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82화 (8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2화

    지옥의 밑바닥에서(1)

    리제가 이변을 눈치챈 건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뒤였다.

    111호 둥지의 아르가노트 부대는 누자베스와 리제의 연합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었다.

    퇴각하는 병력을 쫓아 더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추격을 포기하고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로아도 혀를 차며 아르가노트 부대와 함께 물러섰고, 오히려 삭막하게 느껴질 만큼 전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레오번이 남은 병력과 부상병들을 관리하는 동안 리제는 누자베스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마물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전투 종료 후 언제나 부대장들을 집합시켰으니 햄토리나 다른 부대장을 따라가면 누자베스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심산으로 햄토리의 뒤를 쫓아가려 했지만.

    “쮸? 쮸쮸! 쮸우-!!”

    “어, 무슨 일이야?”

    “키륵, 키륵키륵!!”

    햄토리의 상태가 이상했다.

    물론 햄토리뿐만이 아니라, 보르가도 적잖게 당황한듯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리제의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흘렀다.

    아직 결착을 내지 못했다면 아르가노트 부대가 퇴각을 했을 리 없다.

    그들이 추격을 포기하고, 순순히 돌아간 이유를 하나하나 떠올린 뒤. 가장 그럴싸한 가능성을 뽑아 보자면.

    ‘누자베스가 당했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111호 둥지의 병력들이 갑자기 퇴각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먼저 퇴각해 있겠다고 장담한 누자베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햄토리를 비롯한 부대장들도 바로 집결하지 않고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아니, 하이브 마인드가 죽으면 지배하에 놓여 있던 마물들이 제어가 풀려 날뛰기 시작한다고 했지.’

    최소한 목숨은 붙어 있다.

    하지만 누자베스가 이 자리에 없다는 건.

    ‘퇴각에 실패해서 사로잡힌 거야?’

    리제는 바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어딜 가시는 겁니까!”

    “레오번! 말을 준비해!”

    한 시라도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 * *

    “로아 님. 안 됩니다. 한동안 지하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카타쿨라 각하의 명령입니다!”

    “오, 그래? 그러면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내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어서 고자질하러 가야 되잖아?”

    굳건한 지하의 철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을 거칠게 밀쳐내며 로아가 문을 걷어찼다. 10센치 이상의 두꺼운 철문이 마치 종잇장처럼 찌그러지며 열렸다.

    퀴퀴한 지하의 곰팡이 냄새와 역한 피비린내가 뒤섞여 로아의 코를 찔렀다.

    지하실의 안쪽에는 가득 찰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고문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도대체 그 용도가 어떤 것일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형태다.

    그리고 그 참혹한 지하 고문실의 중앙에는 견고해 보이는 나무 침상이 놓여 있었고, 그 가운데에 흑발의 소년이 사지가 구속되어 있었다.

    저 처참한 몰골의 소년이 바로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다.

    “…….”

    로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누자베스를 향해 다가섰다. 이미 성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고문을 당한 모습이다.

    거기에 정맥에 직접 관을 꽂아 상품질의 엘릭서를 직접 주입하고 있었다. 목숨을 붙여 놓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금액이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누자베스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고. 영원한 고통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다.

    누자베스는 초점 없이 탁한 눈으로 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몸을 움직이긴 커녕,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을 것이다.

    고작 하루다.

    누자베스를 생포한지 고작 하루만에 이 꼴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카타쿨라의 잔인한 취미에 대해선 로아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목격하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이건 평소 이상이다.

    사로잡은 인간 포로들을 재미로 고문하는 일은 흔했다. 하지만 카타쿨라는 인간보다 누자베스에게 더 지독하고 끔찍한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카타쿨라가 누자베스를 향해 지니고 있는 집착은 소름 돋을 만큼 집요했으니까.

    “빌어먹을 자식…….”

    로아는 카타쿨라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누자베스를 가엾게 여긴다거나, 동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로아에겐 신념이 있었다.

    아무리 적이라도 최소한의 경외심과 예우를 갖춰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고, 결착이 난다면 고통 없이 끝매듭을 지어주는 것이 대장부의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생포하여 여흥을 위해 고문하는 것은 저열한 소인배의 짓이다.

    어쨌거나 로아가 이 지하실을 찾아온 건 누자베스의 고통을 끝내주기도 위해서도 아니고, 탈출을 돕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개인적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누자베스.”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자.

    그 소리에 반응하듯 누자베스가 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의식은 있는 모양이다.

    때때로 심한 고문을 당한 인간은 완전히 정신이 붕괴되어 의사소통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 누자베스가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건 로아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로아는 미리 챙겨온 ‘페인킬러’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엄지 손톱만한 구체형의 환약이다. 전투 직전에 복용하면 그 어떤 상처를 입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약물이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천천히 씹어서 삼켜라. 고통이 사그라들면 잠깐 얘기를 나누지.”

    로아가 그렇게 말하며 환약을 누자베스의 입술 사이에 밀어 넣었지만, 씹지 못하고 그대로 흘러 나왔다.

    로아가 누자베스의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자, 턱관절이 완전히 부숴져 있었다. 치아까지 모조리 뽑혔고 말이다.

    “번거롭게 만드는군.”

    로아는 투덜거리면서 페인킬러 환약을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삼키기 쉽게 잘게 씹어서 누자베스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입술을 떼며 상태를 확인하자 고통에 헐떡이던 숨소리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후…….”

    로아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누자베스의 머리맡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깍지낀 손을 올려놓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네게 느끼는 감정과 카타쿨라가 네게 품고 있는 감정이 같을 리는 없겠지. 녀석은 캘러제드의 피를 이어받은 하이브 마인드다.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결국은 지독한 열등감 덩어리에 불과하잖아.”

    루스날의 말예인 로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카타쿨라는 못난 사촌 같은 존재다.

    아주 약간 피가 섞인 혈육이었고, 그 때문에 일을 도와주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나 역시 루스날의 후계다. 녀석과 나는 반 르낙시아를 이끌었던 가장 위대한 가문의 분가 출신이라는 사실 만큼은 같겠지.”

    밤의 시종 헬베르카.

    최초의 밤이 도래기 이전 이 세상의 절반을 집어 삼켰던 포식자의 이름이다.

    밤의 어머니 테네브레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태양의 여신 스텔라의 세 가지 시련을 극복해낸 혈계.

    헬베르카는 존재 자체가 전설인 가문이다.

    그리고 로아는 자신이 헬베르카의 분가 출신이라는 점에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누자베스 네게 느끼고 있는 감정과 카타쿨라가 지닌 열등감은 같지 않겠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을 터.”

    로아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처음으로 누자베스를 목격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강렬한 열등감이었다. 태어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을 살아오며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낯선 감정이다.

    그리고 동시에 본능보다 더 깊은 곳에서 갈증이 일었다. 그렇기에 로아는 누자베스에 대한 흥미가 깊어졌다.

    단순히 마르테제가 인정한 사내로써가 아니라, 로아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알고 싶어진 것이다.

    “이봐, 누자베스. 넌 도대체 뭘까?”

    로아는 스스로의 멍청한 질문을 비웃듯 실소와 함께 그렇게 물었다.

    누자베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말하기 위해 폐를 쥐어짜내듯 말이다.

    “……동맹은, 어떻게…… 됐지……?”

    “동맹? 무슨 동맹을 말하는 거야?”

    “…….”

    누자베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로아를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루스날… 테르미어, 제필프의…… 요새를, 공략을 맡겼…… 을… 텐데.”

    일순 숨이 멎었다.

    테르미어는 루스날의 시조격인 마물이었다.

    로아가 태어나기 한참 이전의 일이지만, 테르미어의 공훈담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반 르낙시아 동맹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꾀한 것은 윤왕들이었다. 루아 카날다가 현재의 ‘바체트 령’을 차지한 직후 제필프 역시 자신의 왕국을 건국하려 했다.

    그때 제필프의 저지에 나선 동맹의 일원이 루스날의 시조 ‘테르미어’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엄청난 비밀은 아니다.

    하지만 테르미어의 공훈담은 그저 루스날의 후예들 사이에서 조용히 전승되는 이야기였다.

    다른 마족들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테르미어가 첫 번째 접전에서 제필프에게 패해 퇴주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마치 그 다음의 이야기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는 듯 묻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과거의 존재가 이곳에 잘못 현화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누자베스.”

    “…….”

    이름을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오랜 시간 축적된 피로에 실신하듯 잠에 든 것이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남은 고통 때문에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다.

    누자베스는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얕은 잠에 빠졌다.

    로아는 구태여 누자베스를 깨우지 않았다.

    그리고 누자베스를 자신의 비호 하에 두고 카타쿨라가 손을 대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느끼는 열등감이 진짜라면 누자베스 네가 이런 얼빠진 형태로 생포당할 전쟁군주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누자베스가 스스로를 증명할 때를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그 증명이 진짜라면 로아가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었다.

    “로아. 아무리 너라도 내 장난감을 멋대로 가지고 놀게 허락한 적은 없다만.”

    또각.

    구두굽 소리와 함께 카타쿨라가 지하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로아는 놀라는 기색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많이 역겹네.”

    “오, 언제부터 내 예술행위의 평론가가 된 건가?”

    로아는 카타쿨라의 옆을 스치듯 지나 지하실을 빠져 나갔고. 카타쿨라는 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흥미를 거두고 누자베스 쪽으로 다가갔다.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많이 사랑스러운 형태가 되었군.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아담한 쪽을 선호하는데.”

    카타쿨라는 고문 도구가 쌓인 곳으로 다가가 거대한 철제 톱을 꺼내들었다.

    “아기새처럼 지저귈 준비는 됐나, 누자베스?”

    톱으로 뼈를 잘라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누자베스의 비명 소리가 로아의 귓가까지 울렸다.

    “미친 새끼…….”

    로아는 이를 악물며 지하 통로를 빠져 나갔다.

    지금은 누자베스가 준비한 패를 꺼내 보이길 기다릴 때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