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83화
지옥의 밑바닥에서(2)
“야동에는 마취 효과가 있다나 봐. 주성치 영화에서 봤어.”
“꼬맹이 넌 가끔,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 해괴한 소리를 하네. 이 늙은이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야한 생각이라도 하면 고통이 덜하다는 말이야. 지금도 수박만한 가슴을 상상하면서 이 악물고 버티고 있지, 하핫!”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방이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생김새를 한 은발의 소년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나 아무것도 곳이라 서로 마주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떠드는 게 전부였다.
“포유류의 수유 기관을 상상하는 것과 진통 효과가 어떤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네가 그 방법으로 그럭저럭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니 다행이네.”
“진짜? 이게 왜 이해가 안 되지? 상상력이 빈약한 거 아냐? 머리통만한 가슴이 두 개나 달렸다고! 보기 좋을 정도로 태닝한 피부는 적당한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윤기가 흐르고! 미드 천재가 아니라, 미드 메시급의 사이즈와 스케일! 그리고 형태!”
“어, 음……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꼬맹이.”
“그리고 나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거 같은데 꼬맹이라고 부르지 맙시다.”
“누자베스 네가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나한테는 꼬맹이야.”
은발의 소년은 키득키득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상황을 잠깐 보고 왔는데 완전히 몸도 망가져 있었고, 구속도 튼튼하던데.”
“오늘 왼팔을 잘라갔는데 앞으로 세 번만 더 잘리면 더 묶어둘 수 없는 거 아냐?”
“오호라, 그건 꽤나 정신 나간 낙관론이네.”
“더럽게 아프더라. 내가 여기 와서 당한 것 중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어. 아, 절단당할 때 네가 대신 나가면 안 되냐?”
“나도 아픈 건 싫어.”
“도움이 안 되잖아.”
“딱히 도움을 주려고 여기 이러고 있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한 뒤.
소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캘러제드와 루스날이라. 제 앞가림도 못하던 코흘리개들이 많이 컸네.”
“지금이라도 우리는 사촌 지간이라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부탁해 볼까?”
은발의 소년은 내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꼬맹이. 헬베르카는 입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지. 오로지 끊임없는 존재의의의 증명만이 헬베르카의 증거일 테니까.”
“염병…… 족보라도 만들어 두던가, 아니면 혈통서 발급이라도 하던가!”
“아하핫, 그럴 필요가 없었지. 헬베르카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은 모두가 어렵지 않게 존재를 증명해냈으니까.”
소년은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했다.
“첫 번째로 루스날의 아이를 포섭하는 게 좋겠어.”
“로아라고 했던가? 소름 끼치게 잘 싸우던데.”
“두 번째로 인간 모험가 놈들의 효용 가치가 만료되면 가차 없이 정리해. 놈들은 우리의 피 냄새를 쫓아 몰려든 늑대 무리야.”
“카를린은 멜론만했어.”
“제대로 들어, 꼬맹이.”
“넵…….”
은발의 소년이 마지막 손가락을 접으며 사뭇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윤왕의 그릇인 그 고블린.”
“루칸다?”
“아리카 섬의 점령이 끝나면 바로 처형시켜. 동맹을 가장 먼저 배신한 건 바로 윤왕 놈들이야. 신임할 가치가 없지. 나르시안의 직계손은 조금 더 지켜보자고.”
멀리서부터 구두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카타쿨라가 지하실로 돌아오는 소리까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저 경쾌한 발걸음 소리!
이쪽을 고문할 생각에 잔뜩 들뜬 게 틀림없다.
“그런데 네가 누군지 언제 가르쳐 줄 거야?”
은발의 소년은 어디까지나 혈액에 남아 있던 잔류사념. 즉, 나를 만들 때 사용된 피의 주인인 것이다.
소년은 짓궂은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나는 너야 누자베스. 네가 나인 것처럼.”
“위대한 765호 둥지의 관리자셨군.”
“더 위대한 어딘가의 우두머리 비슷한 것이었지.”
새하얀 공간이 갈라지며 그 파편들이 하나하나 무너지기 시작했다.
슬슬 의식이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밤이 도래하는 날까지.”
“혼돈의 의지가 함께하길.”
이제는 상투적이게 느껴지는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소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직도 버텨야 할 때였다.
* * *
스칼렛은 5초 정도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작전을 속행하겠네. 베놈 편대를 추격하며 방위대의 병력을 우선적으로 깎아내지.”
그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스칼렛의 주변에는 넷이 모여 있었다.
루칸다, 페페, 카를린, 그리고 방금 도착하여 숨을 헐떡이고 있는 리제까지.
그리고 그 넷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누자베스는……? 누자베스를 구하러 가지 않는 거야?”
리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스칼렛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출할 여력은 없네. 계획을 포기하고 노선을 바꿀 만큼의 여유도 없고 말일세.”
“시간을 지체하다간 죽을 수도 있어!”
이번엔 페페가 스칼렛에게 항의하듯 소리쳤다. 페페 역시 누자베스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카타쿨라의 영역 깊숙히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누자베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765호 둥지의 지원이 없었다면 페페의 팀은 이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식으로 누자베스가 죽게 되는 걸 손 놓고 구경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견은 받지 않겠네. 나는 주군께 받은 명령을 수행할 뿐이니까.”
“이례적인 상황이다. 나도 재고를 부탁하지.”
루칸다가 보기 드물게 스칼렛에게 저자세로 부탁했지만.
“필멸종. 우리는 전쟁군주의 의지를 수행하는 기계 부품일세.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부품은 신뢰받을 수 없지 않나?”
그 순간.
루칸다가 스칼렛의 멱살을 낚아채 거칠게 끌어당겼다. 적의가 가득한 눈빛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루칸다는 스칼렛에게 간신히 들릴 만큼 낮고 작은 목소리로 적의 섞인 말을 내뱉었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어서 근질근질하겠군. 헬베르카의 혈액으로 다시 초극에 도전할 셈인가? 그 저열한 욕망을 지금까지 잘도 숨겨왔군.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호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리 쉽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두지, 카베르네.”
카베르네라는 이름이 루칸다의 입에서 나오자. 스칼렛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재밌는 농담을 들은 소녀처럼 말이다.
“욕망을 품은 짐승은 다른 이들까지 비슷해 보이는 법이지. 그래서 어느 쪽인가? 주군을 본도로 인도하여 윤회를 완성할 셈인가? 그게 아니라면 인간 계집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생각인 겐가? 그렇게 초조해 하는 걸 보니 후자로군.”
빠악!
루칸다의 주먹이 스칼렛의 얼굴을 후려쳤다.
스칼렛이 흙바닥에 쓰러졌고, 일어나기도 전에 루칸다가 검을 뽑아 들었다.
“네년이 모든 것을 망치기 전에 내가 죄를 뒤집어쓰지. 무능한 지휘자 한 놈이 죽는 것뿐이고, 전장에서 흔한 하극상이 한 번 일어나는 것뿐이다.”
“본성을 드러냈군. 가증스러운 얼굴 가죽을 벗겨낼 날이 이리도 가까웠을 줄이야.”
철컥.
스칼렛의 뒤편에 정열해 있던 구울 머스킷티어 부대가 루칸다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키륵!”
그와 동시에 보르가의 고블린 서비스 부대도 석궁을 들어올려 스칼렛을 겨눴다.
애초에 감정의 골이 깊었던 둘이다.
중재자이자 완충재의 역할을 하던 누자베스가 사라진 지금. 루칸다와 스칼렛이 서로를 향해 송곳니를 내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르시안의 핏줄은 제거해둘 수 있을 때 쳐내는 게 장기적으로 봐서 이득이겠지.’
‘역시나 꿍꿍이가 있었군. 윤왕의 유물을 모으는 고블린이라. 어쩌면 계승되는 그릇. 부숴놓는 것이 후환이 없을 터.’
누자베스에게 독이 되는 존재다.
루칸다와 스칼렛은 서로를 노려보며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난전이 벌어지기 직전.
“쮸, 쮸쮸!”
둘의 사이를 햄토리가 방방 뛰며 달려들어 막아섰다.
“쮸-! 쮸쮸쮸, 쮸우-쮸!!”
햄토리는 먼저 루칸다를 향해 일갈을 날렸다.
확실히 정론이다. 루칸다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타당한 의견이었다.
루칸다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머리에 오른 열을 식혔다.
“쮸쮸, 쮸쮸우! 쮸쮸, 쮸, 쮸쮸쮸우.”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 햄토리 공의 말이 옳네.”
스칼렛도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레이브야드 부대와 고블린서비스 부대가 서로를 겨누고 있던 무기를 거뒀다.
“쮸, 쮸쮸! 쮸우-쮸!”
“흠…… 확실히 그 가능성은 적지 않겠군.”
“물론 주군도 아무 생각없이 붙잡힌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지레짐작하는 건 도박성이 짙은 수가 아닌가?”
햄토리는 갑자기 둘에게서 몇 발자국인가 떨어져 낙엽이 쌓여 있던 구덩이 위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뛰기 시작했다.
“무, 무슨 대화를 나눈 건데?”
페페가 햄토리의 이상행동을 지켜보며 리제에게 슬쩍 물었다.
“그러게요…… 쮸쮸거리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두 사람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햄토리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길 계속했다.
누자베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저 쥐새끼가 또 지랄병이 도졌다’라고 한 마디 했을 법한 광경이다.
“쮸! 쮸!! 쮸우!?”
와르르륵!
갑작스럽게 햄토리의 발밑이 꺼지듯 무너졌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깊은 구멍이 드러났고, 그 안에서 765호 둥지의 코볼트 작업대가 기어 나왔다.
“코틀러 이젠 더 못 판다…… 무수면 노동 일주일은 너무 가혹하다…… 키…….”
스칼렛과 루칸다의 눈이 동시에 빛났다.
페페의 팀과 합류하여 베놈 편대를 쫓아 꽤나 깊숙한 영지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곳까지 코볼트 작업대가 파놓은 땅굴이 이어져 있다니?
하루이틀만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베놈 편대와 조우하기 훨씬 이전부터 땅굴 작업을 지시해 놨다는 의미다.
‘말도 안 돼. 도대체 뭘 내다보고 있었단 말인가?’
스칼렛은 여기까지 깊숙하게 이어진 땅굴을 확인한 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누자베스가 뭘 보고 있었던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마치 이 상황은 3류 소설가가 작위적으로 짜맞춘 형편성 좋은 편의적 전개처럼 느껴질 정도다.
“베놈 편대의 존재를 상정했다.”
루칸다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고.
“핵심 전력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적의 본대와 충돌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군.”
“카타쿨라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둘 것이라는 심산도 있었겠지.”
“도박이로군.”
“얄궂게도 멋드러지게 들어맞는 도박수였다.”
그러니까.
둘이 동시에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직후.
루칸다와 스칼렛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나이를 먹다보니 기우만 많아진 모양이군.”
도대체 누구를 걱정했던 건지 민망해질 지경이다.
스칼렛은 다시금 떠올렸다.
누자베스가 누구의 피를 계승하고 있는 하이브 마인드인지 말이다.
‘여전히 깜짝 놀라게하는 재주는 뛰어나군.’
스칼렛은 수 세기도 이전에 검을 맞댔던 숙적을 떠올렸다.
성도의 은사자.
태양의 여신 스텔라의 세 시련을 이겨내었고, 메를로가 이끄는 불사의 군단을 제압해낸 헬베르카의 당주.
“미안하지만, 작전을 변경하도록 하지.”
진의는 파악되었다.
남은 일은 의지에 따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