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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77화 (7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77화

    베놈(3)

    그러나 이번엔 누자베스가 방패를 소환하지 않고 지면에서 낮게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졌다!

    탄착점이 아슬아슬하게 누자베스의 주변에 펼쳐졌다.

    먼저 주의를 끌어준 덕분에 리제가 먼저 베놈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리제가 지근거리에 들어선 순간, 베놈이 머리를 노리고 치켜든 앞발톱을 내리 찍었지만!

    카가강!

    바위를 부술 정도로 위력적인 발톱 찍기를 리제는 검신으로 모조리 튕겨냈다. 어지간한 검이라면 일격에 부숴졌겠지만, 리제의 검은 고대 유물에 속하는 ‘아르테간트’다.

    문명이 발견해낸 물질 중 세 번째로 단단한 물질인 ‘테라니움’을 말도 안 되는 수준까지 응축시킨 병기였다.

    응축된 테라니움에 마나를 흘려 넣어 압축되어 있던 테라니움 입자를 극소량 방출하는 것으로 수정탑이 형성되는 것이다.

    방금 전 베놈의 공격을 막은 덕분에 대기중에 테라니움 입자가 흩뿌려진 상황.

    여기서 섣부르게 마나를 흘린다면 팽창하는 테라니움에 꿰뚫려 즉사할 수 있었다. 테라니움 수정탑의 위치를 지정하여 발동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리제는 인간으로써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기능’이 결여되어 있는 소녀였다.

    자신의 목숨조차 겜블링의 칩으로 내던질 수 있었고, 오히려 그런 행위로 얻는 짜릿한 스릴에서 삶을 실감하는 부류다.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리제가 취할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키기기깅!!

    허공에서 크고 작은 테라니움 수정탑이 난무하듯 펼쳐졌다.

    팽창할 때의 운동 에너지는 리제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후.”

    리제의 입술 사이로 상기된 날숨이 토해졌다.

    수정탑은 리제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쳤을 뿐이다. 뽀얀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피가 살아 있다는 실감을 주고 있었다.

    기기기기긱!

    천운이 도왔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리제를 스치며 형성된 수정탑은 정확하게 베놈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물론 팽창한 테라니움은 베놈이 어렵지 않게 부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의 찰나.

    누자베스가 필요로 했던 시간은 많지 않았다.

    단 1초.

    루칸다가 모습을 드러내고 흑요석검의 ‘리즐링 에코‘ 능력으로 강화시킨 검을 휘두를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됐다.

    “지금이다, 루칸다아아!!”

    쿠구구궁!!

    허공에서 나타난 거대한 방패가 다른 베놈들의 사격 방향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비비큐 클럽의 사면 지원 사격!

    포탄이 터지며 일으킨 흙먼지가 시야까지 가로 막았다.

    체크 메이트.

    완벽한 연계였다.

    오늘 처음으로 합을 맞춰본 멤버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걸로 다른 베놈의 개입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기회를 루칸다가 놓치지 않는 이상.

    베놈 한 기가 오늘 이곳에서 격파되리란 사실은 명확했다.

    ‘이걸로 시간은 벌었다.’

    희망적인 관측이 뇌리를 스쳤다.

    파괴한 베놈을 탈취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베놈 편대가 이 이상 병력을 쫓지는 못할 것이다.

    타이밍 좋게 나타난 루칸다는 이미 검을 치켜든 자세였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흑요석 검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며 공명하고 있는 상태.

    윤왕 루아 카날다의 전매특허 기술.

    황혼을 가르는 혜성이다.

    여덟 자루의 흑요석검을 갖추고, 완벽하게 제어에 성공만 한다면 ‘관념 영역’의 존재까지 절삭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비록 루칸다가 지닌 흑요석검이 두 자루뿐이라지만, 신화에 등장할 법한 신기와 기적의 재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오, 이건 위험했군.”

    그 목소리가.

    소리의 파동이 누자베스의 귓가에 들리는 것보다 먼저였다.

    누자베스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고.

    카앙!

    베놈의 날카로운 앞발톱이 누자베스의 검을 부러뜨리고, 동시에 늑골을 꿰뚫었다.

    동시에 루칸다를 쳐내 멀찍이 날려 버리며 나타난 것이다.

    “큭, 카학……!”

    육안으로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누자베스는 가슴에 박힌 앞발톱을 꽉 쥐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정도 거리를 단숨에…….’

    누자베스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쏟아졌다. 고통보다 먼저 경악이 뇌리를 잠식해 나갔다.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베놈은 방금 전까지 절벽 위에 있었던 녀석이다. 다른 베놈과 달리 짙은 구릿빛의 동체를 지닌 녀석이다.

    붉은빛으로 전신을 감싼 베놈은 다른 베놈과 달리 무장이 없었다.

    주포도 동축기관총도 탑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독극물 살포를 위한 기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머리 위에 공명석의 파동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접시 형태의 기관이 달려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베놈 편대의 지휘관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휘관기에 타고 있던 마르테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누자베스를 찬찬히 살피며 숨을 삼켰다.

    “용맹하군. 하지만 현명하지 못했어. 전력차는 명확했다만.”

    베놈에 탑승하고 있는 마르테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누자베스는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앞발을 붙잡은 채 바둥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흉부를 완전히 관통당했다.

    그저 본능적인 발악일 뿐이다.

    그를 구하기 위해 병사들이 몰려들어도 구해낼 수 없을 것이다.

    “전쟁군주여. 내 직감이 틀린 것인가? 나는 그쪽이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호적수라 느꼈다만. 그런 호적수의 최후라고 하기엔 너무나 김 빠지는 결말이로군.”

    누자베스와 루칸다. 그리고 리제의 연계는 훌륭했다. 순식간에 베놈 한 대를 격파당할 뻔했다. 하지만 결과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그저 개죽음을 향해 내달린 들개 무리였을 뿐이다.

    베놈은 다섯 대 모두 멀쩡했고, 누자베스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말해줄 수 없겠나? 내 성급함이 채 여물지 못한 과실을 따먹으려 한 것이라면, 기회를 줄 수 없는 것도 아니다만.”

    마르테제는 111호 둥지의 참모라던가, 베놈 편대의 편대장이기 이전에 네츠라족의 사내다.

    떨림과 흥분으로 가득한 맞대결을 그 누구보다 갈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비록 누자베스는 실패했다지만, 마르테제의 해묵은 본능에 불씨를 지피기 충분했다.

    누자베스는 바둥거리는 것을 포기하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장기가 손상된 병사들은 곧잘 저런 식으로 죽는다. 본능에 의해 폐가 강제로 수축되며 호흡을 강요하는 것이다.

    마르테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누자베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대답이 설령 죽기 직전의 유언일지라도.

    “…사…….”

    “사?”

    “쿨럭, 허억. 사, 사탄 뿔이나…… 빨아라, 개자식아…….”

    “큭, 크하하핫! 그것이 귀관의 유언인가!”

    누자베스는 마르테제를 향해 중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투두두둑.

    그 순간이었다!

    베놈의 다리 아래쪽에서 수십 발의 포탄이 쏟아져 나왔다. 대륙제의 병기는 아니다. 바체트령 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구시대적 재래 화기다.

    하지만 저 정도의 양이 이 거리에서 기폭된다면 아무리 베놈이라도 무사하긴 힘들었다.

    쐐애애액!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르테제의 지휘관기 머리 위로 박격포 포탄이 날아들었다.

    ‘폐가 수축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인드 모드로 이쪽의 좌표를 보냈다고?’

    그 어떤 영웅이라도, 호걸이라도.

    죽음 직전의 순간이 오면 짐승처럼 본능에 따라 발버둥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조차 송곳니를 치켜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테제는 흥분에 젖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사나이를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장난감이란 사실은 확실해졌구나, 누자베스!!”

    박격포의 포탄이 지면에 닿기 직전 루칸다가 앞발톱에 박혀 있던 누자베스를 구출해냈고. 폭발과 동시에 리제의 수정탑이 방어막처럼 펼쳐졌다.

    쿠우우우웅!!

    거대한 폭발이 일대를 뒤덮었다.

    마르테제의 베놈도 재빠르게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정도였다.

    폭발의 후폭풍과 함께 일어난 먼지와 연기가 어느 정도 걷힌 뒤. 이미 누자베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르테제는 솜씨 좋게 정돈된 턱수염을 매만지며 여운에 잠겼다. 자신을 노려보던 누자베스의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허리가 오싹거렸다.

    “마르테제님. 추격하시겠습니까?”

    “아니, 이 이상 농땡이를 쳤다간 혼나지 않겠나?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지.”

    솔직한 심정은 누자베스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한 마리의 수컷으로써 또 다른 수컷에게 매료되는 경험은 흔치 않았으니까.

    * * *

    흉부에서 번지는 끔직한 통증 덕분에 의식이 돌아왔다. 이 통증 덕분에 의식이 돌아왔다가, 다시 실신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날아갈 것 같은 의식을 붙잡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며 눈을 떴다.

    “젠장, 내가 몇 시간이나 누워 있었지?”

    침대의 머리맡 쪽에 마침 스칼렛이 앉아 있었다. 내가 부상을 입으면 치료해주는 건 스칼렛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엔 평소 이상으로 뾰루퉁한 표정이었다.

    “세 시간 정도일세.”

    “체감상으론 세 달 정도 앓다가 일어난 기분인데.”

    꿰뚫렸던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려다봤다.

    흡혈귀의 혈액을 사용한 급속 치료 덕분에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이 통증만 없다면 내가 베놈의 발톱에 꿰뚫렸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루칸다는? 당장 불러와. 베놈 편대가 이쪽을 요리할 수 있는데 물러났다는 건 행선지가 명확하지. 모험가 팀을 요격하러 간 거다. 당장 합류해서 대응하지 않으면 베놈을 처리할 기회가…….”

    “누워 있게.”

    “그럴 여유가 있겠냐.”

    이쪽은 나와 루칸다, 그리고 리제 셋이서 베놈 한 대를 격파에 가깝게 몰아붙였다. 모험가팀과 합류해서 대응한다면 어쩌면 베놈 편대를 격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개 격파당한다면 더 이상의 승산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여유롭게 누워서 몸을 돌볼 여유 따윈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째선지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마치 몸통이 반토막 난 감각이다.

    서둘러 손을 뻗어보자, 두 다리는 멀쩡히 붙어 있었다.

    그러나 내 다리가 아니라, 마네킹이나 다른 사람의 다리를 만지는 듯한 느낌.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제야 스칼렛의 시선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가 됐다.

    “계속 그런 식으로 무리하다간 주군이 가장 먼저 죽네. 다리를 완전히 못 쓰게 된 덕분에 당분간은 얌전히 지내 주겠군.”

    “반신불수라니. 개 같은 전개네…….”

    주인공이 하반신 마비다.

    이건 대규모 하차의 예감밖에 안 든다.

    스칼렛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선봉장이 아닌 전쟁군주로써 싸우는 법을 배우게. 이번 부상이 좋은 기회가 되겠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고, 몸은 망가졌다.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이다.

    “주군은 밤의 어머니께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네. 오히려 그 사랑을 영악하게 이용해 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은 밤의 어머니께서 내리신 경고라고 생각하게나.”

    “기왕 사랑해준 김에 카타쿨라 놈의 목을 칠 때까지만 봐줬으면 좋잖아.”

    그런 불평을 토로해봐도 소용 없었지만 말이다.

    이 몸뚱이로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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