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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94화 (9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94화

    남겨진 일(2)

    시릴스의 고뇌는 길지 않았다.

    밤이 되자 그녀의 침실에 한 장에 종이가 어느샌가 나타났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에는 정갈한 공용어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해피엔딩을 제안하겠다.’

    누자베스의 필체는 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시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짤막한 문장을 몇 번이고 되새김질 하듯 읽었다.

    해피엔딩이라니.

    그런 허황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리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스텔라의 은혜로 기적이 일어나 리제가 목숨을 연명하게 되더라도.

    조시네스의 도구로 사용되거나, 첩이 되어 수도로 팔려나가는 게 정해진 운명이었다.

    시릴스가 보답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보답을 바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보답받아서도 안 되는 관계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가씨…… 벌을 받아야 하는 짐승도, 용서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짐승도 모두 아가씨가 아닙니다.”

    시릴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보였다.

    설령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리제가 살아남길 바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시릴스는 재빠르게 저택을 빠져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누자베스의 둥지 입구에 도착하자, 이미 시릴스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 살수들이 나와 있었다.

    시릴스는 밤에 도착한 종이쪽지를 들어 보이자, 고블린 살수가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입구에서 심부까지의 단축 통로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할 만큼 큰 둥지였다.

    물론 내부의 마족들이 쓰는 전용 통로가 있었기에, 중간쯤부터 고블린 살수가 시릴스의 눈을 천으로 묶어 가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에 피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몇날며칠을 걸은 듯 피곤했다.

    아마도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발이 무거워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누자베스를 설득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누자베스에게 아량을 구해야 될까?

    리제의 목숨을 살리는 대가로 무엇을 바쳐야 할까?

    그런 답이 없는 질문들이 연달아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안녕, 시릴스?”

    누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고블린 살수가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줬고, 시릴스는 누자베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자베스의 옆에는 로아가 오른편 뒤쪽에 두어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고 말이다.

    둥지의 심부에 도착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딘지 모를 통로의 어딘가였다. 누자베스는 평소 보던 전투복 차림이 아닌, 가벼운 셔츠를 한 장 걸친 차림이었다.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라.”

    로아가 으르렁거리듯 시릴스를 향해 말했다.

    시릴스는 바로 무릎을 꿇었지만, 누자베스가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손님으로 모셔온 건데 무릎을 꿇리면 쓰나?”

    누자베스는 시릴스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운 뒤 말했다.

    “잠깐 걸으면서 얘기할까?”

    “아, 예…….”

    생각했던 것보다 온화한 분위기였다.

    혹여나 누자베스가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고 가슴을 졸였던 것이다.

    리제가 호족장들과 합심하여 약속을 이행하려 하지도 않고, 되려 둥지를 습격하려 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가정이다.

    누자베스의 765호 둥지. 둥지의 군세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루칸다나 스칼렛 같은 챔피언들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는지 시릴스도 직접 목격했다.

    누자베스는 이 섬에서 가장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사내였다. 아니, 최소한 시트란테 서도 내에선 그랬다.

    “마침 이 앞이 산란장이네. 이거, 손님을 모셔왔는데 추한 걸 보이는군.”

    “바로 생산 공정을 멈추겠습니다.”

    로아가 그렇게 말한 후 곁에서 떠났고.

    누자베스와 시릴스는 양쪽 측면에 설치된 산란장 사이를 걸었다.

    산란장은 거대한 인간의 장기처럼 보이는 시설이었다. 물론 그게 사실이었다. 사악한 마법으로 비정상적인 수준까지 비대화된 장기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시릴스는 끓어오르는 혐오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자베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본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병력 생산 시설을 확충할 필요가 있어서 말이야. 이번에 새로운 라인을 좀 설치했지. 포유류라면 뭐든지 제물로 삼을 수 있으니까 코스트도 그다지 들지 않고.”

    그 순간.

    멀리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끝없이 마물을 토해내는 흉측한 산란장만 나열되어 있었을 뿐이다.

    누자베스는 그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규모가 꽤 되니까 슬슬 제물이 부족하네.”

    시릴스는 등골이 얼어붙는 감각이었다. 누자베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건 협박이다.

    자신이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줄 수 있다고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릴스는 양쪽으로 끝없이 나열되어 있는 산란장을 훑어본 후 어금니를 꽉 물며 말했다.

    “누자베스 님의 의지라면 제가 기꺼이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고작 한 사람? 최소한 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지 않아?”

    하늘이 무너지는 감각이었다.

    누자베스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이미 리제와 호족장들의 진의를 파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누자베스 자신을 도울 생각이 없다.

    약속을 이행할 생각도 없다.

    그렇기에 전쟁군주를 배신한 대가를 치르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시릴스는 바로 누자베스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지면에 박았다.

    “아가씨께선 아무런 잘못도 없으십니다. 만약 잘못이 있다면 호족장들의 압력에 못 이겨 굴하신 것뿐입니다. 아가씨께서는 누자베스 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줄곧 노력하셨습니다…… 부디, 저는 어찌되어도 좋으니 아가씨만큼은…….”

    퍼억!

    시릴스의 눈앞이 번쩍였다.

    격통이 번졌고, 입안에서 쇠 냄새가 진동했다. 핏물과 함께 부러진 치아가 흘러나왔다.

    누자베스는 시릴스의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쟁군주를 희롱한 대가가 그렇게 싸구려일 리 없잖냐. 계산이 잘못됐어. 처음부터 다시 제시해 봐.”

    “하, 하윽…… 아가씨만큼은…… 저는 어찌되어도 좋으니 아가씨만은……!”

    빠악!

    주먹이 시릴스의 뺨을 후려쳤고, 검붉은 핏방울이 지면에 흩뿌려졌다.

    “다시.”

    “뭐든지, 뭐든지…… 하겠습니다. 아가씨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몇 번이고 누자베스의 일방적인 폭력이 이어졌다. 하지만 시릴스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신창이가 되어갈 수록 시릴스의 진의가 또렷해졌다.

    누자베스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리제와 나. 둘 중 누가 이기든 시릴스 네가 바라는 미래는 없겠지.”

    누자베스는 로아가 가져온 엘릭서를 시릴스에게 뿌리며 말했다.

    “결국은 같다는 말이야. 여기서 마물을 낳게 되거나, 늙고 추잡한 노친네의 자식이 영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거나, 그게 아니면 수도로 팔려가서 하룻밤의 유흥거리로 소모되겠지.”

    로아가 시릴스의 어깨를 붙잡아 상체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누자베스는 흉하게 부어오른 시릴스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고, 어떤 양아치 자식이 이 예쁜 얼굴을 피곤죽으로 만들어 놨냐. 하여간 무식한 놈들은 상종하면 안 돼. 그치?”

    “저는…… 괜찮습니다, 누자베스 님. 아가씨만 무사하실 수 있다면.”

    “그래그래, 무사해야지. 소중한 아가씨가 무사해야지. 걱정하지 마, 시릴스.”

    누자베스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런데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진짜야?”

    “예, 뭐든지…….”

    시릴스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하자, 누자베스는 이제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구상한 해피엔딩을 살짝 말해줄게.”

    누자베스의 입에 시릴스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가 지금부터 내뱉는 말들이 리제와 시릴스의 운명을 결정지을 테니까.

    * * *

    “그거 알아? 나는 가끔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시릴스가 돌려보낸 뒤 산란장의 구석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로아가 안주머니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내 담배 한 개비를 자신의 입에 물었다.

    “그런가요?”

    담배의 끄트머리에 불을 가까이하여 깊게 빨아들인 후. 불이 붙은 담배를 내 입술 사이에 끼워넣었다.

    로아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에서 옅은 머스크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그런 가정을 해보자고. 만약 내가 인간이라면 리제와 시릴스에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줄 수 있었을까?”

    “동족으로써 말이죠.”

    로아는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자신의 입에 물었다.

    “덧셈과 뺄셈의 문제입니다, 각하. 단순하기 그지없는 산수의 문제이죠.”

    의외로 로아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동포와 동족을 향한 연민과 아량만큼을 더해서.”

    로아는 담배 연기를 깊게 뿜어내며 이어 말했다.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 권리를 잃지 않았는지를 고려하여 수를 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면 각하께서 인간이었어도 지금의 선택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의 계산은 그리 삭막한 거야?”

    “적어도 덜하진 않겠죠. 인간이란 본래 그런 생물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박애와 자비란 관념적 정의에 불과합니다. 각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진심은 없습니다. 최소한의 가식으로 포장된 역겨운 본성뿐입니다.”

    만약 모든 인간이 그런 놈들뿐이라면.

    자신의 역겨운 본성을 얕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덮고, 태연하게 살아가는 놈들이 대다수라면 말이다.

    그런 재주도 없이 서툴게 살아가는 인간은 누가 구원해야 되는 것인가?

    “로아. 111호 둥지의 인간 챔피언은 별로였어?”

    “예? 갑자기 화제 전환이 뜬금없네요. 오베론 말입니까? 그저 그런 챔피언이었…… 설마, 각하?”

    “그냥 가능성의 이야기야. 그렇게 놀라지 마, 짜식아.”

    로아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준 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리제 정도면 쓸 만할 것 같은데.”

    “각하의 뜻이 곧 저의 뜻입니다. 하지만 다른 챔피언들의 반발은 어떨지…….”

    “솔직하게 말해봐.”

    “인간 따위를 둥지의 챔피언으로 들이는 건 달갑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루칸다나 스칼렛에겐 물어보지 않아도 답이 뻔했다. 스칼렛은 리제를 거의 유통기한 지난 혐오식품처럼 보고 있고 말이다. 루칸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고.

    “스테레오 타입의 뻔한 신파극이지.”

    담배 연기와 함께 속내를 털어놓자.

    로아가 뒤를 쫓아오며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인간이 아닌, 하이브 마인드로서 이야기를 매듭짓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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