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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91화 (9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91화

    아릿카사(3)

    납득할 수 없었다.

    카타쿨라는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고대 병기인 베놈의 복구에도 성공했고, 가장 위협적인 하이브 마인드였던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까지 생포했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지금 자신이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째서 밤의 어머니께서 자신을 버렸는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카타쿨라는 누자베스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허세도, 거짓말도 아닌 진심이다.

    카타쿨라는 자신을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캘러제드의 피를 계승하는 하이브 마인드가 아니던가? 이런 촌구석에서 근본도 없는 놈에게 당해 죽을 수는 없었다.

    죽어서는 안 되는 고귀한 존재란 말이다.

    “알아봐 놓은 묫자리라도 있는 모양이네. 곧 뒤질 놈인데 소원이라도 들어줘야지. 총살형, 교수형, 참수형 등등 코스도 여러 개 준비해 놨으니까 취향대로 골라 봐.”

    누자베스는 킬킬 웃으며 더 떠들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카타쿨라는 목에 핏대가 튀어나올 만큼 격앙되어 소리쳤다.

    “네놈 따위의 천박한 잡종은 이해할 수 없겠지! 나는 캘러제드의 피를 계승하는 하이브 마인드다! 누자베스 너 따위와는 격이 다른 고결함을 타고난 존재란 말이다! 밤의 어머니께 사랑받는 전쟁군주는 네놈이 아닌 이 카타쿨라 남작이다!! 시트란테 서도의 총독 역시 나의 승리를 바란다. 내가 아리카 섬을 통일시키고 론트라의 무대 위에 오르길 바라고 있다.”

    “오, 루칸다 들었냐? 캘러제드라는데 헬베르카의 분가 아냐?”

    “굉장히 대단한 귀족집 자식이었군요.”

    “그래그래. 이야, 아주 대단해. 박수라도 쳐줄까? 박수 쳐라, 루칸다. 저 새끼가 캘러제드 가의 도련님이란다. 내가 아주 큰 결례를 저질렀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쳐다봤으니 말이야.”

    누자베스는 유쾌한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루칸다도 실소를 흘리며 카타쿨라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미천한 놈…… 실컷 비아냥거려라. 내 목을 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밤의 어머니 테네브레의 뜻에 반하는 짓이 될 터. 혈통과 위계의 상하관계를 거역한다면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훌륭한 주제 파악이다, 카타쿨라.”

    쉬익!

    누자베스는 검을 가볍게 허공에 휘두른 후 카타쿨라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자기가 왜 죽는지는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누자베스와 카타쿨라의 거리는 3미터.

    이제 한 걸음만 크게 다가와 검을 휘두르면 공격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카타쿨라는 최대한 흥분한 기색을 보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 걸음만 더 다가와라.’

    최후의 발악처럼 보이기 위해 카타쿨라는 일부러 흥분한 척을 하며 악을 내질렀다.

    완전히 끝이 났다고 누자베스가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누자베스.’

    카타쿨라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루칸다는 여전히 처음 나타난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별다른 이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식으로 역전의 기회를 잡는군.’

    누자베스의 자만과 오만이 낳은 결과다.

    그저 병력을 보내 카타쿨라를 처리했다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본인이 직접 찾아와 스스로 목을 치려고 하고 있었다. 사적인 감정 때문이다. 고문당했던 원한을 갚기 위해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을 한 것이다.

    카타쿨라는 이 날을 위해 ‘나이트 엘프 어쌔신’을 고용해 놨다. 그것도 무려 10마리!

    누자베스가 이대로 방심한 채 다가온다면 순식간에 난도질해 죽여 버릴 수 있었다.

    ‘다가 와라. 한 걸음만 더……!’

    누자베스는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크게 발을 내딛으며 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지금이다……!!’

    카타쿨라는 은폐중이던 나이트 엘프 어쌔신 부대에게 공격 개시를 허가했다.

    아무리 누자베스라도 나이트 엘프의 암습을 완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서걱!

    “어?”

    고요 위에 절삭음이 떨궈졌다.

    얼빠진 비명 소리가 뒤를 이었다.

    투두둑, 투둑. 끈적한 혈액이 쏟아졌고.

    “으, 아아아아악!”

    카타쿨라가 꼴사나운 비명을 내질렀다.

    휘둘러진 누자베스의 검이 정확하게 카타쿨라의 오른팔을 절단해냈다.

    카타쿨라의 오른팔은 절단된 채 바닥 위에서 펄떡였다.

    “캭!”

    “끄악!”

    그리고 찰나의 틈을 두고, 높게 치솟은 천장 위쪽에서 비명이 이어졌다.

    쿠웅!

    가장 먼저 반쯤 찢겨져 나간 나이트 엘프 한 마리가 추락하여 석재 바닥에 쳐박혔다.

    “이, 무슨…….”

    카타쿨라가 잘려나간 절단면을 붙잡은 채 넋이나간 듯 중얼거렸다. 뒤이어 열 마리의 나이트 엘프 모두가 시체가 되어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그 시체 위로 비르겐슈타인 부대가 사뿐히 착지하여 내리 앉았다.

    정예 고블린 살수로 구성된 비르겐슈타인 부대가 이미 이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팔 간수를 잘 했어야지. 하이브 마인드는 산재 보험 처리도 안 해주는데.”

    누자베스는 카타쿨라의 남은 왼쪽 팔을 꾸욱 짓밟으며 낄낄 웃었다.

    “둥지 시설은 내가 잘 쓸게. 지옥에서 따뜻하게 지켜보며 응원해 줘라.”

    “누, 누자베스으으-!!”

    111호 둥지의 심부에서 몇 번인가 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고, 잠시 뒤 피범벅이 된 누자베스와 루칸다가 나란히 나왔다.

    “담배 있냐?”

    루칸다는 담뱃잎에 침을 발라 능숙하게 말은 뒤 불을 붙여 누자베스에게 건넸다.

    누자베스는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워 넣고 깊게 빨아들였다.

    “생각할수록 하이브 마인드는 엿 같은 직업이야 그치?”

    “그래서 그만두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런데 너무 적성에 잘 맞아. 아주 천직이야, 천직.”

    누자베스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는 반쯤 남은 담배를 벽에 비벼 끈 후 양손을 코트의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걷기 시작했다.

    “뒷정리하러 가자.”

    아직 처리해야 될 것들이 남아 있었다.

    * * *

    정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아리카 섬에서의 실질적인 마지막 전투가 끝이 났고, 섬에 남은 건 배양액도 안 마른 떨거지 하이브 마인드 몇 마리가 전부였다.

    그렇게 그리웠던 내 둥지로 돌아온 뒤 하루가 지났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썰물처럼 밀려드는 수백 장의 보고서를 훑어보고 있던 차에 스칼렛이 찾아왔다.

    “아이고 우리 건국공신 스칼렛 경 오셨습니까?”

    이번 카타쿨라 공략전의 1등공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스칼렛이었다. 그 포상으로 스칼렛에겐 일주일간의 휴가를 지급해줬다.

    루칸다는 스칼렛의 휴가가 끝나면 똑같이 7일 동안 쉬게 해준다고 약속했고 말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스칼렛은 평상복 차림이 아니라, 얇은 캐미솔에 고풍스러운 자수가 들어간 실크 가디건을 걸친 차림새였다.

    아마도 마족들 중에선 흡혈귀들이 가장 심미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저런 옷을 거저 줘도 남사스러워서 못 입을 테니까. 너무 얇아서 속살이 반쯤 투과되어 보이는 캐미솔이라니.

    흡혈귀의 특징인지 아니면, 스칼렛이 특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옷차림인데도 불구하고 성적으로 보이긴커녕, 고풍스러운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스칼렛은 잰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침대의 모퉁이에 털썩 앉아 바로 말을 꺼냈다.

    “주군.”

    “응?”

    “얼굴이 좀 바뀌지 않았나?”

    “그래? 아, 머리색이 좀 바뀌긴 했지.”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닐세. 인상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스칼렛이 내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더욱 모르겠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뭔가 이상하네!”

    “진화해서 그래, 진화! 원래 조금씩 바뀐다고! 전보다 좀 더 어른스러워졌어?”

    “왠지 모르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쪽도 어른이 됐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 그 망상은 그만두게.”

    “……넵.”

    스칼렛은 여전히 내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지 팔짱을 낀 채로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내가 보기엔 그다지 외견이 바뀐 것 같지 않다만. 잠시 그러다 문득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다음부턴 이런 도박은 그만두는 게 좋겠네. 다음에도 이번처럼 요행이 따라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

    “오, 설마 걱정해줬어? 흡혈귀는 모두 냉혈한이라 걱정은 안 했을 거라고 루칸다가…… 아, 아하여!”

    꾸욱.

    스칼렛이 내 뺨을 갑자기 꽉 쥐더니 비틀었다! 볼따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절로 비명이 토해졌다!

    스칼렛은 한껏 뾰루퉁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주군, 냉혈한도 걱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얼간이 짓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해하함미햐…….”

    “그리고 흡혈귀는 냉혈한이 아니네. 유물 모으기에 혈안이 돼서는 사회적 공감 능력이 결락된 그 필멸종이 냉혈한에 더 가깝지.”

    “아하흐니하, 이허음…… 하후요, 하후.”

    스칼렛은 내 뺨을 놔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나이에 어린 아이를 키우는 기분이라 매일매일 조마조마하네.”

    “이제 어린애 아냐.”

    “주군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 늙은이의 눈엔 꼬맹이일세.”

    뭔가 스칼렛의 말이 데자뷰처럼 느껴졌다.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하이브 마인드답게 싸우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했을 줄이야. 어디부터 다시 가르쳐야 할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결과적으론 오케이였잖냐. 아, 이번에 새로 합류한 챔피언은 봤어?”

    스칼렛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뒤늦게 떠오른 것인지 빙긋 웃었다.

    “반쪽짜리 헬베르카 말이로군.”

    “반쪽짜리는 아니고…… 루스날이라고 헬베르카의 분가 출신인데.”

    “그런 걸 반쪽짜리 헬베르카라고 하는 것일세.”

    은연중에 로아를 낮춰 보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나는 로아가 나름대로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하기야 스칼렛이 아랫것 취급 안 하는 놈이 드물지.’

    스칼렛은 기본적으로 자기 외엔 전부 다 하잘 것 없는 녀석 취급을 한다. 그게 인간의 영주라도, 루스날이라는 전설적인 가문의 말예라도 말이다.

    내 둥지에서도 스칼렛이 유일하게 동급으로 취급해주는 건 나 하나 뿐이지 않나?

    “이번에 진화한 덕분에 군단의 규모도 늘릴 수 있을 테고, 군단의 규모가 커지면 스칼렛 너 혼자서는 관리가 힘들테니 로아하고 나눠서 맡길 생각인데. 제발 사이 좋게 지내줘라.”

    내가 딱히 루칸다를 쳐내려는 게 아니라.

    루칸다에겐 본인도 인정했듯 대규모 병력 운용은 적합하지 않았다.

    ‘루칸다는 소규모 특무대 운용을 맡겨야지.’

    두르난 아재의 비비큐 클럽과 비르겐슈타인 부대 같은 특임 부대의 상위 조직을 다시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네만.”

    “진짜?”

    “이 늙은이가 가엾게도 일방적으로 미움을 사고 있는 것뿐일세. 그것도 몰랐나?”

    “아니,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스칼렛은 쿡쿡 웃으며 내 침대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자기 방이 있는데 꼭 여기서 그렇게 뒹굴거려야 합니까?”

    “원래 휴식은 일하는 사람 옆에서 취하는 게 가장 달콤하네.”

    “……일리가 있네. 매우 옳은 말이야.”

    이번 전투의 일등공신께서 달콤하게 쉬고 싶으시다는데 불평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잠자코 보고서를 넘기며 검토하던 중.

    똑똑.

    누군가 내 개인실의 문을 노크하듯 가볍게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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