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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88화 (8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8화

    반격(3)

    로아를 포섭하는 방법은 은발의 그 녀석이 알려줬다. 루칸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이자.

    로아가 명백하게 동요하고 있는 표정을 지었다.

    ‘루스날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몰락한 분가. 로아가 루스날의 피를 계승하고 있는 이상, 해소할 수 없는 컴플렉스였겠지.’

    오르키아나의 판단이 옳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당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분가의 일원들은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대사였으니까.

    물론 당주 오르키아나의 판단과 명령이 옳을 수밖에 없다는 광신적 맹신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겠지만.

    로아는 잠시 멍하니 있는가 싶더니 이쪽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동요를 유도하는 게 네 방식이야? 그다지 사내답진 못한데, 누자베스.”

    “대답할 시간을 5초 주지. 기회는 언제나 스쳐지나가는 것이니까.”

    “그 전에 네가 죽을걸.”

    툭.

    로아가 내 가슴을 가볍게 밀쳐냈고.

    흘리듯 가볍게 손바닥을 뻗었다. 시선이 뻗어진 로아의 손등에 향한 순간.

    쉬익!

    시야의 사각.

    가슴에 바짝 붙어 올려 차진 발이 턱을 향해 날아들었다!

    “3초 남았다.”

    상체를 뒤로 살짝 꺾어 피하자, 로아의 구두굽이 허공을 날카롭게 찢듯 솟구쳤다.

    툭.

    동시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반대편 발목을 가볍게 차자, 로아의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퍼억!

    그 반동을 이용해서 다시 한 번 이쪽의 목을 향해 돌려차기를 날렸다! 도대체 균형감각이 어떻게 얼마나 발달해야 순간적으로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 소름이 돋는다.

    오른팔을 들어 로아의 발을 막지 않았다면 목이 부러져 채소인간이 될 뻔했다. 아니, 채소인간이 아니라 야채인간이었던가? 뭐 어쨌든 간에.

    “2초.”

    “웃기지 마! 누자베스 네가 뭐라고……!”

    로아가 악을 내지르며 주먹을 날렸다.

    솔직히 지금 진화의 특전으로 발동된 신체 강화계의 버프가 없었다면, 일찍이 곤죽이 됐을 정도의 위력이다.

    곤죽이 아니라면, 뭐 떡갈비나 간고기 같은 게 됐겠지.

    이번에도 로아의 주먹을 옆에서 흘려냈고, 이번만큼은 감정이 격해졌던 탓인지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중심을 잃었다.

    로아가 그대로 넘어지기 직전.

    “어이쿠. 그러다 코 깨지겠다.”

    팔을 뻗어 로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가볍게 들어 올리자, 의외로 저항하는 기색 없이 멈춰 있었다.

    “타임 오버야. 선택의 기회를 멋지게 놓쳤군, 로아.”

    “잠깐, 나는 아직……!”

    뒤늦게 후회가 된 것인지 로아가 허둥대기 시작했다. 이거 잘만하면 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만큼 절박한 얼굴이다.

    뭐, 그래도 내가 다른 녀석의 간절한 부분을 가지고 장난질을 칠 만큼 악질인 것도 아니니. 놀리는 건 적당히 하자.

    “사실 처음부터 선택권은 없었어. 로아 네가 마땅히 도달해야 될 형태는 내 소유물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누자베스 너는 도대체…….”

    그 질문에 구태여 대답해 줄 필요는 없었다.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거짓말을 해서 잠재적인 구멍을 만들어 놓기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쪽이 효율적이지 않겠나?

    “밤의 성도는 국화의 깃발 아래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루스날 로아. 다시 한 번 나의 군단을 위해 검을 잡아줄 수 있겠나?”

    로아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바둥거리며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니, 아니아니. 격식 안 차려도 괜찮으니까 대답만 해.”

    “하, 하지만……!”

    “내 정체가 공공연하게 드러난다면 발목을 붙잡으려는 놈들이 한둘은 아닐 테니까.”

    “아……!”

    그제야 로아도 이해했는지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순간 로아의 시선이 뒤편에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루칸다를 향했다. 그리고는 더 뒤쪽에 모여 있는 페페의 일행들까지.

    “…….”

    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내 어깨쪽에 얼굴을 파묻듯 다가오며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영원한 밤이 도래하는 날까지.”

    “그래, 영원한 밤이 도래하는 날까지.”

    대답도 얻었고, 로아를 내려놓았다.

    어째선지 언제나 위풍당당했던 로아가 우물쭈물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 자식…… 연기는 더럽게 못하겠군.’

    어쨌거나 이걸로 로아의 포섭이 완료되었다. 하이브 마인드인 카타쿨라와 계약된 상태이기에 내 둥지의 챔피언으로 활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번 전투에서 이쪽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카타쿨라를 처리하면 완전히 내 둥지의 챔피언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럼 평소에 약한 척을 하거나, 멍청한 말이나 행동을 한 건 모두 연기였단 말이지?”

    “……뭐, 그렇지.”

    “역시!”

    로아는 눈을 반짝이며 진심으로 감탄한 기색이었지만. 이쪽은 어쩐지 디스당한 느낌이 드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신체 능력은 진화에서 ‘헬베르카’를 선택한 특전으로 3대 당주 오르키아나의 신체 능력 중 극히 일부를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로아에게 시간제한을 건 것도 버프 효과가 끝나려고 했기에 서두른 것뿐이고 말이다.

    아니, 근데 좀 억울한 게 평소에 내가 무슨 멍청한 소리를 했다고…….

    “아, 그리고 평소처럼 대하라고. 평범하게 알겠지?”

    “으, 응.”

    로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준 후 루칸다 쪽으로 돌아갔다.

    “우리 루칸다가 여기까지 저지선을 뚫고 오느라 고생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이 와중에 자기 몫도 단단히 챙기고 아주 수완이 좋아.”

    어디서 구한 건지 루칸다의 흑요석검이 한 자루 늘어나 있었다.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흑요석검 주변에 성긴 푸른 연기를 손으로 털어 걷어냈다.

    “각하께서 모진 고문을 당해서 만신창이일 줄 알고 서둘렀습니다만, 생각보다 많이 괜찮아 보이는군요. 한 자루 더 챙기고 왔어도 문제 없었겠습니다.”

    “말도 마라. 고문 후유증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졌는지 상상 친구도 생기고 장난 아니라니까.”

    루칸다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며 이어 말했다.

    “카타쿨라 그 새끼는 곱게 못 죽는다. 그레이브야드 부대의 진입로를 확보해.”

    “흡혈귀가 곧 지휘 거리에 도달할 예정입니다. 병력 생산 시설의 파괴를 우선하시겠습니까?”

    하이오크 투사 놈들이 진입로를 틀어막고 농성하는 동안 병력이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생산된다면 상황이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번에 개쩌는 스킬 하나 더 배웠으니까 새로 보여줄게. 그나저나 리제는 같이 안 왔어?”

    “중간까지는 같이 왔습니다만, 도중에 잠깐 할 일이 있다고 갈라졌습니다. 종복도 데리고 있었으니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릴스도 함께라.”

    111호 둥지에서 과연 무슨 용무가 있을지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자.

    당장 급한 일은 내 군세가 111호 둥지에 쏟아져 들어오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었다.

    “자, 슬슬 카타쿨라의 에필로그를 두들겨 주도록 하지.”

    물론 데드 엔딩 확정이다.

    * * *

    “아가씨 이곳은…….”

    “오, 시릴스도 눈치챘어? 챔피언의 개인실이잖아?”

    현재는 공석으로 방치되고 있는 방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빽빽하게 장서가 꽂혀 있었고, 책상 위는 각종 서신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리제는 이 방에서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오크나 트롤 같은 마물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누린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상위종의 마족은 오히려 인간보다 향기로운 체취를 지니고 있거나, 무취에 가까웠지만.

    이 방에선 꽤나 익숙한 냄새가 느껴지고 있었다.

    인간의 냄새다. 오랫동안 인간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책장에 꽂힌 장서의 대부분은 왕국공용어로 작성된 것들이 많았다.

    “111호 둥지의 인간 챔피언이 더 있는 게 아니라면.”

    리제는 이 방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텐즈 강의 하류에서 처음으로 맞붙었던 111호 둥지의 챔피언 ‘오베론’이다.

    오베론은 리제에게 패배한 후 생포당했고.

    리제는 임시 영주의 권한으로 야전 재판을 통해 오베론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 섬에 깊게 박힌 뿌리는 걷어낼 수 없을 것이다.’

    ‘왕조의 개는 고작해야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지.’

    ‘아리카의 진정한 주인은 변하지 않는다.’

    오베론은 사형 직전 리제에게 그런 말들을 쏟아냈다. 오베론이 지칭하는 아리카의 주인이란…….

    ‘정황상의 추측이라면 카타쿨라를 의미하는 말이었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베론은 111호 둥지의 챔피언. 동족을 배신하고 하이브 마인드의 수족이 된 남자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기엔 꺼림칙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리제는 잠시 책상에 걸터앉아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전에 호족장 조시네스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 건 그 다음이었다.

    ‘하이브 마인드의 제압이 끝난 후 어찌할 생각인가? 여자의 몸으로 영주의 자리에 오를 수도 없을 터.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호족과 백성들이 적지 않을 테니.’

    ‘영주와 호족장은 부분적인 상호협력 관계에 불과하지 않은가? 진정한 의미로 결탁했다고 볼 수는 없지.’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법일세. 하지만 혈육과 혈연은 영원하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을 만큼 질긴 동맹 관계를 맺는 방법은 하나 뿐이네.’

    ‘피를 섞는 것만이 영주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만을 기억하게나.’

    툭툭.

    리제는 손끝으로 책상의 상판을 가볍게 두들기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타쿨라. 조시네스. 누자베스. 오베론.’

    검을 휘두르는 것은 쉽다.

    하지만 어디로 휘둘러야 정답인지 확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서신은 전부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아가씨.”

    시릴스는 방 곳곳에서 발견된 종이 더미를 꺼내 쌓으며 말했다.

    “오베론이 누구랑 그렇게 열렬하게 러브레터를 주고 받았을까?”

    리제는 쿡쿡 웃으며 폴짝 뛰어 책상에서 내려왔다.

    “모조리 챙겨. 해독은 나중에 하자구. 지금은 카타쿨라 제압에 집중해야 될 때니까.”

    “예.”

    시릴스는 리제의 명령대로 서신들을 챙기다가 문득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이제 전쟁도 끝이 나는군요. 이번에 새롭게 손에 넣은 경작지 덕분에 백성들이 예년보다 더 풍족하게 보낼 수 있겠네요.”

    “그래.”

    리제는 흥미가 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충 대답했다. 시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누자베스 님과 알게 돼서 다행입니다. 저도 누자베스 님 덕분에 마족들을 다시 보게 됐을 정도입니다. 누자베스 님이라면 신의를 지키실 겁니다.”

    시릴스는 순수하게 누자베스를 평가했다.

    리제와 누자베스가 협력하여 카타쿨라를 제압하는데 성공한다면. 누자베스는 약속대로 섬을 리제에게 넘기고, 본도로 진출할 준비를 할 것이다.

    리제는 모든 하이브 마인드를 처치하고 아리카 섬을 온전히 손에 넣은 영주로 칭송받을 테고 말이다.

    “신의?”

    리제는 사뭇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시릴스를 노려보고 있는 리제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리카 섬은 갈라우드의 것이야. 마족과 나눠먹을 의리도 없고, 타협은 더더욱 말도 안 되잖아.”

    “아가씨 설마…….”

    짜악!

    리제가 시릴스의 뺨을 손으로 후려쳤고.

    주르륵, 터진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 내렸다.

    리제는 시릴스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리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 그 설마니까 정신 좀 차릴래?”

    리제는 자신이 전장을 쫓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녀 자신이 전장에게 쫓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지금이 아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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