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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81화 (8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1화

    하이브 마인드의 방식(4)

    매설되어 있던 화약이 폭발하며 불꽃의 폭풍이 일었다. 참호로부터 50여 미터 떨어진 곳까지 도화선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화약 위에 철조각을 같이 묻어 놓았던 덕분에 위력은 상당했다. 아무리 강철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는 하이오크 투사라도 갈기갈기 찢겨 허공으로 치솟을 정도!

    참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갈라우드의 병사들도 입을 쩍 벌릴 만한 위력이다.

    저 정도의 부비트랩에 개전 초기부터 걸린다면 사기가 깎여 나가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패닉에 빠져 명령을 무시하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쁠 테니까.

    [누자베스 : 존슨. 유효사거리에 들어오면 1열부터 순차적으로 사격 개시. 백병전은 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지양한다.]

    [존슨 : 우워, 워어어…….]

    [누자베스 : 보르가, 요즘 좀 널널했지?]

    [보르가 : 키, 키륵!]

    [누자베스 : 간만에 빡세게 일 좀 하자. 비비큐 클럽이 후방까지 퇴각할 때까지 추격대의 발목을 붙잡는다.]

    [보르가 : 키륵!!]

    [누자베스 : 햄토리 녀석들이 참호까지 닿지 못하게 최대한 버티다 빠지자. 인간 놈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햄토리 : 쮸, 쮸쮸! 쮸우.]

    하지만 누자베스는 전혀 기선을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차근차근 침착하게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폭연이 걷히자.

    누자베스의 예상이 적중했다.

    로아의 아르가노트 부대는 패닉에 빠지긴커녕, 열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피해는 분명히 있었다.

    가장 앞서 나와 진격하던 하이오크 투사들이 고기 조각이 되어 흩뿌려지는 게 분명히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듯. 흔들림 없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누자베스 : 도대체 애들을 데리고 무슨 훈련을 시켜야 저렇게 되는 거야?]

    마물도 결국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아무리 하이브 마인드의 지배 하에 놓여 있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눈앞에서 전우들이 터져 죽는 걸 보고도, 바로 발밑에서 폭탄이 폭발했음에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기계 부품들처럼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이런 잔재주를 부리는 게 전부라면 마르테제의 안목이 이상해진 게 아닐까?”

    로아는 어깨에 묻은 살점과 혈액을 털어내며 말했다. 로아는 ‘컨센트레이션’이라는 스킬을 지닌 챔피언이다.

    자신의 휘하에 편성된 마물들의 의식을 모조리 명령 수행에 할당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니까 현재의 아르가노트 부대는 8천여 마리의 하이오크가 아니라.

    로아를 중심으로 하나로써 움직이는 군체에 가까웠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비롯해 모든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병기.

    [누자베스 : 저 새끼가 챔피언인 모양이네. 사기 꺾으려면 대장 목부터 쳐야지.]

    루칸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더 없이 편리했겠지만. 지금 당장은 누자베스가 사용할 수 있는 패가 없었다.

    때마침 그레이브야드 부대의 일제 사격이 가해졌고, 전열에 나서 있던 하이오크 투사들이 픽픽 쓰러졌지만.

    규모 자체가 상당히 차이가 났다.

    수십 마리가 쓰러진 정도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누자베스 : 햄토리!]

    1차 사격이 가해진 후 리제가 이끄는 인간 보병들과 함께 햄토리의 언더케이지 부대가 진격을 개시했다.

    지금 당장 챔피언을 상대할 수 있는 개체는 햄토리 외엔 없었다.

    “그래, 납쪼가리로 깔작이는 걸로 승부가 날 리가 없지.”

    로아가 신호를 보내자, 뒤편에서 거대한 상자를 든 오크 두 마리가 나타났다.

    키가 150센치 남짓한 로아보다 두 배는 더 거대해 보이는 철제 상자가 열렸고. 그 안에는 거대한 크기의 대검이 들어 있었다.

    검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거대하고, 흉포한 병기다. 이런 대검을 들 수 있는 인간이 있을지 의문이 들 만큼 말이다.

    “부디 즐기게 해줬으면 좋겠네, 누자베스.”

    터엉.

    하지만 로아는 그런 거대한 대검을 장난감처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누자베스 : 와…… 저 자식 봐라!? 저런 거대하고 흉흉한 걸로 누구집 자식을 죽이려고 가져왔다냐.]

    [햄토리 : 쮸!]

    로아가 참호까지 접근한다면 그레이브야드 부대의 괴멸은 피하기 힘들었다.

    저 정도로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순간이 끝이다. 구울 머스킷티어들의 머리가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터져나갈 게 분명했다.

    때마침 햄토리가 먼저 로아에게 접근했다. 언더케이지 부대의 렛맨 전사들이 하이오크 투사들을 맡는 동안 햄토리가 깊숙하게 파고든 것이다.

    “쮸, 쮸쮸.”

    햄토리는 목을 양옆으로 꺾으며 어깨를 풀어준 후.

    텅.

    방패를 칼등으로 쳤다.

    로아를 향한 명백한 도발!

    “렛맨 전사? 하급 마족이잖아.”

    “쮸, 쮸우. 쮸쮸쮸, 쮸- 쮸쮸.”

    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햄토리를 노려봤다. 지금까지 로아를 눈앞에 두고 저런 모욕을 내뱉은 마족이나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없을 것이다.

    로아는 그렇게 관용 깊은 마족이 아니었으니까.

    “하핫, 죽는 게 소원이라면야.”

    그 말이 끝마쳐지기가 무섭게 로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루칸다의 그림자 도약처럼 보일 만큼 순식간이다!

    하지만 로아의 경우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각력만으로 고속 이동을 할 수 있는 마물이다.

    쉬익!

    짧은 파공음.

    눈이 모습을 포착하기보다 먼저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가 울렸다.

    물론 그 소리 자체를 듣고 피하거나 막는 등의 반응을 취할 수는 없다. 고막에 소리의 파장이 닿기 직전에 검날이 닿을 테니까.

    단순히 위력만 뛰어난 게 아닌, 속도까지 우월했다. 헬베르카 분가의 말예다운 능력이다.

    로아의 대검이 햄토리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카가가강!

    비스듬하게 치켜들어진 햄토리의 방패 ‘세글리트의 미혹’이 로아의 대검을 흘려냈다!

    동시에 데미지 반사 능력이 발동되어 로아의 팔목을 순간 시큰하게 만들었다.

    ‘이걸 반응한다고?’

    하급 마족인 렛맨 전사 따위가 어떻게 반응해볼 속도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소리가 들렸을 리도 없다. 하지만 햄토리는 짐승 같은 직감으로 로아의 공격 동선을 예측해 냈다.

    게다가 대검의 위력까지 가늠하여 흘려낸다는 판단까지 한 것이다.

    “더러운 시궁창 쥐새끼 주제에……!”

    일반적인 마물이라면 세글리트의 미혹에서 발동된 데미지 반사로 빈사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겠지만.

    로아는 성역화된 둥지의 챔피언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상위 마족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충격보다, 일격에 햄토리를 죽이지 못했고. 팔목에 경미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솟았다.

    일격을 막아냈다고 해도 고작해야 렛맨 전사. 삼연격을 먹인다면 요행도 뭣도 없을 것이다.

    공중에서 자세를 고쳐 잡은 로아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캉!!

    날카로운 철붙이가 충돌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라, 미안. 둘이서 노는 중에 끼어들어서 화났어?”

    대검의 검신 가장 아래쪽에 바짝 검을 대서 밀어붙이며 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 인간 계집까지. 버러지들을 상대해 줄 생각은 없었는데.”

    타닷.

    로아가 뒤로 물러나며 착지하자.

    햄토리와 리제가 양측면을 커버하려는 듯 서로의 등을 비스듬히 등진 채 사선으로 섰다.

    “쟤가 제일 위험한 애 아냐?”

    “쮸쮸!”

    “그, 그렇지……?”

    슬슬 그레이브야드 부대가 참호를 버리고 퇴각할 것이다. 그 뒤에 언더케이지 부대와 갈라우드의 병사들도 따라 퇴각을 개시하면 된다.

    그때까지 리제와 햄토리가 로아의 시선을 잡아 끄는데 성공한다면 나쁘지 않은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물론 성공했을 때의 얘기다.

    “아르테간트만 있었으면 5초 컷인데. 그치?”

    “쮸, 쮸우-!!”

    농담을 주고받은 후.

    로아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투를 각오할 때였다.

    * * *

    “캬악!”

    서걱!

    절삭음과 함께 고블린의 몸통이 두동강 났다. 하이오크 투사의 도끼질에 이미 통로 내의 고블린 수십 마리가 도륙당하고 있었다.

    탁탁.

    휠체어의 팔받침대를 두들기며 천천히 시간과 거리를 가늠했다.

    [누자베스 : 얘들아 슬슬 퇴각하자. 난 이미 비밀통로로 멀찍이 도망쳤으니까.]

    [두르난 : 헛, 벌써 전장에서 벗어난 건가?]

    [누자베스 : 당연하죠. 장군이 죽으면 게임 끝인데 먼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발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이미 둥지 내부에 남은 고블린들도 없는지 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더 이상 저항할 병력이 없다는 걸 눈치챈 것이겠지.

    마인드 모드로 생존 병력들이 빠르게 퇴각하고 있는 게 보였다.

    자, 그럼 각오를 다질 때다.

    ‘서른 마리 이상은 되겠군.’

    정예 하이오크 투사.

    그것도 이 섬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한계치까지 장비를 업그레이드한 놈들이다.

    두세 마리가 내 부대 하나를 감당할 만큼 강력하겠지. 그런 놈들이 서른 마리.

    반신불수의 하이브 마인드가 해볼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야 되지 않겠나?

    덜컹덜컹.

    임시로 만들어 놓은 나무문이 잠시 흔들렸고.

    콰앙!

    도끼로 거칠게 내려찍자 나무문이 산산조각 나 파편이 흩날렸다.

    “크르르……!”

    “캬르카, 카!!”

    흥분한 하이오크 투사들이 기성을 내질렀다. 거리는 이제 1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휠체어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하이오크 투사들은 당장 달려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겁을 주려는 것인지 위협적인 기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기성을 내지르길 멈추고, 양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텄다.

    그사이로 나타난 놈은.

    눈꼴 시려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의복으로 멋을 낸 남자였다. 물론 진짜 인간일 리는 없다.

    저 녀석은 나와 같은 하이브 마인드.

    그것도 아리카 섬에서 가장 위협적인 111호 둥지의 관리자 카타쿨라 남작이다.

    “이런 방법을 많이 썼더군, 누자베스.”

    카타쿨라는 사뭇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방법에 당한 기분이 어떤가?”

    먼저 도망쳤다는 건 거짓말이다.

    내 둥지의 병력과 리제의 병력이 111호 둥지의 본대를 따돌리고 퇴각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피해가 누적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괴멸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베놈 편대 격파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게임은 끝이 나게 된다.

    카타쿨라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내 턱을 움켜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녀석의 손에 끼워진 가죽 장갑의 서늘한 감촉이 섬뜩하다.

    “누자베스. 우리의 게임은 여기서 끝이로군. 베놈 편대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할애한 결과다. 아니, 애초에 가용 수단이 별로 없었으니 고육지책이었겠지만.”

    “주절거리지 말고 죽여. 아니면 한 자리 마련해 주던가.”

    동족포식에서 패배한 하이브 마인드는 둥지를 파기당하고 살해당한다. 그게 아니라면 승리한 쪽의 둥지에서 지휘관 자리를 맡게 되거나.

    “오, 내 둥지에서 일해줄 생각이 있는 건가?”

    “대우가 좋다면야 안 될 것도 없지.”

    “그것 참…….”

    퍼억!

    복부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커헉!”

    입밖으로 쇳소리가 토해졌고.

    카타쿨라가 내 목을 붙잡아 흙바닥에 내던졌다.

    “듣기 싫은 빈말이었군.”

    “하, 하하. 들켰냐. 개자식이 눈치만 좋네…… 그럼 얘기도 끝났으니 죽이지……?”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즐길 수 있겠어. 내 은밀한 취미 생활에 대해서 알려주지.”

    카타쿨라는 구두굽으로 내 머리를 짓밟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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