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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75화 (75/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75화

    베놈(1)

    “저것이 765호 둥지의 누자베스인가.”

    “예, 이쪽의 가장 큰 골칫거리죠.”

    22방위대의 대장 호즈칸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미 방위대의 병력이 인간 병사들과 뒤섞여 난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

    혼돈 그 자체처럼 보이는 이 전장에서 유독 빛나는 존재가 있었다.

    111호 둥지의 참모 중 하나인 ‘마르테제’는 흥미 깊다는 눈빛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병력 사이를 내달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누자베스’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었다.

    “아름다워.”

    마르테제는 깔끔하게 정돈된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갈라우드 가문의 신임 영주와 765호 둥지의 관리자에 관한 보고는 둥지에서 심심치 않게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목격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누자베스는 순식간에 마르테제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포탄과 날붙이가 난무하는 사지에서 저렇게까지 용맹할 수 있다니!

    “밤의 어머니께 사랑받고 있군.”

    마르테제는 북방의 ‘네츠라족’의 후예였다.

    독한 술과 싸움이라면 환장하는 본능을 지닌 마족이다. 술과 주먹질로는 절대 네츠라족과 대결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마르테제는 그런 네츠라족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사내였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111호 둥지의 최고위 간부 자리를 차지했고, 동시에 ‘베놈 편대’의 편대장을 맡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마족이었기에 누군가를 평가할 때 당연히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비교 대상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마르테제가 인정한 사내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지금 막 한 사람이 더 추가된 참이었다.

    호즈칸은 마르테제를 곁눈질로 흘깃흘깃 바라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마르테제 님. 베놈 편대는 모험가 놈들의 저지에 나선다고 들었습니다만……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호즈칸도 일단은 야전 지휘자다.

    둥지 내에서 결정되는 병력 운영 방침에 대해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테제의 베놈 편대는 둥지의 제4구역까지 침입한 모험가 팀의 격퇴에 나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마르테제는 편대를 이끌고 섬의 중앙 평야까지 와 있었다.

    “아, 물론 명령은 수행해야지. 하지만 인간놈 다섯을 처리하는데 몇 분이나 걸리겠나? 베놈의 위력이라면 수 초도 걸리지 않을 터.”

    “그건 그렇습니다만.”

    호즈칸도 ‘베놈’의 위력은 족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모험가라도 마르테제의 베놈 편대가 나선다면 순식간에 고기 파편이 되어 형체도 못 알아보게 될 것이다.

    “사내란 언제나 위험과 장난을 즐기는 법이야.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그렇지.”

    마르테제는 누자베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내를 파멸로 이끄는 것 역시 위험과 장난 아니겠나?”

    마르테제에게 누자베스는 어떻게 보였을까?

    일생을 통틀어 돌이켜 봐도 저렇게나 치명적인 장난감은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난감.

    그런 식으로 보이고 있을 것이다.

    섣불리 손을 댄다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네츠라족의 피가 들끓고 있었다.

    ‘파열의 순간을 뇌리에 새기고 싶군.’

    저렇게나 아름답다면, 파괴되는 그 찰나의 순간 반짝일 최후가 기대되는 법이다.

    “호즈칸. 잠시 인사라도 나누고 오겠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용변이 급해 자리에 없었던지라 아무 것도 듣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습니다.”

    “호즈칸. 나날히 영리해지는군.”

    마르테제는 호쾌하게 웃은 후 뒤로 돌았다.

    그의 뒤에는 다섯 대의 기계 장치가 놓여 있었다. 그 크기는 길이 5미터, 너비 4.5미터, 높이 5.5미터.

    형태는?

    금속으로 빚어진 거미.

    그렇게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아니면 거미처럼 다리가 달린 ‘전차’라고 표현하거나 말이다. 일반적인 전차라고 하기엔 주포의 길이가 짤막했지만 운용법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캐터필러 형식의 전차와 달리 8족 보행형의 병기다. 산악 및 험지에서 보여주는 기동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심지어 절벽까지 타고 오를 수 있으며 최대 시속 60키로의 속도로 내달릴 수도 있다. 게다가 30톤의 무게를 무시하듯 5미터 이상 점프할 수도 있는 괴물 병기였다.

    75㎜의 주포에서 뿜어내는 포탄과 측면에 탑재된 동축기관총에서 쏟아지는 철갑탄 세례!

    저 기계 장치가 바로 111호 둥지가 총력을 다해 복구해낸 고대 병기 ‘베놈’이었다.

    그것도 한 대가 아닌 다섯 대!

    기껏해야 창이나 꼬나쥔 보병 부대 따윈 순식간에 떡갈비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저급한 병력으로는 베놈에게 유효한 데미지조차 줄 수 없다.

    마르테제가 해치를 열고 베놈 지휘관기에 올라탄 후.

    후우우우웅!

    거친 스로틀음이 울리며 강철의 거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것이 고대의 병기…….”

    꿀꺽.

    호즈칸도 베놈 편대의 위세에 마른침을 되삼켰다. 정보로는 들었지만, 이렇게 베놈이 가동하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런 괴물 같은 병기가 적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윽고 기동 준비를 끝마친 베놈 다섯 기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누군가에겐 악몽 같은 하루가 시작되려던 찰나였다.

    * * *

    “지겹다, 지겨워! 루칸다!! 이 새끼들 부화장 도대체 몇 개나 돌리고 있는 거냐? 아무리 죽여도 계속 쏟아져 나오네.”

    “입으로는 지겹다고 해도 실은 즐기고 계신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냐. 나는 폭력이라면 치를 떨 만큼 선량한 마물이야. 이 새끼들 잔뜩 죽인 날은 너무 슬퍼서 하루에 밥을 세 끼밖에 못 먹는다니까.”

    콰득!

    트롤 놈의 흉부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내며 주변을 둘러보자, 슬슬 방위대의 병력이 퇴각하는 게 보였다.

    쥐고 있던 검을 대충 내던지자 허공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우리 동업자 아가씨 쪽도 대충 끝난 모양이네.”

    한숨을 돌리는 사이 리제도 이쪽을 발견하고는 터덜터덜 걸어오기 시작했다.

    “계속 시간을 지체하다간 병력 증원이 먼저 한계가 오겠어. 마물과 달리 우리는 병사 육성에 시간이 걸리니까.”

    “그러면 우리 둥지로 병력 발주라도 넣어. 부화장을 확장해서 잔뜩 만들어주지. 지휘는 알아서 잘 하고.”

    “싼값에 마물들을 병력으로 쓰다가 배신을 당한 분이 뻔히 있는데?”

    리제는 어린아이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어쨌거나 리제 쪽의 병력 증원에도 한계가 곧 온다는 건 사실이지.’

    여기서 퇴각한다면 다시 이렇게 밀어붙일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 기약하기 힘들다.

    게다가 지금은 모험가 팀이 둥지 공략에 나선 덕분에 상황이 더욱 좋았다. 그렇게 실력 좋은 모험가가 언제 또 올지 모를 일 아닌가?

    “…….”

    물론 오긴 온다.

    류시혁이라는 괴물 같은 사이코패스 살육머신이 하나 오긴 오는데.

    그 새끼가 오면 카타쿨라고 뭐고 모두 뒤진 목숨이다.

    감이 잘 안 오면 대충 타입문 계열 팬픽에 등장하는 메리수 쯤 되는 캐릭터를 상상하면 된다.

    상상이 안 되는가?

    그럼 내가 직접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의 원고 내용을 두들겨 주겠다.

    류시혁이 둥지에 들어갔다.

    그가 검을 뽑았다.

    “꺄아악! 멋져요 시혁 님!”

    “시혁 님의 솜씨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군요!”

    “후후, 류는 검 뽑는 솜씨가 일류라니까.”

    빨주노초파남보 미소녀들이 류시혁의 멋진 모습에 뺨을 붉혔다!

    가슴 사이즈는 영어 교보재…… 아니, 가슴 사이즈는 됐다.

    어쨌거나 류시혁은 시크한 남자다.

    그래서 미소녀들이 환호를 해도 무시한다. 쿨시크한 꽃미남인 것이다.

    “하앗!!”

    류시혁이 검을 휘둘렀다! 둥지가 박살났다!!

    개박살! 다 죽었다! 마물 놈들은 모조리 폭발사산했다! 챔피언들도 비명횡사했다!

    “시혁 님 너무너무 멋져요!”

    “역시 류. 내가 인정한 남자야.”

    “잠깐! 시혁 님한테 너무 달라붙지 말라구!”

    미소녀들 일제히 물구나무!

    와! 너무너무 멋지다 류시혁!!

    하지만 쿨시크남 류시혁은 미소녀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흥.”

    차가운 도시 남자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악독한 마물 놈들이 모조리 찢겨 죽었다! 오늘도 류시혁의 활약으로 평화가 지켜진 것이다!

    류시혁!

    그의 능력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없다! 왕국 최고의 그랜드 소드마스터 ‘베이션’이 10,000,000,000명 와도 류시혁의 발톱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멋지다 류시혁! 아 너무 멋있다!

    대충 이런 내용이란 말이다.

    이게 웃긴가?

    이런 새끼한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결코 웃음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칼질 한 방에 둥지를 초토화시켰는지 상상도 안 된다. 내가 쓴 원고지만 현실이 되니 그냥 공포 그 자체다.

    “어쨌거나 방금 얘기했던 고대 병기 대책은 진지하게…….”

    “각하!”

    루칸다의 외침과 함께 충격이 덮쳐왔다.

    갑자기 달려든 루칸다 덕분에 흙바닥을 나뒹군 것과 거의 동시였다.

    투다다다다!!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자갈과 흙이 치솟아 올랐다.

    ‘총격?’

    그것도 머스킷탄이 아니다.

    방금 전의 총성은 자동소총 혹은 기관총의 연사음과 흡사했다.

    “뭐야, 시부랄! 저 새끼들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어? 에르바키나 연맹 이 개새끼들이 또 지랄맞은 물건을 가져온 모양이군.”

    “기관총이 어떻게 생긴 병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저게 기관총이란 병기입니까?”

    바짝 엎드린 채 루칸다의 시선을 쫓자.

    기이이이이잉.

    바위 절벽 위쪽이 희미하게 일렁이나 싶더니, 어렴풋한 윤곽을 그리기 시작했다.

    “설마…….”

    절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다섯 마리의 거대한 거미였다.

    강철의 갑주를 뒤집어 쓴 거미.

    한 마리는 절벽의 위쪽에 서서 이쪽을 내려보고 있었고, 나머지 네 마리는 경사면에 붙어 당장이라도 뛰어내려올 기세였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저것이 111호 둥지의 고대 병기다.

    방금 전의 기관총 소사도 저놈들의 소행이겠지.

    “이번엔 진짜 조진 거 같은 기분밖에 안 드는데.”

    유언이라도 생각해 두자.

    백억 점 만점짜리 유언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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