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76화 (7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76화

    베놈(2)

    대륙의 서방에 위치한 ‘스토큰’ 지방은 험준한 산이 9할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과거 반 르낙시아 동맹과 인류가 쉴 새 없이 충돌한 결전지이기도 했다.

    특히나 땅굴을 파고 고지를 점령한 후 철조망과 참호를 구축하여 간이 요새화하는 마족들의 전법은 언제나 인간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이 빌어먹을 전법을 타개할 수단으로 고안된 고대 병기는 수도 없이 많았으나. 전쟁 말기에 개발된 ‘베놈’이란 병기가 가장 합리적인 수단으로 평가받았다.

    90도에 가까운 가파른 절벽도 시속 3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오를 수 있으며, 기동 자세도 유연하게 바꿀 수 있기에 협소한 산지도 돌파하기 용이했다.

    게다가 어지간한 화기로는 뚫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한 장갑! 야간에 은밀히 기동하여 신경독을 흩뿌리고 다니는 이 기갑의 거미는 마족들에게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111호 둥지의 카타쿨라가 복구한 형태는 고대에 사용되었던 베놈의 원형과 100% 일치하진 않았다.

    신경독 살포를 위한 독물 저장 탱크와 분사구를 제거하고, 대인 유탄과 철갑탄 사격이 가능하도록 주포와 동축기관총을 추가했다.

    그렇기에 그 구조만 보자면 대륙간 강습 기함 ‘타르틸리엇’을 소형화한 병기처럼 보인다.

    전폭이 1.3킬로미터에 달하는 타르틸리엇에 비하자면 상당히 아담한 사이즈지만. 5미터 짜리 기갑 거미는 보병들에게 충분히 공포의 화신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뭐야, 저게…….”

    “신종 마물인가?”

    “마족 놈들은 모두 후퇴한 거 아니었어?”

    병사들은 절벽 위에 나타난 베놈을 보고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아직 베놈의 위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인간들의 반응이다. 마르테제는 조종석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아 입을 열었다.

    “적당히 건드려 볼까? 우리 귀여운 꼬꼬마 군주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봐야지.”

    마르테제의 목소리는 각 베놈의 조종석 앞에 설치된 ‘공명석’을 통해 편대원들에게 전달되었다.

    악몽이 시작된 것은 그와 동시였다.

    네 기의 베놈이 쏜살 같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며 불을 뿜기 시작했다.

    75㎜ 주포와 동축기관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인유탄과 철갑탄! 단 네 기의 병기가 발휘하고 있는 화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으아아악!”

    “으악! 플라잉 거미다! 도망쳐!”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시속 5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기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착점의 정확도는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정확했다!

    창과 활 같은 것으로 무장한 인간 보병들이 도저히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접근하기도 전에 벌집이 되거나, 고기 파편이 되어 허공에 흩뿌려질 것이 뻔했다. 만에 하나 접근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피해도 줄 수 없다.

    활과 화살? 머스킷 사격?

    그런 공격으로 베놈에 흠집이라도 낼 수 있다면 기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당연히 도망치는 것 역시 가능할 리 없다.

    전력으로 내달려도 베놈에게 붙잡혀 날카로운 앞발톱에 찍혀 죽는 병사가 허다했다.

    “아니 미친…… 저런 게 다섯 대나 있다고?”

    한 대만 있어도 아리카 섬을 통째로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병기다.

    누자베스는 111호 둥지가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복구해낸 고대 병기를 목격하고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패러다임 자체가 다른 병기다.

    인간 보병은 창과 활로 무장한 게 전부고.

    그럭저럭 발전을 이뤄낸 누자베스의 군대는 머스킷으로 무장한 구울 부대가 주력이었다.

    그런 원시적인 병력으로 저 끔찍한 병기를 상대해야 된다? 승산 따위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근접전까지 가능해서 앞발톱으로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찍어 찢기까지 했다!

    “하…… 염병, 할렐루야다 진짜…….”

    어느정도 고대 병기의 위력을 예상했지만.

    저 정도로 발전된 문명의 병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멍하니 엎드려 병력이 학살당하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누자베스는 어금니를 꽉 물며 각오를 다진 후.

    마인드 모드를 발동해 간략하게 명령을 하달했다.

    [누자베스 : 스칼렛. 전병력의 퇴각이다.]

    [스칼렛 : 오, 저건 베놈이로군. 호흡기를 통해 침투하는 신경독을 흩뿌리니 가까이 안 가는 게 좋을 걸세. 그나저나 대포를 달아 놓은 건 처음 보는군.]

    [누자베스 : 너무 무서워서 울 거 같으니까 그만 겁주고.]

    [루칸다 : 독극물 살포 기관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 흡혈귀가 알고 있는 형태와 다른 아종이라고 생각됩니다.]

    [누자베스 : 독가스까지 살포하면 뭐, 오늘 숟가락 놓는 날이지 뭐. 루칸다 너는 나랑 잠깐 어울려 줘야겠다.]

    [루칸다 : 각하와 함께 숟가락을 놓을 사람이 필요한 겁니까?]

    [누자베스 : 그래그래. 가는 길 외롭지 않게 길동무나 해달라고.]

    우선적으로 병력을 퇴각시킨다.

    그리고 누자베스 자신과 루칸다가 나서 베놈의 발을 묶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렇게 병력이 퇴각할 시간을 벌 셈이었다.

    리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구덩이 안쪽에 누워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입에 담배를 물며 병사들이 도망치는 걸 바라보다, 누자베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생긴 오빠야, 파트너 구했어?”

    “여기 고블린 형아가 내 파트너야. 아주 좆되는 형이지.”

    “셋은 어때?”

    “들었냐, 루칸다? 셋이서 즐기자는데?”

    “외람된 말이지만 고블린족에겐 인간처럼 그런 추잡한 관습은 없습니다.”

    “그렇다는데?”

    “어, 그래? 고블린쇼에선 하던데…….”

    “이게 어찌된 일이야, 루칸다? 셋이서 한다잖아.”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고블린쇼는 인간놈들의 강요와 폭력에 의해 이뤄지는 저열한 학대 행위입니다.”

    “저열한 행위라잖아! 리제 너 그런 거 구경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마족학대 행위야 그거.”

    “미, 미안…….”

    “어쨌든 내가 먼저 뛰쳐나갈테니까 적당히 엄호를…… 끄악!!”

    쿠웅!

    누자베스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가까운 거리에서 유탄의 폭음이 터졌다.

    이제는 퇴각하고 있는 병력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누자베스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원래 이런 모임은 머릿수 맞춰 오는 게 매너 아니냐?”

    누자베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서며 재빠르게 베놈의 위치와 거리를 가늠했다.

    ‘4대는 전방에서 10미터 정도씩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고.’

    나머지 한 대는 여전히 절벽 위에서 대기중.

    [누자베스 : 두르난!!]

    [두르난 : 세상에 저런 아름다운 기계 장치가 있었다니……! 절대로, 절대 부숴서는 안 되네! 반드시 온전하게 사로잡아야 되네!!]

    [누자베스 : 시끄러워! 저걸 어떻게 사로잡아!? 어설프게 상대하다간 내가 벌집이 될텐데. 좌표 보낼테니까 화력 지원할 준비나 해!]

    [두르난 : 오 신이시여…… 저 예술 작품을 제 손으로 부숴야 하는 겁니까?]

    투두두두두두!!

    베놈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이번에도 누자베스를 정확히 노렸지만.

    쿠웅!

    누자베스보다 더 거대한 대형 방패가 그 사이를 가로 막았다.

    카가가강!!

    허공에 흩뿌려지는 철갑탄 사이를 한 줄기의 그림자가 가로 질렀다. 일순간이지만 베놈에 탑재된 열감지 카탈리스크에도 감지되지 않았다.

    베놈의 파일럿이 육안으로 그 모습을 확인했을 땐 이미 지근거리 안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슴푸레한 그림자는 순식간에 고블린으로 형상을 바꿔 나타났다.

    키잉!

    루칸다가 후려친 검은 아슬아슬하게 베놈의 앞발에 가로 막혔다. 순간 경악할 만큼의 반응 속도다.

    그 좌측에서 마찬가지로 루칸다를 발견한 베놈이 동축기관총의 총구를 돌렸다. 그리고 루칸다를 향해 발포한 순간!

    쿠궁!

    투다다다!!

    지면에서 솟아 오른 수정탑이 베놈의 동체를 일순 들어 올렸다. 덕분에 철갑탄이 사선을 그리며 허공을 꿰뚫었다.

    “누자베스!”

    “네이스네이스! 리제, 슈퍼 세이브!”

    타다닷!

    동체가 들어 올려져 기우뚱거리는 베놈을 놓칠 만큼 누자베스도 멍하니 있지 않았다.

    장갑이 상대적으로 얇은 아래쪽을 노리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투웅!

    시야 바깥에 있던 베놈이 누자베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컥!”

    30톤에 달하는 철갑 덩어리가 전력으로 달려와 몸통 박치기를 한 것이다! 스매쉬를 맞은 테니스공처럼 누자베스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촤아악!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즉사했을 정도의 충격량. 하지만 누자베스는 인간이 아닌, 마물. 그것도 개인의 육체 능력을 강화시킨 이레귤러 타입의 하이브 마인드다.

    이 정도의 공격으로 일격에 죽을 만큼 무르진 않았다.

    가까스로 의식을 붙잡으며 흙바닥 위를 미끄러졌다.

    기이잉.

    베놈의 붉은 모노아이가 다시 누자베스를 향했다.

    “쿨럭……! 너무 거친 플레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제필프의 최종선고를 입고 있었음에도 이 정도의 데미지다. 맨몸으로 맞았다면 뼈와 장기가 모조리 으깨져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누자베스는 피 섞인 타액을 뱉어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앞으로 딱 5분만 더 버티고 도망가자. 더 상대하려고 했다간 진짜 숟가락 놓을 수도 있겠다.”

    “각하, 저 정도라면 절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짜?”

    “물론 빠르게 기동하고 있는 놈을 노리자면 실패 리스크가 큽니다. 1초 정도라도 발을 묶을 수 있다면 시도해 보겠습니다.”

    누자베스가 지니고 있는 카드 중 가장 공격력이 높은 마물은 루칸다였다.

    실제로 제필프의 최종선고로 무장하고 있었던 오거 분다도 일격에 양단해냈고 말이다.

    “리제, 들었지?”

    “기습하는 쪽보다 발을 묶는 쪽이 더 위험하지 않아?”

    “그래서 싫어?”

    리제는 그 물음에 빙긋 웃으며 바로 답했다.

    “더 좋아.”

    한 대라도 무력화시킨다면 베놈 편대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111호 둥지가 총력을 다해 복구해낸 베놈은 총 다섯 대.

    그 중에 한 대라도 잃는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뼈아픈 손실이니까.

    추격을 중단하고 무력화된 베놈을 후방으로 호송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거기까지 판단이 선 후 리제와 누자베스가 나란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기이이잉.

    두 대의 베놈이 동축기관총의 총구를 돌렸다.

    그리고 나머지 두 대는 재빠르게 누자베스의 좌우 측면으로 우회 기동했다.

    누자베스가 철갑탄을 막아낼 만큼 거대한 방패를 일순간 소환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투두두두두두!

    다시 한 번 기관총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수십여 발의 기갑탄이 누자베스를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