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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85화 (85/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5화

    지옥의 밑바닥에서(4)

    “서서히 죽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아이러니하게도 삶이라 부른다면. 너와 내가 영위하고 있는 이 지루한 시간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 명명하면 좋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권태로운 눈빛이 이쪽을 향했다.

    은발의 소년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기묘하게도 소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래, 저 소년이 헬베르카의 현 당주.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다.

    누구라도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멎을 만큼 수려한 용모. 밤의 어머니께서 사랑하여 마땅한 미형의 소년이다.

    뒤늦게 어깨 위로 피가 번진 듯 늘어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내 몸을 내려다보고 있자, 오르키아나는 금새 흥미를 잃은 듯 시선을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한쪽 발을 탁상 위에 얹은 뒤 견고해 보이는 군화의 끈을 고쳐 묶기 시작했다.

    “리케릴의 광신도들과 너와 같은 나르시안의 아이들은 영원을 믿는 것 같지만.”

    목소리에는 옅은 연민이 묻어 있었다.

    구제할 길이 없을 만큼 가엾은 짐승을 부르는 소리만큼이나.

    “유감이야. 너도. 그리고 나조차도. 마땅히 도달해야 될 형태에 이르게 되겠지. 설령 그 최종점이 죽음이라는 형태일지라도.”

    알 수 있었다.

    오르키아나는 자신이 초극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완벽무결에 가까웠다고 평가받는 오르키아나라도 초극을 이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하려는 행위는 단순한 자살에 불과했다. 혹은 증명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용서받을 권리조차 박탈당한 누군가를 위한,

    찰나.

    시야가 반전되었다.

    순간 의식을 잃을 만큼 어지러웠지만.

    끔찍한 가슴의 통증이 의식이 날아가지 않도록 쐐기를 박았다.

    어느덧 고풍스러운 침실이 아닌, 화약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흙바닥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불멸의 딸이여. 영원한 밤을 걷는 원죄의 상속자여. 이 검이 기약없던 용서의 권리이며, 그대의 죽음이노라.”

    가슴에 꽂힌 검이 뜨거웠다.

    그리고 검을 쥐고 있는 녀석은…….

    “시간을 주마. 네 저열한 욕망에 속아 목숨을 잃은 내 아우에게 참회의 말을 남길 시간 말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입이 뻥긋거리는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세상이 온통 음소거된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바짝 다가온 바하무트의 얼굴이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지는 것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몸속을 흐르는 혈류의 일부가 가속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엄습해 왔고, 그 자리에서 바둥거리는 동안 눈앞에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캐릭터 도감이 갱신되었습니다.]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가 추가되었습니다.]

    [마장 ‘바하무트’가 추가되었습니다.]

    [붉은 달 ‘메를로’가 추가되었습니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었던 메시지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정보창들이 사라지며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캐릭터 ‘바하무트’와 ‘메를로’의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메모리얼 전투 ‘성도 방위전’이 해금되었습니다.]

    -메모리얼 전투 ‘성도 방위전’에서 목표 달성시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 100명’을 획득합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완벽히 의식이 돌아왔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지하의 고문실.

    “…….”

    옆에 띄워놓은 스테이터스창에서 빠르게 경험치 게이지가 오르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스칼렛이 내 계획을 알아채고 병력을 전부 동원하여 전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겠지.

    [루칸다 : 각하, 들리십니까?]

    [누자베스 : 다행히 귀는 안 뜯어가서 잘 들리네.]

    그리고 드디어 루칸다까지 내 지휘 거리에 들어왔다. 코틀러의 작업대가 다행히도 기한을 맞춘 모양이다.

    [루칸다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누자베스 : 아니, 썩 무사하진 않은데…… 어쨌거나 다시 만나서 존나게 반갑다야.]

    [루칸다 : 이번엔 재회의 포옹을 기대할 수 있겠군요.]

    [누자베스 : 너무 반가워서 포옹으로 안 끝날 수가 있어. 양치하고 와.]

    잠깐 루칸다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사이.

    드디어 경험치가 100%에 도달했고, 다섯 번째 진화 진행도도 100%가 되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하이브 마인드 누자베스의 진화 성향 평가가 개시됩니다.]

    [평가되는 지향 목표는 여섯 항목입니다.]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형태의 천칭 저울이 기울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아래로 떨궈진 접시 쪽을 바로 바라봤다.

    [3인의 윤왕]

    -슬레뷔네의 맹약에 의해 영원한 윤회를 약속받은 3인의 왕은 인간을 초월하여 밤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낮과 밤이 거듭되듯 반복되는 윤회 속에서 연마되는 가치가 무엇일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진화 효과 : <클래스 변경 : 윤왕의 그릇>

    그리고 두 번째 접시.

    [나르시안의 혈족]

    -통속적 금기에 제한되는 의지가 그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습니까? 세속의 통념 따위가 숭고한 뜻을 규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갈망하는 것이 오로지 원초의 붉은 욕망이라면.

    -진화 효과 : <클래스 변경 : 앤실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접시가 떨궈졌다.

    [밤의 시종 헬베르카]

    선택지가 제시되었고.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엔 오랜 시간 고심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 * *

    “컥!!”

    지하실의 문을 지키던 간수의 목이 순식간에 돌아갔다. 단말마를 내지르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고,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금고 열쇠를 챙겼다.

    “하핫, 미안하네. 내가 살인 외에는 법률을 준수하는 사람이라, 이런 꼴로 나돌아 다니면 공연음란죄로 구속될 거 아냐? 내가 또 이상하게 야노 성향은 없더라구.”

    금고를 열어 내게서 벗겨냈던 장비들을 챙겼다. 링 형태의 제필프의 최종선고 초커처럼 목에 걸자.

    촤르륵.

    익숙한 제복 차림이 몸을 감쌌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잠깐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우연히 은제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흠…….”

    육체가 새것처럼 복구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진화로 가장 눈에 띄게 변한 곳이 머리카락이었다.

    어째선지 흑발에서 짙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빌어먹을.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서 벌써 흰머리가 나는 모양이군.”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

    내가 고문실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111호 둥지의 병력들이 벌떼처럼 몰려올 테니까.

    코트의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누자베스 : 루칸다, 베놈은 내가 맡는다.]

    배때지에 구멍을 뚫린 원한은 복리로 갚아주지 않으면 분해서 잠을 못 자지 않겠나?

    목을 양쪽으로 차례대로 꺾어 풀어준 후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발을 들였다.

    이미 이변을 눈치채고 경비 병력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칼날과 폭발이 질풍처럼 몰아쳤다.

    비명과 폭음.

    피비린내와 화약의 잔향.

    으깨진 대리석 벽면에 덕지덕지 붙은 살점과 끈적한 혈액이 참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누군가 111호 둥지의 심부에서 고대의 악마라도 소환한 듯한 광경이다.

    하이브 마인드의 의지라면 용암으로 뛰어들 수 있는 병사들이었지만. 일순 죽음의 공포에 질려 멈칫거릴 지경이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마르테제가 베놈에 탑승하여 도착하였지만. 이미 참극이 일어난 뒤였다.

    “으그아아악!!”

    “캬아앗-!”

    111호 둥지가 자랑하는 ‘정예 하이오크 투사’들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강철 플레이트로 무장한 하이오크 투사는 베놈의 동축기관총의 소사를 받으며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병력이다.

    그 정도의 방어력을 지닌 하이오크 투사를 장난감처럼 부숴버릴 수 있는 존재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를 순식간에 말이다!

    마르테제는 숨을 죽인 채 전투를 지켜봤다.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내가 흔치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참상의 원인을 따지자면 마르테제와 로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누자베스가 언제 진화를 하여 몸을 복구할지 알 수 없었기에 카타쿨라는 챔피언들에게 감시와 보고를 맡겼지만.

    로아와 마르테제는 누자베스의 진화를 묵인했다. 사형에 처해져도 불평할 수 없을 정도의 실책!

    하지만 마르테제에겐 그딴 둥지의 규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름답군, 아름다워…… 역시나 이 마르테제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

    하이오크 투사들을 갈기갈기 찢으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누자베스를 바라보며 마르테제는 황홀에 젖어 몸을 떨었다.

    사나이로 태어난 이상 불가결하게 품고 있는 본능이다.

    어제보다 더 강한 사내와 맞붙고 싶다.

    내일은 오늘 맞붙었던 사내보다 더 강한 사내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파멸로 이끄는 투쟁 본능. 누자베스는 마르테제의 본능 가장 깊숙한 곳에 불을 지피는 장난감이었다.

    “감사드립니다, 밤의 어머니여! 계집으로 태어났다면 이 황홀함을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양쪽의 조종간을 꽉 움켜쥐며 마르테제가 상체를 숙였다. 급발진에 걸리는 부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그와 동시에 누자베스가 빙글 돌며 베놈 편대가 나선 쪽을 바라봤다.

    그 순간 마르테제와 시선이 마주쳤고, 누자베스는 빙긋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왔구나, 빨간놈. 안 왔으면 야마에 스팀 돌아서 다 때려부술 뻔했잖아.”

    “좋은 기세다, 누자베스!! 최강의 고대 병기 베놈을 눈앞에 두고도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그 자세! 사나이의 귀감이다!”

    “최강은 지랄. 오늘부로 그거 다 폐차시킬 거야. 넌 병풍 뒤에서 향 냄새 맡을 준비하고.”

    카가가가각!

    4기의 베놈이 재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시속 50킬로가 넘는 어마어마한 속도! 동시에 네 정의 동축기관총이 같은 지점을 향하여 불을 뿜었다!

    투다다다다!

    수백 발의 철갑탄이 누자베스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터엉!

    “어, 어……?”

    기우뚱.

    베놈 3호기에 타고 있던 탑승자가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어느새 누자베스가 10미터가 넘는 거리를 일순간에 좁혀 다가와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한 손으로 베놈의 동체를 들어 올려 방패처럼 자신의 앞에 세웠다.

    “누가 사격을 멈추라고 했나!! 쏴라, 쏴!”

    “마, 마르테제 님! 주, 주…… 죽고 싶지 않습니다! 으아아, 죽고 싶지 않……!”

    콰아앙!

    다른 베놈들이 붙잡힌 베놈을 향해 75㎜의 주포를 발사하기도 전에 폭발이 일었다.

    베놈의 장갑이 가장 약한 배면에서 일어난 폭발.

    탑승자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슈우우욱.

    바둥거리던 베놈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축 늘어졌고, 누자베스는 검은 연기을 걷어내며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눈빛이 바뀌었다.

    아니, 바뀐 것은 눈빛뿐만이 아니다.

    어느샌가 누자베스의 동공이 황금색을 머금은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인간들의 병기를 주워 쓰다니. 이 시대의 동포들에겐 자긍심도 없는 건가?”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마르테제가 느끼던 누자베스의 분위기와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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