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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87화 (8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7화

    반격(2)

    3인의 윤왕.

    중재자 슬레뷔네의 계약에 따라 영원한 윤회를 거듭하게 된 존재들이다.

    단순히 전생을 거듭하는 것뿐이라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겠지만.

    3인의 윤왕은 윤회를 거듭하며 능력과 경험을 축적하는 것으로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났다.

    세대를 거듭할 수록 강해지는 특성 덕분에 여타 다른 마족들의 경계심을 샀고, 현재 ‘마왕’이라 불리는 여덟의 기둥도 윤왕의 그릇을 발견하는 즉시 처리하고 있었다.

    혹여나 윤회를 완성한 윤왕이 다시금 나타나게 된다면 현계의 질서가 완전히 붕괴될 수 있었으니까.

    제필프, 루아 카날다, 유스티아.

    어느 쪽이든 반 르낙시아의 시대에서도 독보적일 정도의 능력을 보인 윤왕들이다. 현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단어 그대로 ‘재앙’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루칸다는 윤왕 ‘루아 카날다’의 유물을 쫓고 있는 고블린이었다. 루아 카날다가 마왕 아일라드와 맞붙었을 때 사용했던 마검 ‘나크레나’가 윤왕의 그릇임을 증명하는 핵심 유물.

    하지만 마검 나크레나는 아일라드와의 전투 중 부숴져 십수 개의 흑요석 조각이 되었다.

    아일라드는 나크레나를 복구할 수 없도록 흑요석 조각을 바체트령 전역에 흩뿌렸고, 각지의 하이브 마인드들이 지키게 되었다.

    긴 시간이 흘러 흑요석 조각은 주로 단검의 형태로 가공되었고, 크기에 따라 목걸이나 팔찌. 혹은 반지의 형태가 된 것도 있었다.

    카타쿨라의 둥지에도 흑요석검이 한 자루 있었다. 루칸다가 방금 전에 슬쩍 훔치기 전까진 말이다.

    “아, 이전에 맡겨두고 꽤 시간이 지났다만. 슬슬 되찾아 가도 상관은 없겠지?”

    이걸로 루칸다가 지니게 된 흑요석검은 세 자루.

    루칸다의 능력을 경계하여 카타쿨라가 맡아 두고 있던 흑요석검을 어느새 챙겨온 것이다.

    나머지 한 자루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물의 힘을 빌리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고블린 주제에…….”

    “원망할 곳을 잘못 짚었군. 이런 유물도 남기지 못한 무능한 선조를 원망해야 되지 않겠나?”

    키잉!

    루칸다가 검을 뽑아들었다.

    공명하고 있는 흑요석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안개가 검기처럼 검신에 둘러졌다.

    윤왕 루아 카날다의 전매특허 기술이자, 마검 나크레나의 고유기.

    ‘동위계 흡수체 반응…….’

    로아는 어렵지 않게 그 능력의 정체를 간파해냈다.

    리퍼리얼 앱소버다.

    질량을 지닌 물질이라면 표현 그대로 ‘소멸’시킬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현상의 발현은 흡수체가 닿은 곳에 국한되지만.

    간단히 말해 루칸다의 검에 닿는 모든 물질은 절삭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검이 닿는 곳의 물질이 완전히 소멸되어 절단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확실히 말도 안 되는 기술이다.

    물질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짓은 닫힌계에서 불가능하다. 하지만 반 르낙시아의 존재들이 남긴 파편들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로아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옛기적의 재현 그 자체였다.

    “하긴, 제필프의 요새 공략에서 전투력의 대부분을 소모한 덕분에 국화 전쟁에선 얼굴도 내비치지 못한 열등 가문이 아니던가? 이런 유물을 후세에 남겨줄 여력 따윈 없었겠지.”

    루스날의 시조 테르미어가 제필프와의 접전에서 크게 패한 뒤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사명을 완수할 수도 없었고,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에 나설 기회도 없었다.

    루칸다는 로아의 내면 깊숙하게 박힌 컴플렉스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죽여 버리겠어…….”

    빠드득!

    로아가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며 루칸다와 대치하듯 섰다. 이미 페페의 모험가팀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의 혈통을 모욕한 저 고블린을 도저히 살려둘 수 없었다.

    살려둘 생각도 없고 말이다.

    “미안하지만.”

    척.

    루칸다는 검을 기묘한 각도로 잡아 자세를 취했다. 페이드레트류의 근접 검술이다.

    암습과 암살. 그리고 기습에 철저하게 특화된 기술. 일정 명도 이하의 환경을 전제로 한다면, 그림자 도약과 병행되는 순간 절대적인 승률을 자랑하는 근접 검술이었다.

    “모든 종류의 살육은 이쪽의 특기다.”

    동위계 흡수체까지 두른 검까지 갖췄다.

    호랑이의 날개라는 말이 더 없이 들어맞는 상태.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 확정이다.

    막거나 방어할 수도 없었고, 오로지 검격을 완벽하게 회피해내며 반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루칸다는 로아에게 확실히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고 확신했을까?

    ‘녀석은 테르미어의 현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루스날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개체다. 감정의 빈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승산이 없겠지.’

    루칸다는 냉정하게 로아와 자신의 전력을 비교하여 평가했다.

    짐짓 헬베르카의 분가 루스날을 얕잡아보듯 내뱉었지만, 루스날이 지니고 있는 치명성은 루칸다도 잘 알고 있었다.

    ‘테르미어가 대단치 않은 마족이었을 리 없지. 그저 상대가 좋지 않았을 뿐.’

    오히려 이제 막 분가로 인정받아 당주의 자리에 앉은 테르미어가 윤왕의 일원인 제필프의 요새를 수 개월 동안 봉쇄한 것이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역으로 생각하자면 헬베르카의 당주 오르키아나의 판단과 명령이 불합리한 것이었다. 윤왕의 요새를 공략하는데 한곳의 분가에게 공격을 전적으로 맡겨버리다니?

    ‘테르미어가 본가에 협위가 될 것이라 예감하여 내린 결정일지도 모르지.’

    이제는 알 수 없게된 일이었지만 말이다.

    초극에 도전했다 죽어버린 오르키아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 한 말이다.

    어쨌거나 옛일을 천천히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머리 끝까지 악에 바친 로아가 순식간에 도약하여 거리를 좁혀왔으니까.

    공간 도약 마법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로아는 순수하게 각력만으로 음속의 수 배에 도달할 수 있었다.

    “피차 할 일이 많지 않나? 탐색전은 생략하도록 하지.”

    “이쪽이 할 말이다.”

    일순 시간이 멈췄고.

    쿠우웅!

    폭탄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폭풍이 몰아쳤다.

    푸른 검기를 두른 루칸다의 검을 쳐낸 것이다! 루칸다는 저릿저릿한 손목을 붙잡으며 웃음을 머금었다.

    “계집애처럼 생겨서는 꽤나 터프한데.”

    루칸다의 검격을 직접 받아낸 것이 아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대검이 통째로 잘려 나갔을 테니까.

    대검을 휘둘러 풍압으로 검의 궤도를 비튼 것이다. 방금 전의 폭음으로 로아가 휘두르는 대검의 속도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갔다.

    “몇 번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조금 기대되는군.”

    척.

    루칸다가 다시 자세를 잡은 직후.

    그림자에 녹아들 듯 모습을 감췄다.

    로아는 재빠르게 벽면 쪽으로 공간을 도약했다. 이번에도 점이동으로 보일 만큼 압도적인 기동 속도.

    쉬익!

    동시에 벽과 벽의 모서리에 생긴 음영 속에서 푸른 검날이 튀어나왔다.

    “시답잖은 잔재주를…….”

    터엉!

    로아가 발을 구르자 그 충격파가 루칸다의 윤곽을 따라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로아가 반대편 손을 뻗어 루칸다의 왼쪽 손목을 붙잡았다.

    휘릭!

    가볍게 붙잡은 것에 불과했지만 손목이 으깨질 정도의 고통이 전해졌다. 루칸다의 시야가 상하로 반전되었고.

    “루아 카날다의 유물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고블린 몸뚱이는 얼마나 튼튼할까?”

    우드득!

    루칸다의 왼팔이 으스러지며 섬뜩한 소리를 울렸다. 그리고는 한손으로 대검을 번쩍 들어 루칸다의 가슴에 박아 넣으려 했지만.

    퍼억!

    휘둘러진 루칸다의 뒤꿈치가 정확하게 로아의 아래턱을 올려쳤다!

    “큿!”

    “하핫! 너무 험하게 다루면 곤란한데. 이건 빌린 몸이라 말이야.”

    카앙!

    궤도가 틀어진 대검이 벽면에 꽂혔고, 루칸다가 검을 짧게 쥐고 로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칼날이 로아의 복부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1미리의 거리를 두고 루칸다의 검이 멈췄다.

    로아는 재빠르게 벽면에 박힌 대검을 포기하고 루칸다의 하나 남은 오른쪽 손을 붙잡았다.

    핏줄이 선 로아의 눈은 섬뜩한 예기를 머금고 있었다. 터진 입술과 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루칸다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가엾은 놈. 미천한 고블린 주제에 자신이 윤왕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 있구나.”

    “네놈이 뭘 안다는 거지?”

    “고작해야 십수 년을 사는 고블린보다는 아는 게 많지. 루칸다 네놈이 인간 계집의 가랑이 사이에서 음흉하고 덧없는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로아는 혀를 내밀어 얼굴에 묻은 피를 핥았다. 로아의 얼굴에는 이미 승기를 잡았다는 듯 여유로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페이드레트의 고블린 놈들이 믿는 미개한 전설을 재현할 셈이잖아. 네놈의 그릇은 딱 거기까지니까. 윤왕의 유물을 훔쳐 쓰는 도둑 고블린의 그릇이란 결국 그 정도겠지.”

    “마음대로 지껄여라 패배자 놈.”

    “루스날은 동맹의 휘하에서 당주의 의지에 따랐고, 마땅히 도달해야 될 형태로 끝맺어졌다. 알겠나? 르낙시아의 은혜를 입어 가까스로 존속하고 있는 하위종.”

    “그래서 그 대단한 말예가 한다는 짓이 캘러제드의 따까리 짓인가?”

    빠악!

    루칸다의 얼굴에 로아의 왼쪽 주먹이 꽂혔다!

    휘청!

    뇌가 뭉개질 정도의 충격!

    그대로 루칸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나 싶었지만.

    쿠웅!

    반동과 허리의 힘을 이용해서 로아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 받았다!

    로아도 아주 잠깐 기절했던 것처럼 상체가 흔들렸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오늘이야 말로 목을 비틀어주마!”

    “그건 동감할 수밖에 없군. 이쪽도 전부터 로아 네놈의 몸뚱이를 토막내서 개먹이로 주고 싶었으니까!”

    빠악! 뻐억!

    갑작스럽게 육탄전이 시작되었고, 로아와 루칸다가 흙바닥을 나뒹굴며 주먹을 주고받았다!

    피와 이빨이 사방으로 튀었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으깨지는 소리가 연쇄하듯 울렸지만. 둘은 어느 한 쪽도 기세가 꺾이긴커녕 더욱 격렬해졌다.

    “페페, 지금이에요! 지금이라면 빈틈을 찌를 수 있어요!”

    “아, 알고 있어!”

    로아의 온 신경이 루칸다에게 집중되어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게다가 대검까지 벽에 박혀 있지 않나?

    지금이라면 허를 찔러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루란이 페페에게 급하게 강화 마법을 걸었고, 카를린도 남은 마력을 쥐어짜내 축복을 걸었다.

    5초도 채 걸리지 않아 바로 준비가 되었고, 페페가 달려 나가기 직전.

    “어, 뭐야?”

    기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페페의 앞을 가로질러 나타난 누자베스가 어느샌가 루칸다와 로아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누자베스의 등장에 놀란 것은 페페의 일행들뿐만이 아니다.

    루칸다와 로아도 움직임을 멈추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자베스는 둘을 떨어뜨려 놓듯 사이에 서서 입을 열었다.

    “루칸다. 물러나 있어.”

    “……예, 각하.”

    루칸다가 누자베스의 명령에 순순히 뒤로 물러났지만. 로아는 누자베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하, 드디어 나타났네. 기다리다 목이 빠질 뻔했다고! 검을 뽑아라, 누자베스. 여기서 네 존재를 증명…….”

    누자베스는 로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 벽쪽으로 밀어 붙였다. 로아가 저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완력이었다. 그리고는 코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로아. 선대의 실책을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그, 그게 무슨…….”

    누자베스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국화의 깃발 아래에 다시 집결할 용의가 있나?”

    이미 누자베스가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놔주었지만. 로아는 그 자리에 굳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폭발하듯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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