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78화 (7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78화

    하이브 마인드의 방식(1)

    누자베스의 부상이 알려질 시 진영의 혼란은 불가피했다. 누자베스가 재기 불능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인간 측의 영주 리제가 어떻게 나올지도 미지수였고, 765호 둥지의 병사들도 적지 않게 동요할 것이다.

    전쟁군주는 강철이어야 했다.

    아무리 흔들고, 아무리 두들겨도 미동조차 않는 부동이어야만 한다.

    흔들림 없는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누자베스는 전투 중의 부상으로 하반신을 완전히 못 쓰게 된 상황.

    ‘머리가 아프군…….’

    누자베스의 개인실에서 빠져 나오며 스칼렛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누자베스에겐 꽤나 쌀쌀맞게 쏘아 붙였지만, 앞으로의 전황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회복술로는 끊어진 신경을 이어 붙일 수 없다. 게다가 완전히 중추가 으깨진 상황에서 살아났다는 것만이 기적이었다.

    유물급인 ‘제필프의 최종선고’의 순간 치유 능력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데미지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부상이었으니까.

    현재 누자베스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음 진화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하이브 마인드는 진화를 통하여 완전히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는다. 진화를 거치면 으깨진 중추 신경도 복구되리라.

    다음 진화가 언제일지 알 수는 없지만, 병력을 끊임없이 전투에 투입하여 진화시기를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각하의 상태는 어떤가?”

    스칼렛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루칸다의 목소리였다. 루칸다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지만, 누자베스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벌써 어느 정도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참이었다. 벽을 등진 채 스칼렛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떨 것 같나? 무능한 고블린을 믿고 몸을 던진 결과가 좋으리라 생각하는 겐가?”

    스칼렛의 목소리에는 힐난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루칸다가 곁에 있었음에도 누자베스가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애초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둘이다.

    이번 일로 악감정의 골이 깊어졌으리란 사실은 명확했다.

    루칸다는 스칼렛을 똑바로 노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걷기는커녕 서 있을 수조차 없네. 한동안은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오히려 죽지 않은 게 경이로울 정도의 부상이었다. 루칸다는 씁쓸한 숨을 들이킨 후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하명하신 일이 있을 텐데.”

    누자베스가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무슨 판단을 내렸는지 루칸다도 짐작하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왔다면 스칼렛에게 가장 먼저 전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가축들과 협력하여 베놈 편대를 격퇴하라고 하더군.”

    스칼렛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잰걸음으로 걸었다.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네. 앞으로는 내가 765호 둥지의 대행관리자로 움직이도록 하지.”

    “출세했군, 비루한 흡혈귀 주제에.”

    “어딘가의 무능한 필멸종보다는 믿을 만하니 당연한 일 아니겠나?”

    “쮸, 쮸쮸!”

    “그래, 햄토리 공도 잠시 동행을 부탁하겠네.”

    스칼렛의 뒤로 루칸다와 햄토리가 따라 붙었다.

    누자베스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스칼렛이 이 둥지를 지켜내야만 했다.

    둥지 대행관리자로써 명령을 수행하는 동시에 병력의 운용도 맡게 된 것이다.

    ‘이 늙은이에게 아이를 돌보는 취미는 없었을 텐데.’

    스칼렛은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땋아 목덜미 아래로 묶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보석처럼 보일 만큼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럼 낡은 방식이 얼마나 통용되고 있을지 확인하러 가세.”

    지휘관으로 전장에 서는 감각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적귀’라고 불리던 시절로부터 꽤나 긴 시간이 지난 것이다.

    * * *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인간이다.

    스칼렛이 지니고 있는 리제에 대한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역한 피의 냄새가 진동해서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여자애였다.

    흡혈귀의 본능은 고귀한 혈통이나 순결한 처녀의 피 냄새에 끌리게 되어 있었지만. 그런 본능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리제가 귀족 가문의 영애라고 해도, 순결한 처녀라고 해도 절대 피를 빨고 싶지 않은 인종이었다.

    “누자베스가 앞으로 못 움직인다고?”

    스칼렛이 둥지를 빠져나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영주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주둔지였다. 인간의 지휘관에게 누자베스의 부상 사실을 알리게 된 건 본의가 아니다.

    하지만 누자베스의 명령에 따라 스칼렛은 리제에게 사실을 전했다.

    “그건 곤란해졌네. 이쪽이 베놈 편대를 처리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텐데.”

    “그러기 위한 협력이지.”

    베놈 편대의 격퇴에는 리제의 능력이 불가결했다. 스칼렛은 인간의 협력을 받는다는 사실이 꺼림칙하며 내키지 않았지만. 누자베스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베놈 편대의 처리를 위한 별동대 및 765호 둥지 병력의 총지휘권은 내가 맡게 되었으니 그 사실을 통보하러 온 것뿐일세.”

    요청이나 부탁이 아니다.

    스칼렛이 가축이나 다름없는 인간에게 저자세로 대화에 나설 리 없었다.

    돼지나 소에게 허리를 굽히고 부탁하는 인간이 없듯 말이다.

    그리고 스칼렛의 눈동자에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는 ‘공포’를 상기시키는 힘이 깃들어 있다.

    영원한 밤의 최상위 포식자.

    뱀파이어는 언제나 먹이 사슬의 정점에 선 존재였으니까.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스칼렛의 눈을 똑바로 보는 것만으로도 항변하기는커녕, 겁에 질려 입조차 뗄 수 없겠지만.

    “재미없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절 지니지 않은 리제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저 눈빛.

    생물체로써 고장나 있는 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제는 스칼렛의 그런 못마땅한 시선을 받으며, 허리춤의 버클을 풀러 벨트에 결속되어 있던 ‘아르테간트’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뒷편에 서 있던 시릴스에게 아르테간트를 넘겼다.

    “시릴스. 이번 일은 부탁할게.”

    “예, 아가씨.”

    직접 나설 생각은 없다.

    그렇게 말하듯 리제는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둥지의 지휘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면 누자베스를 지킬 사람이 필요하잖아?”

    이걸로 베놈 편대의 격퇴에 나설 멤버가 정해졌다.

    765호 둥지의 챔피언인 스칼렛과 루칸다.

    그리고 아르테간트로 무장하게 된 시릴스.

    이렇게 셋이다.

    이 멤버가 모험가 팀과 합류하여 베놈 편대를 격퇴한다. 매우 간단하고 심플한 작전이었다.

    시릴스가 스칼렛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리제의 뒤를 따라 천막을 나섰고. 루칸다와 둘이 남게 된 스칼렛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계집이야. 안 그런가?”

    “흡혈귀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군.”

    루칸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 웃었다.

    * * *

    “자, 그럼 둥지명 선거의 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세요.”

    조잡하게 만든 나무 상자를 열어 안에 들어 있던 종이를 모조리 털어냈다.

    앞에는 투표에 참가한 둥지 방위병력들이 칼 같이 열을 맞추고 앉아 둥지명이 정해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앞쪽 줄에는 이번 둥지명 결정에 큰 조언을 준 코볼트 작업대 일동이 앉아 있었고 말이다.

    반신불수가 된 기념으로 미루고 미뤘던 잡무를 모조리 끝내 놓을 생각이었다. 벽쪽에는 목탄을 든 고블린 한 마리가 투표 결과를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첫 번째 투표용지를 펼쳤다.

    “사쿠…… 사쿠라 내가 하지 말랬지? 이 때끼들아! 사쿠라 표는 전부 무효야, 무효!”

    “키륵…….”

    “키륵, 키륵! 500원 짜리 음충, 500원 짜리 음충은 마술회로 만들 때 좋고…… 이건 1000원 짜리 음충…… 아, 조켄 아파! 1000원 짜리 조켄 아파!”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말해두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저 이상한 코볼트 놈들이 되는대로 떠드는 것뿐이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는 500원 짜리 음충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란 말이다.

    진짜다.

    식은땀을 훔치며 사쿠라표를 전부 걸러냈다.

    “그 다음은…… 오체불륜족 3표. 각하는 아직 오체까지도 아니고, 불륜도 안 했다. 묘하게 어감이 절묘한 게 고득점이지만 기각이다.”

    “키륵…… 아쉽다, 키륵.”

    “그 다음. 애호파 공원 19표. 탁아둥지 마찬가지로 19표.”

    “테에에엥-!”

    “마마아-!”

    “그만해 얘들아. 실장석 관련은 충분히 했어. 그만하라고 했어. 충분히 했어.”

    솔직히 너무 우려먹어서 슬슬 분량이 전부 통편집이 되지 않을지 우려스러울 지경이니까.

    “765프로덕션…… 121표. 이건 또 굉장히 신박하면서도 한번쯤 나올 법한 의문을 둥지 명으로 정하자고 생각한 부분의 착안점이 좋네. 하지만 우리는 아이돌 안 키운다. 기각이다.”

    “웃우-!!”

    “웃, 웃우-!!”

    “지금 웃우 소리 낸 놈들은 이름 적어놨다가 한 달 동안 식사로 숙주나물만 배급해라.”

    “엑에-!!”

    “엑-엑!!”

    여러모로 쓰잘데기 없고 해괴한 둥지명 후보들이 나왔지만 가장 높은 득표수를 얻은 둥지명은 바로.

    “나X릭의 지하대분묘가 548표로 최고득표를 기록했지만, 저작권 문제로 기각이다.”

    “키륵…… 키륵! ‘지하대분뇨’로 하면 저작권 괜찮다, 키륵!”

    “얼마나 싸는 거야!? 얼마나 싸길래 대분뇨인 거냐고! 멀쩡한 내 둥지를 재래식 화장실 만들 셈이냐!”

    “너무 많이 싼다아아앗-!!”

    “얘들아, 그만하라고 했어. 나중에 각하가 매니지먼트 끌려가서 꿀밤 맞아가며 원고 다 수정해야 되니까.”

    “박태준 팀장 여친하고 헤어져라, 키륵.”

    “이젠 둥지 명하고는 아주 관계가 없구만. 아주 그냥 사적인 원한밖에 없어. 나도 모르겠다. 이거 그냥 그대로 타이핑해서 런칭할 거니까 마음대로 떠들어라 짜식들아. 검열당해서 짤리면 다 너희들 탓이니까!!”

    도저히 둥지명으로 정할 만한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 이걸로 제23회 둥지명 투표도 무효로 처리되었다.

    “일들이나 하러 가! 저번에 지시한 그 땅굴 기한 내에 다 못 파면 전원 숙주나물 형이다! 각하가 다리만 멀쩡했어도 궁댕이를 걷어 차버렸을 텐데, 빌어먹을 놈들!”

    “키륵, 각하 성질 더럽다…….”

    “너무 무섭다아아앗-!! 키륵키륵!”

    “웃-우!!”

    “테에에엥! 일가실각데샤아앗!”

    “키륵? 이곳이…… 765호 둥지의 안……?”

    코볼트 작업대가 투덜거리며 각자 맡은 작업장으로 돌아갔고. 남은 병력들도 경계 구역으로 향했다.

    뒤에서 개표를 지켜보던 리제가 흥미롭다는 듯 다가와 어지럽게 펼쳐진 투표용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 이런 중요한 걸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거야?”

    “아아, 이건 민주주의적 투표라는 거다. 바보 100명을 이용해서 1명의 현자를 이길 수 있는 이념의 흉기지.”

    왕정제의 귀족인 리제에겐 생소한 개념일 것이다. 현재의 시점에선 공화정파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잠잠한 시기였으니까.

    “선택과 책임을 백성들에게 떠넘긴다라……. 쓰레기 같은 군주들이나 좋아할 법한 이념이네.”

    “그래그래, 백성들은 주권을 갖게 됐다는 착각 속에서 선택을 종용당하고, 결과의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거니까.”

    담배를 입에 물며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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