 해?”

    “이상한가? 사내끼리 육체를 단련하고 흘린 땀을 닦아주는 것만큼 결속력을 다져주는 일도 없다만.”

    “웃기지 마. 누자베스가 너 따위하고 같이 목욕을 할 리 없잖아. 누자베스 아니지?”

    “아니, 사실이긴 한데…….”

    이번에는 제대로 충격받았다는 기색이다.

    로아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리긴 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문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게 왜 충격받을 일이야! 잠깐, 잠깐만. 로아 너 지금 이상한 상상하는 거 아니지? 그런 상상하면 스칼렛 씨가 다 꿰뚫어보니까 조심해! 그보다 우리 둥지는 목욕탕에서 비누를 취급 안 하니까 괜찮아!”

    로아는 잠시 호흡을 고르며 진정한 후.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누자베스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게 좋아. 배신자와 꽃뱀이라.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면 바로 버려야지.”

    “아, 알았으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 로아…… 브리핑할 거라고.”

    욱씬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러 풀어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루칸다. 준비는 끝났냐?”

    “시릴스에게 고블린 살수 셋을 빌려줬습니다. 어떤 식으로 구워 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릴스가 맡은 일만 제대로 해낸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신중을 가하지. 루칸다 네가 직접 따라붙어. 허튼 수작을 부리려 한다거나, 꼬리를 붙잡힐 것 같으면 처리해.”

    “존귀한 의지를 받들겠습니다.”

    이번엔 스칼렛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스칼렛, 꿀 많이 빨았으니까 슬슬 일 시작해야지.”

    “그레이브야드 부대의 병력 보충은 이미 완료됐네. 이번에 새롭게 창설된 하이오크 척탄병 부대의 실효성을 검증할 기회겠군.”

    “아니, 이번엔 루칸다와 같이 잠입해. 빈큐럼으로 의식을 복종시켜야 될 놈은 루칸다가 알고 있으니까.”

    “……썩 내키진 않는군.”

    야전 지휘자의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는지 스칼렛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구울 머스킷티어로 구성된 그레이브야드 부대는 스칼렛 네 직계로 유지할 테니까 그렇게 뾰루퉁하지 마.”

    “주군의 뜻에 따르겠네.”

    마지막 차례는 이번 작전에서 처음으로 참전하게 된 로아였다.

    “로아. 하이오크 척탄병 부대, 언더케이지, 고블린서비스의 지휘 전권을 일임한다. 스텔라도 깜짝 놀라서 치마를 적실 만큼의 공훈을 기대하지.”

    “맡겨줘. 저 고블린이나 흡혈귀가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해낼테니까.”

    뒤늦게 생각났다.

    111호 둥지의 전리품 중에는 파괴한 베놈이 5기가 더 있었다.

    “아, 두르난 아재. 베놈 복구는 언제쯤 끝나?”

    “이런 쥐꼬리만 한 예산 편성으로 뭘 기대하는 겐가! 이건 고대 병기일세! 연맹에서 보유한 부품을 들여와 수리하는 게 가장 빠른데…….”

    “하핫, 하꼬 둥지의 예산이 늘 그렇지 뭐.”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하네. 지금 한창 박격포 탑재의 가능성에 대해 연구중이니.”

    “오케이. 섬 정리가 끝나면 바로 예산 빵빵하게 넣어줄게.”

    좋아.

    이제 밑작업은 대충 끝이 났다.

    남은 건 실행하는 것뿐.

    * * *

    “엘베제? 그딴 코딱지만한 섬을 하나 차지했다고 엘베제라고? 하! 시트란테 서도엔 그렇게나 인재가 없었나?”

    “뤼클라. 시트란테령 총독의 결정이다. 이쪽이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지.”

    “이봐, 24호. 아직은 옆동네 일이라고 쿨한 모양인데. 엘베제 딱지를 단 애새끼가 네 영역과 접경하고 깽판을 부리는 순간부턴 그리 쿨하진 못할 걸? 아니면 자아를 형성한지 수 개월 만에 아리카를 집어삼킨 괴물놈이 섬 하나에 만족하고 안주할 거라고 생각해?”

    바체트령의 본도 론트라 섬.

    그 중에서도 솔리엔 령의 북동부의 해안 지역은 ‘13차폐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13차폐구에서 배를 타고 곧장 북쪽으로 향하면 시트란테 서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트란테 서도에서 본도로 상륙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역이란 말이다.

    본래 글로레나 왕조의 귀족 ‘포뮬리나’의 영지였지만, 120여 년 전 나타난 막강한 하이브 마인드들에 의해 성이 함락된지 오래였다.

    명문 무가 포뮬리나를 몰락시키고, 13차폐구를 집어삼킨 하이브 마인드는 셋.

    론트라 솔리엔 령 13차폐구 5호 둥지.

    관리자 프리스커스 뤼클라 남작.

    론트라 솔리엔 령 13차폐구 88호 둥지.

    관리자 제5식 구도지정자 아일크라나.

    론트라 솔리엔 령 6교구 24호 둥지.

    관리자 타입 마쿼드의 드래곤 세도루프.

    포뮬리나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맺어진 일시적인 동맹 관계였지만, 100년이 넘은 지금도 세 둥지의 동맹은 유지되고 있었다.

    동맹 기간이 길어지며 세 곳의 둥지는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비효율적인 부분을 쳐내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선 세 곳의 둥지가 하나의 둥지처럼 복잡하게 얽힌 형태로써 완성되었다.

    보통은 동족 포식으로 둥지를 합병하여 확장해나가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13차폐구를 차지한 둥지의 형태는 희귀한 케이스.

    모험가들 사이에선 ‘컴플렉스’라고 불리는 둥지였다.

    세 마리의 하이브 마인드가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규모의 둥지보다 그 위험성이 훨씬 높았다.

    그리고 이곳.

    13차폐구를 점령하고 있는 둥지의 관리자 셋은 여타 하이브 마인드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하이브 마인드 셋이 결착해 있는 것이다. 바체트령에 존재하는 컴플렉스 형태의 둥지들 중에서 최강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삼각동맹).

    솔리엔 령에서 가장 위협적인 세력.

    그리고 이들은 현재 이웃 지역에서 초신성처럼 등장한 ‘엘베제’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엘베제라…… 헬베르카 계열인가 본데. 일전에 분가의 혈액으로 꽤나 만들었다지?”

    24호 둥지의 관리자 세도루프는 뤼클라 쪽을 슬쩍 바라보며 그렇게 첫 마디를 내뱉었다.

    “분가의 혈액은 대부분 보잘것없었지.”

    “헬베르카 본가 쪽이면?”

    “우리의 공리에 협위가 되겠군.”

    88호 둥지의 아일크라나가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헬베르카란 굶주린 개와 다를 게 없으니. 눈만 뜨면 남의 아가리에 든 고기까지 손가락으로 후벼내 삼킬 놈들이다.”

    헬베르카가 지닌 특성은 13차폐구의 전쟁군주들을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동시에 아주 약간의 두려움까지 말이다.

    “섬의 정리가 끝날쯤 직접 얼굴을 보고 오지.”

    아일크라나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과 동시에. 목에 걸려 있던 뾰족한 악세사리가 흔들리며 빛에 반짝였다.

    반 르낙시아를 이끌었던 세력 중 하나인 ‘리케릴 성찬회’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장신구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