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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89화 (8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9화

    아릿카사(1)

    “독 안에 든 쥐로군.”

    카타쿨라는 둥지의 최심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마인드 모드로 전환했다.

    현재 111호 둥지의 내부에 침투한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방위대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레이브야드 부대의 발목을 붙잡아준 덕분이다.

    현재 중층부에 위치한 대규모 산란장 시설에는 누자베스와 루칸다.

    그리고 시설의 입구 쪽을 페페를 비롯한 모험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갈라우드의 영주 리제와 호위 무사인 시릴스도 뒤늦게 산란장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진 꽤나 거리가 있었다.

    “이제 와서 병력 생산 시설을 파괴할 셈인가.”

    솔직히 실망스러운 선택이다.

    기반 시설의 타격은 동등한 전력으로 대치하게 된 상황에서 최소한의 리스크로 실행되어야 한다.

    누자베스는 이러한 기본조차 모르는 것인지 고문실에서 빠져나와 베놈 편대를 무력화시키고 곧장 산란장으로 향했다.

    바로 카타쿨라의 목을 친다는 도박에 명운을 걸었다면 성공할 확률이 지금보다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본대는 건재하다. 설령 녀석이 해괴한 재주를 부려 산란장을 모조리 파괴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카타쿨라의 핵심 전력인 ‘정예 하이오크 투사’가 8천 마리 이상 남아 있는 상황이다.

    시답잖은 변덕이 끓지 않는 이상.

    111호 둥지를 흙발로 더럽힌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765호 둥지까지 박살낼 수 있다.

    마르테제가 누자베스에게 당했고, 로아가 생포당했지만. 카타쿨라의 숨통이 붙어 있는 이상 111호 둥지는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좋아, 누자베스. 이번에야 말로 숨통을 끊어주마. 네놈은 산란장 두세 개 정도 부수며 즐거워하는 게 고작이겠지만.”

    누자베스와 리제.

    둘을 이번에 동시에 처리하고, 아리카 섬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카타쿨라는 시트란테 서도의 총독 ‘쉘리너’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아리카 섬의 통일에 성공한다면 마왕 폐하께 직접 보고를 올리겠네. 아리카의 호와 캘러제드의 본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일세. 그때는 남작이 아닌, 변경백이라고 불러줘야겠군.’

    아리카 섬은 마왕군에게 오랜 기간 애증의 섬이었다. 신예 하이브 마인드가 이 섬을 통일하는데 성공하고, 아리카의 호를 얻게 된다면 마왕군 내부에서도 엄청난 지명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헬베르카의 분가 ‘캘러제드’의 성을 쓰는 것까지 윤허받을 수 있었다!

    어중이떠중이처럼 출신성분도 불분명한 하이브 마인드들과는 격이 다르다.

    아릿카사, 그리고 캘러제드.

    카타쿨라가 본도에 진출하게 되었을 때 최상위층 엘리트 하이브 마인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우수한 혈통과 확실한 공훈!

    그렇기에 이 섬을 차지할 하이브 마인드는 카타쿨라 자신 외엔 적임자가 없었다. 누자베스 따윈 거론할 가치도 없었단 말이다.

    “이제는 좀…… 질리는군. 아무리 귀여운 앙탈이라도 보다 보면 질리는 법이야.”

    이번 전쟁은 마땅히 종식되어야 할 형태로 끝맺어질 것이다.

    카타쿨라는 본대를 절반으로 나눠 반은 입구 방어로 보냈고, 나머지 절반은 산란장 시설로 보냈다.

    “다시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됐군.”

    누자베스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산란장이나 몇 개 부수는 것뿐이다.

    그래, 카타쿨라의 예상으로는 그랬다.

    * * *

    “이 세상은 지독한 수수께끼야. 그게 아니라면 악마 같은 피드백만 하는 담당자가 마련한 처형장 같은 곳이겠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툭 걷어차며 혼잣말을 내뱉자.

    “나는 네 그런 관점이 흥미로워, 누자베스. 관점이 아니라 고집이나 억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현실에서 발을 떼고 방관자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바둥거리는 어린아이처럼 말이야.”

    나와 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묘하게도 자조적인 웃음이 섞인 목소리다.

    은발의 소년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내가 엉망진창으로 갈겨놓은 원고를 이런 식으로 재확인시키는 거지. 이게 정말 맞아? 정말 이런 세상을 쓰려고 했던 거야? 잘 모르겠으면 관찰하는 것보다 직접 체험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 뭐, 그런 식으로 몰아붙여 놓고…….”

    이야기가 최악의 형태로 끝맺어지길 나 스스로 방조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가 틀렸다고 윽박지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손으로 직접 이 엉망진창의 이야기를 끝맺게 하고, 또 다시 끝맺게 하고, 몰아붙이고, 또 몰아세우고.

    지쳐서 쓰러지길 바라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면 이 세상의 구조와 나의 입장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나는 내가 한주호라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단을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조현병에 걸려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다중인격의 하이브 마인드라고 설정된 편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나?

    내가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모두 망상이거나,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머릿속이 고요해진다.

    이번 진화 덕분에 정체성이 더욱 확고하게 성립된 것이다. 자신이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할 시기가 지난 것처럼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법이야.”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워 넣은 후.

    의식을 바깥쪽으로 전환시켰다.

    [누자베스 : 루칸다. 초대한 손님들은 아직이야?]

    [루칸다 : 마침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군요. 대단한 파티라고 들은 모양입니다.]

    [누자베스 : 하핫! 당연하지, 초대 이벤트 싫어하는 오크놈이 어딨겠냐.]

    [루칸다 : 파티 준비가 끝날 때까지 제가 잠깐 상대하겠습니다.]

    카타쿨라의 정예 하이오크 투사들이 산란장을 점거하고 있는 이쪽을 개박살내러 몰려오고 있었다.

    마인드 모드로 잠깐 확인해도 3천은 훌쩍 넘는 규모다.

    [누자베스 : 아, 코탈린하고 코틀러 슬슬 일할 준비해 둬라.]

    [코탈린 : 하와와…… 코탈린 넘나 무서운 것…….]

    [코틀러 : 호에에엣…… 코틀러 무셔버서 오줌 쨔버려쪄여…….]

    [누자베스 : 우리 코탈린하고 코틀러가 쓰잘데기 없는 소리만 해서 각하 원고 분량 챙겨주는 거 너무 고마운데, 너무 과하면 축약하거나 삭제하라고 압력이 들어오니까. 적당히 하자.]

    [코틀러 : 호에에에에에에엣……!?!?]

    [누자베스 : 좋아, 코틀러! 이번 전투만 끝나면 둥지 안에서 6천자 분량으로 호에엣 해도 된다!]

    [코탈린 : 하와와와와와와와……!!]

    [누자베스 : 코탈린까지 더해서 2편은 날로 먹겠구만! 하하핫!]

    [코틀러 : 호에에……루고! 하이드로펌프!!]

    [누자베스 : 지쟈스…… 호에루고로 착안점이 옮겨가는 부분 너무 멋졌다. 백억 점 만점이다 코틀러! 아주 그냥 너가 작가해라.]

    [코탈린 : 하와와……이안 피자! 파인애플 토핑 묻고 더블로 가!]

    [누자베스 : 아이언 드래곤 트렌드에 맞춰서 고득점을 노린 드립이지만, 하와이안 피자가 너무 누렁이 입맛이라 역겹잖아. 뒤질래 진짜?]

    [코탈린 : 키…… 사, 사쿠라…….]

    [누자베스 : 사쿠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무슨 조커 카드처럼 꺼내는 거 그만둬! 사쿠라만 나오면 무조건 웃길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고!!]

    [코탈린 : 사쿠라여? 사쿠라네!]

    [누자베스 : 지쟈스 크라이스트…… 아이언 드래곤 연계기였을 줄은 몰랐다. 이번 드립은 인정한다.]

    어쨌거나 땅굴을 통해 여기까지 도착한 코볼트 작업대도 할 일이 있었다.

    이런 시답잖은 꽁트나 하러 온 게 아니란 말이다. 오해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누자베스 : 햄토리! 형아 안 보고 싶었냐?]

    [햄토리 : 쮸, 쮸쮸! 쮸우-!]

    [누자베스 : 로아? 아, 걔는 지금은 됐어. 이번엔 전열에 나서지 말고 코볼트 작업대가 운반하는 동안 호위나 맡아줘.]

    [햄토리 : 쮸!]

    자, 그럼 슬슬 준비가 됐다.

    [누자베스 : 카타쿨라 그 자식은 이번 종목도 체스라고 생각하겠지?]

    미안하지만, 이번 종목은 오델로였다.

    * * *

    카앙!

    공간이 통째로 잘려나가는 절삭음이 울렸고, 하이오크 투사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양단되었다.

    [카타쿨라 : 드디어 행차하셨군.]

    카타쿨라는 마인드 모드로 산란장으로 향하고 있는 부대의 최전열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장 유효한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루칸다가 유일할 것이다. 일정 명도 이하에선 완전한 불가시 상태에 돌입할 수 있기에 은폐도 가능하며, 기습의 위력도 상당하다.

    그 증거로 몸뚱이가 둘로 나뉘어진 하이오크 수십 마리가 피분수를 뿜어내며 쓰러져 나가고 있었다.

    ‘리퍼리얼 앱소버…… 확실히 치명적인 능력이지만.’

    윤왕 루아 카날다의 유물을 이용하여 발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발현 자체라면 루칸다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가능했다.

    하지만 그 활성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정신력이 소모된다.

    어지간한 인간이나 마물이라면 능력 발현과 동시에 실신하는 것이 당연한 정도니까.

    그러나 루칸다는 리퍼리얼 앱소버를 3분 남짓 활성화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중추 신경이 깎여 나가는 듯한 고통을 무려 3분 동안 버티며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전투 기동까지!

    솔직히 카타쿨라도 루아 카날다의 흑요석검을 다룰 수 있는 마물은 루칸다 외에 없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라도 타임 리미트가 걸려 있지. 재발동까지 상당한 재충전 시간이 필요할 테고.’

    3분 동안 루칸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4천 마리의 하이오크 부대를 전멸시킬 순 없었다.

    그 뒤의 결과는 뻔하다.

    모험가팀과 누자베스. 그리고 렛맨 전사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런 조잡한 병력으로 하이오크 투사들을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말 그대로 체급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것이다! 전투에서 규모의 경쟁은 절대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요소다.

    [카타쿨라 : 산개하여 후퇴한다. 녀석이 스스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적당히 거리를 벌리지.]

    리퍼리얼 앱소버의 유지 시간이 끝난 뒤에 돌격해도 되지 않겠나?

    하지만 루칸다도 멀뚱히 앉아서 후퇴하는 걸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그림자 도약을 하여 거리를 좁혔다.

    “캬악!”

    “크라아악!”

    “컥!”

    촤악!

    다시 한 번 푸른빛 검의 궤적이 하이오크 투사들의 목을 갈랐다. 하지만 이번엔 흩어져 후퇴하고 있는 중이었다.

    첫 습격 때에 비해 쓰러진 하이오크 투사의 수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카타쿨라 : 크하핫! 아무리 애써봐야 수백 마리다. 리퍼리얼 앱소버가 종료되면 잔뜩 귀여워해주마.]

    루칸다는 퇴각하고 있는 하이오크 투사들을 필사적으로 쫓았다. 하지만 그렇게 머릿수를 줄여봐야 무의미한 발버둥이다.

    카타쿨라는 승리를 직감했다.

    돌이켜 보자면 이번 765호 둥지와의 전투는 아주 사소한 시련에 불과했다.

    밤의 어머니께서 살짝 심술을 부리신 것이다. 진지하게 카타쿨라 자신을 버릴 리 없다. 고된 시련에 들게 할 리 없다.

    카타쿨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키륵키륵! 코틀러 이 큰놈 짊어진다!”

    “키…… 무겁다…… 코틀러 허리 부숴진다.”

    “키륵! 빨리빨리 옮긴다!”

    765호 둥지의 코볼트 작업대가 갑자기 나타나 하이오크 투사들의 시체를 허겁지겁 옮기기 시작하기 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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