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93화
남겨진 일(1)
카타쿨라의 111호 둥지의 규모는 지금까지 삼켜왔던 여타 다른 둥지들과 규격 자체가 달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리카 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대규모 둥지가 아니던가?
카타쿨라를 처리하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둥지 병합의 과정이 순조롭게 척척 진행되진 않았다.
일단은 폭주하기 시작한 하이오크 투사들을 정리하는 데만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거목의 뿌리처럼 넓게 펼쳐진 땅굴을 모조리 파악하는 것도 큰일이었고 말이다.
‘물론 이제는 챔피언이 셋이나 되니까 다들 알아서 잘 하고 있지만.’
특히나 이번 둥지 병합에서 가장 바쁘게 일해주고 있는 게 로아였다. 본래 111호 둥지의 챔피언이었던 덕분에 능숙하게 병합 절차를 진행해 나갔다.
어쨌거나 자잘한 일은 챔피언에게 모두 맡기고, 상부에 올릴 보고서도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리제가 왜?”
“병력을 해산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약속대로라면 이미 병력을 해산시키고 통상 방위 규모의 병대를 유지해야 합니다만.”
“뒷풀이라도 하고 해산하려는 모양이지. 원래 인간놈들은 그런 걸 좋아해. 쫑파티 할 때 나도 불러달라고 전해줘라.”
“그런 귀여운 이유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루칸다는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보고를 바탕으로 작성한 병력 배치의 동향을 지도에 그려왔다.
111호 둥지 공략 후 비르겐슈타인 부대를 갈라우드의 군대 정탐에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몇몇 부대원은 페페의 모험가팀이 착실하게 본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있었고 말이다.
‘페페에겐 내 피를 뽑아서 담아줬지.’
물론 카타쿨라의 시체에서 회수한 혈액이라고 거짓말을 좀 치긴 했다.
그걸 가지고 수도로 돌아가 감식을 해보면 헬베르카의 혈액이라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페페와 일행들은 맡은 임무를 완수한 것이니 아리카 섬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지.
물론 루칸다와 스칼렛은 모험가들을 죽여서 입을 막는 게 최선이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금수 새끼도 은혜를 입으면 갚는 법이다.
아무리 흉폭하고 사악한 하이브 마인드라도 목숨의 은인에겐 한 번쯤 아량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나?
뭐, 여기까지 아량을 베풀었는데도 발목을 붙잡으려 한다면…… 그때는 하이브 마인드의 방식으로 해결을 봐야겠지만.
“각하, 인간 계집이 허튼 수작을 부리기 전에 짓밟아야 합니다. 현재 합병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빈틈을 찔린다면 귀찮을 수 있습니다.”
“아직 리제가 개수작을 부린다는 확증은 없잖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진심은 아니고 희망사항이다.
끔직하게도 나는 리제가 어떤 인간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어떤 선택을 취할지도 말이다.
그러니까 루칸다의 의심은 더 없이 합리적이었다.
“루칸다. 이번엔 우리 싸우지 말자.”
“물러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현재 둥지 합병에 대다수의 병력이 투입된 상황이라지만, 갈라우드의 군대와 거의 호각으로 싸울 정도는 되었다.
루칸다는 잠시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리카 섬을 버리고 바로 본도로 진출하는 방법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진출 준비까지 둥지의 핵심 시설을 방어하기만 해낸다면 말이죠.”
아무래도 내 생각을 잘못 짚은 모양이다.
“아냐아냐, 그런 게 아니라. 정면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건 피하면서 아리카 섬을 먹자고.”
“좋은 생각이군요. 각하께서 직접 그 인간 계집을 만나서 어떻게 구워삶을지 기대가 됩니다.”
“아니지. 절박한 쪽을 자극해야 되는 법이야. 리제는 나하고 진흙탕에서 격하게 뒹굴고 싶어서 안달난 애잖아.”
루칸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방금 전에 도착한 새로운 서신을 펼쳤다.
“키야! 루칸다 이거 봐라. 시트란테 서도 총독이 보낸 건데, 나한테 누자베스 변경백이란다. 개쩔지 않냐.”
“엘베제라. 잠정적 헬베르카 후계의 이명까지 인정받았군요.”
물론 그 칭호를 스스로 자칭하려면 해결해야 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 * *
시릴스는 어디부터 잘못 된건지 되짚어 보고 있었다.
리제가 호족장 조시네스의 저택으로 들어간 지 두 시간째. 리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시릴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런 생각을 돌이키며 곱씹어 보는 것뿐이었다.
‘카타쿨라만 처리한다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어.’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리제가 전장에 나설 준비를 한 건 시릴스였다.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는 일 없이 사전 준비는 완벽했다.
거기에 첫 출전에서 누자베스의 협력을 얻게 되었고, 연합군은 우여곡절 끝에 카타쿨라를 처치하게 되었다.
시릴스는 리제의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다. 리제가 영주 갈라우드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서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랑이들이 사라진 자리를 늙은 여우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리제에게 순순히 영주 자리를 맡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아가씨는 이미 알고 계셨겠지. 멈춰 설 수 없는 일이었다고.’
그것과는 별개로 리제는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시릴스는 어렸을 적 고아였던 자신을 거둬주었던 영주 갈라우드의 말을 떠올렸다.
‘한 번 전장에 발을 들인다면, 전장은 계속 뒤를 쫓으며 탐욕스럽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올 거란다. 어째서 검을 들어 맞서길 두려워하는지, 무엇 때문에 마족의 전쟁군주를 방치하는지 그걸 묻고 싶은 것이로구나.’
시릴스는 딱 한 번.
갈라우드에게 울분을 토해낸 적이 있었다.
어째서 하이브 마인드를 방치하여 자신의 가족과 이웃들을 죽게 내버려뒀는지 말이다.
그 질문에 갈라우드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하물며 태연하지도 않았다.
‘겁쟁이 영주라 그렇단다. 용감하기엔 짊어진 것이 너무나 많구나. 전장에게 모조리 주기엔 아까울 만큼 소중한 것들이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갈라우드가 피를 흘리며 시릴스를 향해 건넨 마지막 조언은.
‘겁쟁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이 못지않은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단다, 시릴스…… 겁쟁이가 될 순간을 놓치지 말거라…….’
끼이익.
철창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열렸고.
조시네스 가의 시종들이 먼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뒤이어 리제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가닥으로 묶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많이 기다렸지? 돌아가자.”
“예, 아가씨.”
마차에 두 사람이 올라타자 졸고 있던 마부가 벌떡 일어나 바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리제는 조금 지친 것인지 턱을 괸 채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역시 늙은 능구렁이야. 오베론에 관한 얘기를 슬쩍 떠봤는데 책 잡힐만한 소리는 일절 안 하더라.”
“암호문의 해독이 끝난다면 물증이 마련되겠죠.”
“내가 죽기 전엔 그 약점을 활용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네.”
리제는 키득키득 웃었다.
스스로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말한 것이겠지만, 시릴스에겐 도저히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누자베스는 어때?”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순수한 걸까, 아니면 순수한 척을 하는 걸까?”
이미 호족회에선 누자베스까지 토벌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리제는 누자베스에게 본도에 진출할 때까지 은신처를 제공하고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호족들의 입장에선 필요 없는 지출이었다.
이 섬에서 모든 하이브 마인드를 몰아내고, 온전하게 집어 삼키는 것. 그것이 아리카 섬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던 호족들의 욕망이었다.
“아가씨께서 약속을 지키리라 믿는 모양입니다.”
“일말의 의심도 없다면 오히려 조금 미안해지네.”
그리고 시릴스는 알 수 있었다.
리제에겐 속물적인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권력과 재화. 그런 것들에 일절 흥미도 없는 인간이다.
땅과 곡물을 원하는 건 호족들이다.
그렇다면 리제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지금의 시릴스에겐 알 수 없었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누자베스 님에게 사실을 고하고, 호족장들을 쳐야합니다.”
누자베스의 협력이 있다면 이 땅에 깊게 뿌리내린 호족들을 걷어낼 수 있었다.
호족도 하이브 마인드도 갈라우드 가문이 온전히 섬을 손에 넣기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었다.
다행히도 누자베스는 이런 촌구석의 섬 따위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가 바라보는 건 바체트령 그 자체.
시릴스는 누자베스에게 그런 가능성을 보았다. 글로레나 왕조와 마왕 아일라드의 지루한 고착 상황을 깨부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말이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리제는 최초의 조력자로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갈라우드 가문이 아리카 섬뿐만이 아니라, 시트란테 서도 전체를 하사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자베스에겐 그런 꿈 같은 이야기를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왜?”
하지만 리제는 시릴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 늙은 호족장들은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현재 섬의 패권을 쥐고 있는 사내는 누자베스입니다.”
“나도 알아.”
“영지민들을 위해서라도 현명을 판단을…….”
시릴스의 입이 멈췄다.
리제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었다.
역한 악취가 풍기는 미소다.
부패해서 문드러진 욕망이 고스란히 동공에 투영되었다.
시릴스는 허리에 힘이 풀려 크게 숨을 토해냈다. 다시 숨을 들이마실 기력조차 없었다.
“아가씨…….”
“시릴스, 오히려 되묻고 싶은데. 내가 늙은 여우들하고 놀아줘야 할 이유라도 있어? 최고의 난적이 마련되었는데.”
누자베스를 높게 평가하고 있던 건 시릴스뿐만이 아니었다. 리제 역시 누자베스가 바체트령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사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래, 그렇기에 더더욱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기 싫은 것이다.
“나는 그저 목줄이 풀린 개야. 처음으로 맘껏 내달려봐서 잔뜩 신이 난 사냥개라고. 눈에 보이는 건 모조리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고, 거슬리는 건 몽땅 찢어발기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개야. 다음이 있을 것 같아? 다음이 있을까? 본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냥개에게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가씨…… 저는 영주님께서 거둬주신 천한 이 목숨을……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쓰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런,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아가씨를 잃게 되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가씨, 제발…….”
리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릴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대로 내달린 곳의 끝에는 불가피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리제는 시릴스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아 거칠게 끌어 당겼다.
“읏……!”
리제의 부드러운 입술이 시릴스의 목덜미에 닿았다. 오랫동안 홀로 품어왔던, 용서받을 수 없는 감정이 상기될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통각이 이어진 뒤에 리제는 짓궂게 웃으며 입술을 뗐다.
시릴스의 목덜미에는 선홍색의 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다음번엔 진심으로 물어버릴지도 몰라.”
다음은 없다.
그런 경고였다.
광견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누가됐든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시릴스는 그제야 자신의 업보를 깨달았다. 리제의 목줄을 풀어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시릴스 자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