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84화 (8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4화

    지옥의 밑바닥에서(3)

    수십 만 종의 마족들 중에서도 헬베르카는 가장 신비로운 존재라고 평가받는 종의 하나였다.

    그 탄생 기원이 명확한 마족들과 달리 헬베르카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 다른 마족들과 차별성을 지니게 되었는지 명확한 사료가 없었다.

    혼돈계에서 현재의 ‘닫힌계’가 분리될 때 질량을 얻게 된 고대 의식의 일종이라는 설이 인간 학자들 사이에선 공신력을 얻고 있었지만.

    외신의 존재를 믿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마족들 사이에선 ‘외신의 간섭 흔적’이라는 설이 통용되고 있었다.

    상위계에서 하위계에 직접적인 간섭을 할 수 없으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하위계의 피조물을 만들어 간섭하는 것이 외신들의 방식이다.

    이 차원에 간섭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외신은 둘.

    세피로스와 크리스델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조만간 크리스델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라 믿는 마족들의 무리가 ‘리케릴 성찬회’라는 집단이다.

    실제로 리케릴 성찬회는 크리스델의 간섭 흔적을 찾아내고 연구해 세계의 섭리에 직접적인 간섭을 가하는 마법을 연구하는 집단이었고 말이다.

    리케릴 성찬회와 마찬가지로 헬베르카 역시 외신의 간섭을 증명하는 혈족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리케릴 성찬회가 크리스델의 간섭을 주장하고 있다면, 헬베르카는 세피로스의 간섭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케릴 성찬회와 헬베르카.

    외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부분까지가 공통항. 하지만 지향점은 완전히 상극에 위치해 있었다.

    “크리스델은 영겁을 관장하는 외신이다. 때문에 리케릴 성찬회의 지향점은 영구불변. 닫힌계에서 불가능한 현상이라고 거론되는 ‘페르녹시아 반전’이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이지.”

    루칸다는 엉금엉금 기어 땅굴을 지나며 입을 열었다. 페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반대로 세피로스는 섭리를 관장하는 외신. 그렇기에 헬베르카는 자연스럽게 ‘만물이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형태’를 이상점으로 삼았다. 만유 현상의 제1원인이라 불리는 ‘리블리언’과 정반대인 ‘만유 현상의 최종점’을 추구하고 있다고 들었다만.”

    페페는 루칸다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카를린이 알고 있는 게 많다지만 결국은 스텔라 교단의 사제. 종교적인 관점에 편향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외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것 자체가 주신인 스텔라를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금기시하고 있었다.

    외신의 존재를 당연히 사실이라 믿고 있는 마족들의 관점에서 본 헬베르카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카타쿨라가 헬베르카의 피로 생성된 하이브 마인드라는 사실은 이 섬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지.”

    루칸다는 재빠르게 페페의 추론에 맞장구를 쳤다.

    누자베스가 헬베르카의 혈액을 사용해 창조된 하이브 마인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구태여 인간 모험가인 페페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극구 숨겨야 할 사실이다.

    페페의 목적은 엄밀히 말해 카타쿨라 토벌이 아닌, 헬베르카의 피를 계승한 하이브 마인드를 배제하는 것이었으니까.

    누자베스가 헬베르카의 혈액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바로 페페의 표적이 될 것이다.

    “저기, 원래 이렇게 땅굴은 좁은 거야? 그리고 엄청 더운데…….”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리제가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말했다.

    땅굴은 이미 서서 걸을 수 없을 만큼 좁았고, 루칸다. 그리고 페페와 리제는 바짝 엎드린 채 기어서 이동해야만 했다.

    “키……! 불평하지 않는다! 원래 모든 구멍은 다 처음엔 좁다! 자주 들락날락해야 넓어진다!”

    “……혹시 누자베스가 이 코볼트들한테 나쁜 영향을 받아서 말투가 그렇게 된 걸까?”

    페페가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가설을 내뱉었지만.

    “아니, 오히려 그 반대겠군.”

    루칸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스칼렛의 작전 개요를 떠올렸다.

    누자베스는 코볼트 작업대에게 111호 둥지의 중층부에 위치한 병력 생산 시설인 산란장까지 땅굴을 파도록 지시해 놨다.

    지금까지 목격한 111호 둥지의 병력 수급 능력을 보자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란장과 부화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베놈 편대의 격퇴를 뒤로 미루겠네.’

    그리고 스칼렛은 루칸다와 리제, 그리고 페페 셋에게 111호 둥지 침투를 명령했다.

    나머지 병력으로 카타쿨라의 방위대 병력을 깎으며 방어선을 좁혀 나갈 생각이었다.

    브리핑 마지막에 스칼렛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내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말해두지만 이건 구출 작전이 아닐세. 구태여 카테고리를 나누자면 교란전이지.’

    마치 누자베스를 구출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모든 작전의 순서와 절차가 임기응변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 어떤 신호도 사인도 없을 뿐더러, 합을 맞춰볼 여유도 없었다.

    루칸다는 부지런히 땅굴을 기어나가며 상정 가능한 모든 상황을 차례차례 검토해 나갔다.

    ‘아주 생각 없이 붙잡혀준 건 아닐 터.’

    누자베스도 그 정도까지 생각을 해놨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며 사지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젠자앙, 이 둥지도 남탕이구만. 서큐버스라던가 없냐? 기왕 고문할 거면 성고문으로 해 주면 안 될까? 서큐버스 없으면 아쉬운 대로 마이애브 같은 나이트 엘프도 괜찮은데. 나는 신포도도 안 가리는 사람이야.”

    누자베스는 킬킬 웃으며 간만에 찾아온 로아에게 농담을 건냈다. 이미 몸은 상당 부분이 망가져 있었다.

    왼쪽 눈이 적출되었고, 팔과 다리가 모조리 잘린 지 오래다. 남은 몸뚱이도 절반쯤은 피부가 벗겨져 흉측한 몰골이었다.

    아무리 상질의 엘릭서로 목숨을 연명시켜 놨다고 해도, 저 정도의 고문을 받고 멀쩡할 리 없었다.

    ‘괴물 같은 정신력이네.’

    카타쿨라가 누자베스에게 푹 빠진 이유를 어쩐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금새 망가지는 다른 장난감들과 달리 누자베스는 꽤나 터프했다. 육체가 아닌, 정신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때때로 신념을 지닌 인간은 상식을 초월하는 정신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신념은 신앙적인 것이기도 했고, 신앙과 닮은 근거 없는 믿음이란 이름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누자베스 역시 그러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로아는 잠시 누자베스의 앞에 서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수 세기 이전까지 초극은 흡혈귀 놈들을 중심으로 퍼져 모든 마족들이 갈망하던 이상적인 지향점이었지.”

    로아는 누자베스의 옆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초극이란 행위가 유행처럼 시작된 것은.

    원죄의 아버지 나르시안이 최초로 초극에 도전한 이후부터였다.

    반신의 영역에 한쪽 발을 들였던 고위급 마족들은 누구나 초극을 꿈꿨다. 헬베르카는 그 중에서도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의 가문이었으나.

    초극에 도전했던 인물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는 헬베르카 출신 중 유일하게 초극에 도전했던 사내다. 나르시안의 둘째 딸이 꼬드긴 결과라고 그 도전을 폄하하는 놈들도 적진 않지만.”

    오르키아나는 이미 충분히 완성된 마족이었다.

    구태여 초극에 도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완벽무결에 가까웠단 말이다.

    그렇기에 후세에서도 오르키아나가 돌연 초극에 도전한 이유에 대해 수많은 가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가설 중 메를로의 유혹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마족도 꽤 많았다.

    “오르키아나는 메를로를 자신의 곁에 두고 꽤나 각별히 아꼈다는 기록이 있어. 위대한 선조의 유일한 실수겠지. 천박한 흡혈귀 따위를 신용했다는 사실만이 말이야.”

    오르키아나와 메를로는 꽤나 오랫동안 검을 맞댔던 숙적 관계였다. 하지만 결국 메를로는 오르키아나의 군세에 무릎을 꿇었고, 이후 꽤 오랜 기간 동안 오르키아나의 곁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메를로라는 흡혈귀의 외형은?”

    “나도 실제로 본적은 없어서 모르겠네. 나르시안의 셋째 딸인 카베르네와 구분하기 힘들만큼 닮았다는 기록은 읽은 적이 있는데.”

    “가슴이 수박만 했을 거야. 그러니까 오르키아나 그놈도 죽이기 아까워서 끼고 살았겠지.”

    누자베스는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말했다.

    “메를로 정도의 흡혈귀라면 혈액 수급을 위해 인간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외형을 취할 필요가 없을 텐데.”

    어쨌거나 로아는 누자베스의 부탁대로 헬베르카의 고대사를 틈틈히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헬베르카의 황금기.

    오르키아나가 당주로 군림하고 있던 시기가 끝이 나고 새로운 국면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참이었다.

    “그 이유나 계기야 어찌되었든 오르키아나는 초극에 실패하여 죽었고, 밤의 성도를 메를로에게 맡기게 되었어.”

    “헬베르카의 영지를 흡혈귀가 맡는다라…… 다른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겠군.”

    “그래. 바로 반기를 들고 일어났지. 그리하여 오르키아나의 후광에 가려져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가 두각을 나타낸 시기야.”

    마장 바하무트의 등장이었다.

    오르키아나, 네우라와 동시에 헬베르카 3대 명장이라고 평가받는 사내였다.

    ‘바하무트와 네우라. 아직까지 살아 있는 화석 놈들이었지.’

    비록 새로운 헬베르카가 태어나지 못하게 되었더라도, 이전에 질량을 얻게 된 의식체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하무트의 관한 얘기는 누자베스도 스칼렛에게서도 몇 번인가 들어 알고 있었다.

    “바하무트는 오르키아나와 직계 형제야. 닮은 점이 많다고는 하는데…… 뭐, 이 얘기는 나중에 차차 하기로 하고.”

    로아는 뒤늦게 생각난 듯 화제를 바꿨다.

    오늘 누자베스를 찾아온 건 옛날 얘기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혹시나 누자베스가 전에 내뱉었던 잠꼬대 같은 소리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역사 이야기를 종종 해주곤 있었지만.

    오늘의 본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네 병력이 방위대의 잔존 병력을 바짝 쫓고 있다더라. 카타쿨라에게 있어서 넌 재미난 장난감이지만, 병력의 손실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는 없어.”

    “나는 결백한데. 내가 시킨 일 아냐.”

    “그런 게 상관있을까? 네 목을 치면 765호 둥지의 병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한데.”

    “야이씨…… 너무하잖아. 앰병, 죽일 거면 진작 죽이던가. 즐길 건 다 즐기고 죽이는 게 어딨어?”

    “처형은 내일 오전 5시로 결정됐어.”

    “하…… 엄마 보고 싶네. 야, 잠깐, 잠깐만. 그런 중요한 걸 본인한테 상의도 안 하고 정하면 어떡하냐. 내가 그때 급한 용무가 있어서 참석 못하면 어쩌게. 누자베스 처형식에 누자베스가 없으면 어? 붕어 없는 붕어빵도 아니고 이상하잖아?”

    “아니, 처형식인데 자율 참석일 리가 없잖아.”

    “시발! 개새…… 아니, 로아 형…… 아니 형님! 팔다리 다 짤렸는데 목까지 치면 진짜 오체불만족이잖아…… 봐줘라 좀…….”

    로아는 울먹이며 바둥거리는 누자베스를 뒤로하고 고문실을 나왔다. 아무리 로아라도 111호 둥지의 챔피언으로써 하이브 마인드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누자베스에게 처형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로아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꽃은 들판에 피어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의 입구 쪽에 마르테제가 서서 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테제와 로아는 이 둥지에서 꽤 친밀하게 지내는 관계였다. 사나이의 마음가짐에 관해 이해가 닿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진정한 사내라고 인정한 사이다.

    그렇기에 둘 사이에 계집애처럼 긴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마르테제는 멋드러진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뜬구름 잡는 소리를 내뱉었다.

    “결과는 같을 것이다. 그 과정과 수단이 진짜 사내다웠는지가 중요하지 않겠나?”

    “그래, 대장부는 남이 꺾어 놓은 꽃에 흥미가 없으니까.”

    발걸음이 바빠진 로아의 뒤를 마르테제가 쫓으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카타쿨라의 방식은 역시나 계집애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