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74화 (7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74화

    미완성의 이 세계(3)

    “나는 가끔 내가 진짜 누구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전쟁군주 누자베스인지, 그게 아니라면 3류 웹소설 작가 한주호인지 말이야. 어쩌면 둘 다 아닐지도 모르지. 연속성이 전무한 두 기억이 우연찮게 딱 맞어 떨어졌고, 내가 이 혼재한 기억을 토대로 어거지로 짜맞춘 정체성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그럴싸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그런 식으로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것도 아니면 양쪽을 연기하며 서술 트릭을 쓰고 있는 제3자의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잖아?”

    병력의 집결지로 향하며 스칼렛을 향해 가벼운 신변잡기를 내뱉었다. 스칼렛은 내 오른쪽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따라오다 어깨를 으슥였다.

    “사춘기라도 왔나?”

    “나한테 물어도 말이야…… 하이브 마인드는 몇 살부터가 사춘기인지 모르겠는데. 아직 가랑이 사이에 털 안 났으니까 사춘기는 아닌 거 아냐?”

    “그건 그렇군. 저번에 봤을 때도 없었으니…….”

    “그래, 아니 그래가 아니라 봤다고?”

    오해할까봐 미리 첨언해 두겠다.

    나는 보여준 적이 없다.

    내가 둥지 안이라고 훌렁훌렁 벗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스칼렛이 봤다는 말은, 혹시 ‘최면’이라던가 ‘수면‘ 같은 태그가 붙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잠깐, 그 역겨운 흑백 상상은 그만두게.”

    “이젠 아주 거리낌이 없네. 가랑이도 보여지고, 머릿속도 보여지고! 잘 했다, 잘 했어. 아주 잘 했습니다. 스칼렛. 각하는 이제 결혼 다 했습니다. 이런 남자를 누가 데려가겠어!”

    “걱정 말게. 정 없으면 이 늙은이가 거둬줄 테니.”

    스칼렛은 쿡쿡 웃으며 내 엉덩이를 툭 쳤다. 그리고 잠시 뒤 반대편 엉덩이까지 또 쳤다!

    “스칼렛 우리가 아무리 그런 끈적한 관계라도 집결지로 향하는 중에 자꾸 이런 스킨십은 곤란해.”

    “아니, 주군하고는 그런 관계도 아니고…… 이번엔 내가 아닐세.”

    왼편을 돌아보자 어느샌가 루칸다가 다가와 왼쪽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찰지군요, 각하.”

    “하지 마. 그런 농담 하지마라.”

    “얼마 전에 코볼트 작업대의 코틀러에게 배웠습니다. 각하가 이런 농담을 좋아하신다고.”

    “무슨 농담?”

    “추한 엉덩이구만! 안 빨면 쏴버린다 이 짜식아!”

    “자지스 크라이스트…….”

    “마음에 드셨습니까, 각하?”

    루칸다는 꽤나 유쾌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말해두지만 나는 그런 저급한 농담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진짜다. 나는 히데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냥 락밴드의 기타리스트인 줄 알았단 말이다.

    “둘 다 모였으니 묻는 말인데. 우리는 언제쯤 빠져야 될까?”

    걸음을 재촉하며 묻자.

    스칼렛과 루칸다가 저마다 고민하다 각자의 대답을 내놓았다.

    “현재 모험가팀이 둥지의 제4구역까지 도달했다고 들었습니다. 카타쿨라가 비장의 수를 꺼낸다면, 가장 깊숙하게 박힌 가시부터 걷어내려 할 것입니다. 저희는 그 순간을 노려서 퇴각하는 게 적기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지금까지 모험가팀을 지원한 건 그 경보를 울리기 위해서였으니까요.”

    루칸다의 견해는 지극히 정석적이었다.

    확실히 카타쿨라가 복구에 성공한 고대 병기를 운영하기 시작한다면,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모험가팀을 노리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둥지의 심부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페페가 카타쿨라를 처리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소설의 내용을 토대로 유추하자면…….

    ‘페페의 팀은 모두 죽겠지. 실제로 류시혁이 카타쿨라의 둥지에서 발견한 유골도 있었으니까.’

    페페의 모험가팀 전멸은 류시혁이 아리카 섬에 오게 되는 촉발 사건이기도 했다.

    수도에서 파견한 모험가팀이 실패했고, 그 뒷수습을 위해 류시혁을 아리카 섬으로 파견하는 것이니까.

    ‘반대로 생각하자면 페페와 동료들을 생존시키고, 카타쿨라를 처리한다면 류시혁이 이 섬에 오게 될 일도 없다는 건가?’

    모험가팀의 생존까지 고려하자면 이후의 대응이 애매해진다. 어쨌거나 다음 스칼렛의 의견도 들어보자.

    “지금일세.”

    “어?”

    “지금 바로 빠져야 된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텐즈 강을 넘어서 꽤나 깊숙하게 적의 영지까지 진격했네. 대단치 않은 보급선에 의존한 채 말일세. 적이 지닌 그 병기가 어느 정도 수준일지 가늠할 수 없지만. 고립된 상황에서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 적의 영지 내부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뒤늦게 퇴각을 하기 시작해도 병력을 괴멸시킬 수 있으며, 지휘관을 사로잡을 수 있는 지점까지 유인하고 있었던 것뿐이라면? 이런 가정은 어떤가?”

    꽤나 소름 돋는 가정이다.

    카타쿨라는 우리를 자신의 영지 깊숙한 곳까지 끌어 들이며 대략적인 병력의 규모와 수준을 가늠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별다른 수를 취하지 않는다는 건.

    ‘고대 병기로 비벼볼만한 놈들이라는 결론이 나왔겠지.’

    게다가 내가 퇴각을 제안해도 리제가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다.

    리제 휘하의 병력 대다수는 호족의 지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 많은 전리품과 영토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까지 따먹은 땅을 모조리 포기하고, 강 너머까지 도망치자고 제안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겠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어디까지 내다봐야 하는 것인가?

    “우리 동업자 아가씨가 언제 손을 털지 궁금하지 않냐?”

    “리제라는 그 인간 계집 말이군요.”

    루칸다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아니, 리제도 일단은 인간들의 영주다. 게다가 꽤나 기억에 남을 법한 캐릭터성도 갖추고 있지 않나?

    저렇게 엑스트라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을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애초에 암컷이란 수컷에게서 이성과 책임감을 제거한 결과물 같은 생물입니다. 그런 생물의 행동 원리를 논리적인 추론으로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루칸다 역시 스칼렛과 방향성은 다르지만 리제를 곱게 보고 있진 않았다.

    그 소리를 옆에서 들은 스칼렛이 킬킬 웃으며 비꼬듯 입을 열었다.

    “필멸종이 가축 밑에서 고생해서 그런지 깨달은 바가 많구만. 최소한의 학습 능력은 있는 모양이야.”

    “단명하는 만큼 배우는 것도 빠른 법이지. 징그러울 정도로 오래 살면서 가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말에 도달하는 어리석은 종도 어딘가에 있을 테니.”

    “너희들 그만 싸울래? 각하의 위장은 이미 벌집이야.”

    벌집이 된 내 위장을 살뜰하게 핥아줄 사람도 없을 텐데. 중요한 건 스트레스 관리였다. 이 빌어먹을 하꼬 둥지 운영을 되도록 오래 하고 싶으면 말이다.

    “내가 리제하고 만나서 얘기를 나눠볼 테니까. 루칸다는 모험가팀 동선 다시 확인하고, 스칼렛은 다음 보급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선 구축해 놔.”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 * *

    “누자베스. 솔직히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알고 있지?”

    “존나게 슬프게도 그러네.”

    리제는 배시시 웃으며 품속에서 담뱃갑을 꺼내 이쪽으로 던졌다. 담뱃갑을 낚아채서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

    고급스러운 버번의 향이 묻어나는 담배다. 인간 영주쯤 되면 이런 고급 기호품도 보급받을 수 있는 건가?

    다시 담뱃갑을 던져 돌려주자, 리제도 익숙하게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끼워 넣으며 말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나는 그냥 꼬리에 불이 붙은 개야.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이 앞으로 내달리는 게 전부거든.”

    “호족장들은 군대를 뒤로 물리면 기껏 얻은 토지를 버리는 것이라 생각하겠군.”

    “잘 아네. 그러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뒤로 물러나는 건 불가능해. 적어도 가시적인 구실이 하나 필요하지. 앞으로 내달리다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거나.”

    리제는 큭큭 웃으며 담배 연기를 뿜어냈지만.

    “몽둥이질 한 방에 뒤질 수도 있어.”

    “그럼 나는 거기까지겠네. 그것뿐이야, 누자베스.”

    “빌어먹을 동업자로군.”

    “지금까지 따라와준 것만 해도 감탄할 정도야.”

    반드시 나란히 걸을 필요는 없다.

    리제는 아마도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리제와 나는 공통의 타깃을 쫓고 있기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뿐이다.

    발걸음을 맞추며 사이좋게 걸을 만큼의 우정도 뭣도 없는 관계란 말이다.

    “그거 알아? 병사들 사이에서 네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던데.”

    리제는 문득 떠오른 듯 화제를 돌렸다.

    “왜? 전열에서 미친놈처럼 싸우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나? 나는 여자잖아. 우상화하기엔 폼새가 안 나지.”

    “남자로 태어났으면 더 바랄 게 없었겠군.”

    솔직한 심정이었다.

    리제가 만약 영주의 장녀가 아닌 장남이었다면, 아리카 섬은 내 개입 없이도 카타쿨라를 몰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리제가 전장에서 보여준 역량은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리제는 그런 내 말이 의외였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걸.”

    담배를 구두굽에 비벼 끄며 리제가 농담처럼 툭 내뱉었다.

    “이 몸뚱이로 거저 얻은 병력이 적지 않거든.”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여자라는 건 활용법에 따라 남자보다 유용한 법이지?”

    “확실히 가용 수단이 하나나 둘 정도는 더 있겠군.”

    “그래그래. 불평만 주절거리고 있는 것보단 주어진 환경을 활용할 궁리를 하는 게 낫다는 말이었어.”

    리제는 의자에서 일어나 이쪽을 등진 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무래도 농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누자베스. 나는 카타쿨라가 숨기고 있는 비장의 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전장이 내가 그토록 꿈꿔왔던 마지막 무도회장이야.”

    “그럼 나는 빠져주도록 하지.”

    무리하게 진격을 강행하다 카타쿨라가 파놓은 함정에 거저 걸려줄 의리는 없었다.

    리제도 이견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나 싶었지만.

    “둥지의 병력은 철수시켜도 돼.”

    둥지의 병력은 철수시켜도 된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자베스 너는 나랑 어울려 줄 거지?”

    절레절레.

    확고하고 명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들어봐. 만약 실패해도 관짝 두 개만 준비하면 되는 거잖아. 성공하면 병력의 손실 없이 카타쿨라의 비장의 수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고.”

    “아까 그거 담배가 아니라 무슨 대마초야? 완전 약 빨은 소리잖아!”

    카타쿨라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최소한 고대 병기에 속하는 흉기다!

    그것도 몇 기나 복구에 성공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둘이 그걸 다 쳐부수고 오자고?

    “좋은 생각 아냐?

    “아니, 아니아니. 아니아니아니! 절대 아냐! 뇌에 회충 돌았냐!”

    리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과장스럽게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고대 병기라고 하길래 기동하기 전에 모두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조금 솔깃…….”

    쿠웅!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포격음이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왔다.

    “염병할 놈들 질리지도 않고 또 왔군.”

    카타쿨라의 병력들을 상대할 시간이었다.

    다른 인간 세력과의 관계설정에 대해서 한번쯤 정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휘하에 들어오는 경우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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