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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92화 (9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92화

    아릿카사(4)

    말해두지만.

    루칸다나 햄토리 같은 애들은 내 개인실을 자기 안방처럼 드나든지 꽤 됐다.

    봐라, 스칼렛도 내 옆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지 않나?

    존귀한 전쟁군주의 침대에서 챔피언이 뒹굴거리는 걸 허용해버리고마는 나의 넓은 아량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노크까지 할 정도로 정중한 녀석이라면…….

    “로아?”

    “아, 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로아의 목소리가 문너머로 들려왔다. 스칼렛은 뭔가 석연치 않은지 눈을 가늘게 뜨며 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반쪽짜리 헬베르카를 방으로 불러서 뭘 하려던 셈인가?”

    “하긴 뭘 합니까. 내가 시커먼 사내놈하고 할게 뭐가 있다고 방으로 불러! 안 불렀어!”

    “수상한데…… 그리고 존대까지 해주는 걸 보니 점수를 따고 싶은 모양이로군.”

    “하핫! 나 같은 하꼬 둥지 관리자한테 잘 보여서 무슨 콩고물이 떨어지겠냐.”

    “그런가?”

    로아한테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을 해준 것과 동시에.

    “흐악!?”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스칼렛이 갑자기 안겨왔다. 부드럽고 서늘한 팔과 다리가 뱀처럼 얽혀 왔고.

    덜컥.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며 로아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각하,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게…….”

    방으로 들어온 로아가 이쪽을 발견하더니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나도 안다.

    어떻게 보였을지 알고 있다.

    필시. 둥지의 챔피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도덕한 하이브 마인드처럼 보였겠지.

    스칼렛 쪽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만면 가득히 머금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전부터 그런 낌새가 좀 느껴졌는데, 스칼렛은 S기질이 다분한 녀석이다. 나 같이 가련하고 힘없고 가엾은 하이브 마인드를 괴롭히거나 곤란하게 만들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로아가 멈춰선 채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나와 스칼렛을 번갈아 바라봤고.

    스칼렛은 그런 로아의 반응을 즐기듯 더욱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주군께서는 지금 바쁘신데,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게 어떤가?”

    “로아, 이건 오해다. 어떻게 보이는지는 알겠는데…… 어쨌든 오해니까.”

    스칼렛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려 봤지만 헛수고였다. 벗어나려 할 수록 올가미처럼 꽉 쪼여오기 시작했다.

    로아는 스칼렛 쪽을 노려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누자베스, 충고 하나 해줄게. 지금까지 흡혈귀를 가까이 둬서 좋은 꼴을 본 사람은 없어.”

    “재밌는 충고로군. 그럼 무능한 가신을 믿고 중책을 맡긴 당주의 끝이 어땠는지는 알고 있나?”

    빠드득.

    로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스칼렛에게 달려들 기색이다! 나는 이제 안중에도 없는지 스칼렛과 로아는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위장이 쓰라리다…….

    이미 벌집이 아니라, 넝마조각 수준이란 말이다. 스칼렛과 루칸다 뿐만이 아니라, 로아까지 합세했다. 삼각혐오관계의 완성이다.

    마치 오래 전부터 깊은 감정의 골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지 않나?

    “주군, 루스날에겐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네. 본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혈족일세.”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한 결과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선대께선 행동으로 충성을 증명했다. 그 증명에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다만.”

    “무능한 것의 충성만큼 쓸모없는 게 또 있을까?”

    이건 칼부림나기 일보직전이다.

    스칼렛은 이미 로아가 먼저 덤벼들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몸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바로 반격해서 목을 물어뜯을 생각이겠지.

    “그만, 그만! 스칼렛 앞으로 한 번만 더 로아를 도발하면 바로 코볼트 작업대로 보낸다.”

    “주군…… 어떻게 이 늙은이한테 그럴 수 있나?”

    “로아, 너도 손에 힘빼라. 저급한 도발에 일일이 흥분하는 챔피언은 신용할 수 없으니까.”

    “……알았어.”

    절로 한숨을 토해졌다.

    앞으로의 둥지 경영이 캄캄하다.

    아직 카타쿨라의 둥지 정리에도 시간이 꽤 걸릴 테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자잘한 문제들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

    * * *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잔뜩 토라진 스칼렛을 한참 동안 어르고 달래서 기분을 풀어준 후 돌려보냈다.

    스칼렛은 내가 코볼트 작업대로 보내겠다고 말한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한참 동안 울분을 쏟아내고 돌아가 버렸다.

    ‘아니, 그러니까 진담이 아니라니까.’

    ‘내가 주군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는 있나? 주군이 이만큼 큰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스칼렛 님 덕분이죠. 스칼렛이 밤낮으로 보살펴준 덕분에 똥오줌 가릴 만큼 컸죠…….’

    ‘그런데 어떻게 코볼트 작업대로 보내겠단 소리를 한단 말인가……? 이제 다 컸다고 늙은이는 뒷방으로 물러나 주길 바라나?’

    ‘그게 진심으로 한 소리가 아니라…….’

    ‘됐네! 이제 됐네! 고생고생해서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네! 나도 갈 곳 없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대충 이런식으로 한참 울분을 토해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풀어줘서 돌려보냈다.

    앞으로 스칼렛의 기분을 더 효율적으로 풀어주기 위해서 효도하는 법이나 더 연구해 놔야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아니.

    아니, 오해할까봐 첨언해 두자면 그런 효도가 아니다. 효도하는 법 아냐고 물어봐도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하아…….”

    만약 내가 도중에 죽는다면 765호 둥지는 그 순간 풍비박산 확정이다. 챔피언 셋이서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겠지.

    루칸다와 스칼렛은 이미 견원지간 확정이었고. 루칸다와 로아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지 않았나?

    게다가 방금 봤듯이 스칼렛과 로아도…….

    ‘아니, 로아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

    그나마 셋 중에서 내 말을 가장 잘 들을 것 같은 챔피언 아닌가? 적어도 로아 만큼은 스칼렛이나 루칸다와 사이좋게 지내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칼렛이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 바로 로아를 호출했다.

    아까처럼 다시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고.

    로아가 방으로 발을 들이더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지 쭉 훑어본 후 방문을 닫았다.

    “로아, 화났니?”

    “아닙니다.”

    “에이, 화난 거 같은데? 솔직히 화났지?”

    “안 났습니다! 전혀, 저언혀 화나지 않았습니다! 각하께서 흡혈귀를 곁에 두길 즐긴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과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신 건 실망스럽습니다.”

    “염병…… 화난 거 맞네…….”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시커먼 사내놈 기분까지 풀어줘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억울하네?

    루칸다는 진짜 사내답게 쿨한 놈이었다고 속으로 재평가하며, 로아를 침대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흡혈귀 별로 안 좋아해.”

    “정말입니까?”

    로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정말이지! 그냥 비즈니스적인 관계. 딱 그 정도야. 생각해 봐라? 루칸다나 스칼렛이나 둘 다 결국은 남이잖아?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거기서 끝이야, 끝!”

    “그럼 각하와 저는…….”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이지. 남은 다 필요없다니까. 진짜 아쉬울 때 내 곁에 남아줄 사람이 로아 너밖에 더 있겠냐?”

    “각하…….”

    이건 내 예상 이상으로 감동한 표정이다.

    하기야 로아는 카타쿨라가 아무리 망나니 새끼라도 같은 혈계라는 이유 때문에 챔피언 일을 맡아줄 정도로 혈연을 중시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캘러제드 따위가 아니라 오리지널 헬베르카가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조금 감동해도 이상할 건 없지 않나?

    ‘여기선 더 확실하게 밀어붙여서 쐐기를 박자.’

    이렇게 흔들릴 때 확실히 밀어놔야 완전히 넘어오는 법이다.

    “우리가 남이가! 헬베르카 아이가, 헬베르카!”

    “저는 분가 출신이라 각하와 직계 형제라고 자청할 수도 없는 신분인데.”

    “그런 게 어딨냐. 어차피 나온 뿌리는 같은데. 분가도 태어난 후에 선별되어 나눠지는 거라며? 그렇게 따지면 형제나 다름없지.”

    태어난 헬베르카의 아이가 불완전한 존재일 경우 분가로 취급한다고 한다.

    양품과 불량품을 선별하여 나눈 것뿐이지 같은 생산 공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로아를 헬베르카로 취급해 줘도 문제는 없겠지.

    애초에 사실관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로아를 여기서 최대한 구슬리는 게 핵심 아닌가?

    “다른 녀석들한텐 비밀이지만 로아 네가 내 최애챔이다.”

    “최애챔 말입니까……?”

    “최고로 애정하는 챔피언!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도 결국은 가족이 최고 아니냐. 동맹 배신 때리고 빤스런한 윤왕 놈들이나, 나르시안 그 패륜아의 자식 놈들이 뭘 알겠어, 어?”

    “맞습니다, 각하. 저도 이 둥지에서 각하의 신임을 받을 만한 챔피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아는 드디어 불안이 사그라들었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

    “각하? 갑자기 왜 입을 다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냐.”

    자기 외모는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이렇게 다른 헬베르카의 얼굴을 보자, 그 미형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무뚝뚝하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아가 생글생글 웃는 걸 보자니 말이다…….

    “다행이다, 로아. 우리가 형제라서 다행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각하와 형제라니 영광입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남매 같은 거였으면 현관에서 합체할 뻔했어.”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냥, 별 의미는 없고…… 로아 네가 내 최애챔이라는 뜻이다.”

    이 자리에 스칼렛이 없어서 다행이다.

    지금 머릿속을 읽혔다면 분명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을 게 틀림없다.

    “어쨌든 루칸다나 스칼렛이 너한테 짓궂게 구는 건 질투해서 그런 거니까. 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줘라.”

    “아, 알겠습니다. 각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계집애처럼 일일히 발끈하지 말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로아를 꼭 끌어안아 등을 다독여준 후 돌려보냈다. 이걸로 한숨 돌렸다.

    루칸다나 스칼렛이 서로를 향해서나, 로아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것까진 아직 어떻게 하지 못해도. 로아까지 합세해서 개판을 내놓는 것까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현상유지는 되지 않겠나?

    이제 카타쿨라의 둥지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시설들과 땅굴 확장 계획에 관한 보고서나 훑어보려던 찰나.

    콰앙!

    문이 거칠게 열리며 루칸다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 뭐야…… 하이오크 잔병들 벌써 다 처리했어?”

    “그것보다 급한 일입니다. 뒤통수 맞을 준비는 되셨는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지자스…….”

    설마 로아가 다 떠들고 다녔나?

    잔뜩 들떠서는 내가 한 말을 루칸다나 스칼렛에게 모두 떠벌린 건가?

    설마 아니겠지만, 식은땀이 줄줄 난다.

    단둘만의 비밀이라고 입단속을 시켜 놓는 걸 깜빡해서 이 사단이 나다니.

    “혹시 로아가 스칼렛한테도 패륜아 자식이라고 그랬어?”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그런 당연한 소리를 누가 구태여 입아프게 떠들고 다닙니까?”

    “그럼 뭔데?”

    “인간 계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 섬에 여성분들이야 많겠지만, 여기서 루칸다가 지칭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아이고, 좀 쉬게 해줘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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