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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86화 (8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6화

    반격(1)

    살아서 아침에 눈을 뜬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해괴하고도 난해한 질문에 명확한 정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츠라족인 마르테제에겐 확실한 정답이 있었다.

    어제보다 더 강한 사내와 맞붙기 위해서다.

    강자와 주먹을 맞댈 수 있는 기회를 밤의 어머니께서 허락하셨기에, 오늘의 일출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삶의 의의에 충실할 때가 왔다.

    “최고다. 그래, 이 마르테제의 일생을 통틀어 조우했던 무수한 사내 중에서도 넌 최고의 난적이다! 누자베스으으으으!!”

    발화한 투쟁 본능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집어 삼켰다.

    마르테제의 지휘관기가 아음속의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그 순간 가해지는 부하를 오롯이 견뎌낼 수 있는 마족은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네츠라족 특유의 강건한 신체가 아니었다면 이미 실신했거나, 목숨을 잃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누자베스의 코앞까지 다가온 붉은 베놈은 앞발을 들었다. 강철판까지 꿰뚫을 정도의 파괴력!

    그리고 일찍이 제필프의 최종선고를 장비하고 있던 누자베스의 몸통을 관통했던 적이 있을 만큼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 일련의 과정이 1초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이어졌고, 앞발톱이 누자베스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 꽂혔다!

    “오, 네츠라족인가? 희소종이로군. 이 진영에선 네츠라족을 우두머리 자리에 앉혀 주는 모양이지?”

    카강!!

    누자베스는 가볍게 베놈의 앞발톱 공격을 피하며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전적인 성격과 투쟁 욕구가 강하며 신체 능력도 나쁘지 않지만. 부대장 자리를 맡기기엔 적합하지 않은 종이지.”

    움찔.

    일순간 조종간을 붙잡고 있던 마르테제의 손이 멈췄다.

    어딘가 이상하다.

    이전에 만났던 누자베스와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누자베스는 악을 쓰며 달려드는 광견의 이미지에 가까웠지만. 지금의 누자베스는 정교하게 교련된 도사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 네츠라족은 좋게 봐줘도 전열의 고기 방패로 밖에 쓸 구석이 떠오르지 않는군.”

    “도발할 작정이라면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쓸모가 없는 종이었기에 변방의 험지로 쫓겨난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선택적인 도태였지.”

    “네놈이 뭘 안다고……!!”

    쿠궁!

    붉은 잔영과 함께 다시 한 번 베놈의 앞발이 누자베스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이번에도 애꿎은 벽면을 부쉈을 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베놈의 공격을 간파하는 것만으로도 경악할 정도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방금 전부터 모든 공격을 당연하다는 듯 회피하고 있었다.

    마르테제의 머릿속에서 아주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가정하지 않았던 결과가 스멀거리며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패배다.

    자신이 패배하여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동포의 패기로운 모습을 보는 건 나쁘지 않은 여흥이지만, 르낙시아의 은혜로 가까스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하위종 주제에 기어오르려 하는 건 썩 달갑지 않군.”

    우지끈!

    마르테제의 동체 시력으로도 포착하지 못했다. 베놈의 한쪽 앞다리가 뜯어져 나가는 광경을 말이다.

    눈깜빡할 새라고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의 찰나! 마르테제가 어떻게 조종간을 조작할 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콰득!

    “컥!”

    베놈의 가장 두꺼운 전면 장갑을 뚫고 누자베스의 손이 조종석 앞까지 파고들었다.

    마르테제의 목을 붙잡은 후 반대편 손으로 전면부 장갑을 종이처럼 찢어냈다.

    “카학!”

    조종석에서 끄집어내진 마르테제가 쇳소리를 토해내며 지면을 뒹굴었다. 누자베스는 마르테제가 자세를 고쳐 잡을 새도 없이 붙잡아 들어 올렸다.

    어느샌가 누자베스의 황금빛 안광이 사라져 있었고, 평소와 같이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원코 줄 땐 이럴 줄 몰랐겠지. 너희들의 패인은 그거야. 챌린저 형아가 대리로 잠깐 뛰어줄 수도 있다는 상황까지 가정했어야지.”

    촤악!

    반대편 손에서 소환해낸 검으로 마르테제의 배를 갈라냈다. 끈적한 검붉은 혈액과 함께 장기가 쏟아져 나왔다.

    “누, 누자베스으……!!”

    피거품을 물며 발작을 일으키던 마르테제가 금세 축 늘어졌다.

    누자베스는 마르테제를 휙 던져버린 후 남은 베놈들을 향해 섰다.

    “되도록 부수고 싶진 않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고통없이 끝내줄게.”

    기이이잉.

    하지만 누자베스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베놈들은 주포의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호의를 짓밟으면…… 마! 그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 내가 너희들을 깡패처럼 패기라도 하랴! 가만히 있어!”

    투쾅!

    베놈의 주포가 불을 뿜었다!

    아직 정리해야 될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 * *

    “누자베스가 탈출했다고?”

    말도 안 된다.

    카타쿨라는 창백하게 질려 그렇게 되물었다.

    탈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누자베스의 사지를 절단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카타쿨라 본인이었으니까.

    진화를 하여 신체를 복구하지 않는 이상 탈출할 방법은 전무하다. 설령 진화를 하려고 했다면 감시를 맡고 있던 챔피언들이 즉각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가, 각하……!! 중층부 제7산란장에 적의 침입이 있었다는 보고입니다! 루칸다입니다!”

    “루칸다…… 그 추악한 기회주의자 놈……!! 페이드레트의 사생아 자식!”

    이럴 줄 알았다면 비탄의 숲에 서식하는 고블린 놈들을 밀어버릴 때 같이 처리해두는 게 상책이었을 것이다.

    카타쿨라가 섬의 남쪽을 통일하는데 힘을 보태는 대신 비탄의 숲에 관여치 않기로 약속한 것이 실수였다.

    루칸다는 휘두르는 맛이 있는 칼이었다.

    손에 쥐고 휘두르기만 하면 무엇이든 잘라내는 편리한 도구였다. 카타쿨라도 솔직히 루칸다의 수완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중에 루칸다를 쥐고 있을 때의 얘기다. 다른 놈의 손에 들어간 루칸다는 치명적인 흉기에 지나지 않았다.

    “카타쿨라 각하! 호즈칸이 전사했다는 급보입니다! 본대를 보내 남은 방위대 병력의 퇴각을 지원해야 합니다!”

    “도대체 뭘 하는 거냐, 무능한 트롤 새끼가아아아!! 적의 수 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퇴각을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765호 둥지의 야전 지휘자가 흡혈귀입니다…… 불사성이 강화된 구울 병대를 상대하기엔 화력이 부족합니다! 머, 머리를 부숴도 되살아 난다고 합니다…….”

    헛소리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현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흡혈귀는 피가 한없이 옅어진 반푼이가 9할 이상이다.

    대규모 병력에 불사성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 피가 짙은 흡혈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이미 머리가 파괴된 구울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동시다발적으로 머리를 파괴당하는 수십 마리의 구울 병사들을?

    논할 가치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엘더급의 흡혈귀도 불가능한 신기란 말이다.

    불사왕이라고 칭해지는 브람스도 가능할까 말까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흡혈귀가 가능한 일인가?

    이 질의에 대한 대답은 명료하다.

    상속 신분.

    나르시안의 배덕 행위로 태어난 아이들. 혹은 그 아이들의 2대 이내의 직계. 흔히 말해 ‘반 르낙시아’에 해당하는 흡혈귀만이 병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신기를 구현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쪽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흡혈귀는 ‘붉은 달의 메를로’였다. 그녀가 이끄는 불사의 군단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무패의 기록을 유지했던 군세다.

    심지어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전장에서 죽음의 관념 그 자체를 소거시킬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어쨌거나 그 정도의 흡혈귀가 아니라면 불사의 군대를 조종하는 짓은 불가능할 터. 조잡한 눈속임으로 블러프를 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본대를 이끌어내려는 개수작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후 카타쿨라의 판단이 섰다.

    “마르테제에게 방위대의 잔존 병력을 맡기겠다. 녀석들의 갖잖은 허세에 지레 겁을 먹을 수는 없지. 바로 항전을 수행하도록!”

    평소 같았으면 즉각 대답했을 전령들이 고개를 내리 깔고 눈알을 굴리기 바빴다.

    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카타쿨라가 턱짓을 하며 말해보라고 지시하자. 앞서 나와 있던 전령이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다 마지못해 내뱉듯 말했다.

    “마, 마르테제 님은…… 누자베스의 저지에 나섰다 전사했습니다. 그…… 그리고, 베놈 편대도…….”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느낌도 아니다.

    카타쿨라는 요술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현황을 되짚었다.

    마치 절대적인 의지를 지닌 초월자가 마땅히 행해져야 할 사건들을 차례차례 나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밤의 어머니시여…….”

    밤의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일까?

    어째서? 자신은 테네브레의 총애를 받았던 혈족 헬베르카. 그 분가인 캘러제드의 피를 계승하는 하이브 마인드다. 근본도 없는 하이브 마인드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존재란 말이다.

    테네브레가 누자베스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

    그럴 리 없다.

    밤의 어머니께서 그러한 얼토당토 않은 결정을 내렸을 리 없다.

    “이것이 당신의 시련이자 시험입니까.”

    카타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춤에 검을 찼다.

    “그렇다면 이 시험에서 당신이 만족할만한 답안을 제출해 보이겠습니다. 이 카타쿨라만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하이브 마인드란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아직 111호 둥지의 본대는 건재하다.

    최강의 챔피언 로아 역시 생존한 상황.

    누자베스가 완전히 승기를 붙잡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 * *

    “어째서 저 정도의 챔피언이 이런 둥지에 있는 건데! 저건 성소급 던전의 챔피언이잖아!”

    “페페! 불평할 시간이 있으면 시야의 사각에 들어갈 만한 곳이나 찾아봐!”

    “차, 찾고 있어! 카를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어?”

    “무리에요! 이젠 진짜 무리예요! 새틀라이트 크리스탈도 모두 써버렸고…… 꺄악!”

    콰앙!!

    폭음과 함께 카를린이 전개했던 마나 배리어가 산산히 부숴졌다. 검은 폭연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한스가 재빠르게 쓰러진 카를린을 보호하듯 앞에 섰다.

    페페의 모험가팀이 가까스로 합류에 성공한 것까진 좋았지만. 합류 직후 마주하게 된 적수는 썩 좋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수도에서 파견한 왕령 직계의 모험가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마족.

    그런 마족은 본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통칭 ‘성소’라고 불리는 던전에서나 가끔 목격되는 정도란 말이다.

    로아는 대인전투와 병력 지휘 어느쪽도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 만큼 밸런스 좋게 성장된 챔피언이었다.

    만약 카타쿨라가 캘러제드의 피를 계승하는 하이브 마인드가 아니었다면, 감히 둥지에 영입할 수조차 없었을 만큼 상위의 마족.

    검으 연기가 걷히며, 로아가 페페의 일행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날카로웠던 눈매는 가늘게 뜬 덕분에 더 예리하게 보였다. 미형의 아이만을 탄생시키는 헬베르카의 특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처럼 수려한 외모.

    페페는 로아를 제대로 목격한 순간 어째선지 머릿속에서 누자베스가 연상되었다.

    “이런 버러지들을 처리하는 것까지 내가 나서야 돼?”

    로아는 짜증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자신의 체구보다 더 거대한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말이다.

    “나는 누자베스하고 놀아야 돼. 그러니까 시간 끌지 말고 한 번에 다 덤벼.”

    로아는 대검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부채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의 위력은 방금 전에 경험해 봤다.

    카를린까지 배리어를 전개하는 못하는 상황. 타개책 같은 건 일절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오만한 생각이군. 각하께서 네놈 같은 반푼이를 직접 상대할 리 없지 않나?”

    어느샌가 시야의 구석에 나타난 그림자가 도발적인 말을 내뱉었다.

    로아도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로아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루칸다, 많이 컸네. 잘하면 나랑 눈도 마주칠 수 있겠어?”

    “더 대단한 짓도 해줄 수 있지.”

    루칸다가 모습을 드러냈고.

    허리춤에 채워놨던 세 자루의 흑요석검이 공명하듯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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