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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72화 (7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72화

    미완성의 이 세계(1)

    “요즘 이놈 이거 왜 안 오나 싶었어. 영세업자의 고혈을 빨아먹는 이 모기 같은 첩자 새끼가.”

    “각하 왜 또 보자마자 그러십니까…….”

    “왜 그러긴. 반가워서 그러지. 이리 와, 길리도. 이 큐트한 씨봉새야.”

    씨봉새는 프랑스어로 ‘귀여운 아이’라는 뜻이다.

    결코 저급한 욕설이 아니니 검열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귀여운 아이들은? 씨봉새뤼다.

    ‘일본 학교에 다니는 귀여운 프랑스 아이들이 결석을 했다’라는 문장을 7글자로 줄이면?

    씨봉새뤼 갯새끼.

    뭐, 그냥 별 의미 없는 TMI다. 슬슬 원고를 쓰는 것도 힘겨워질 것 같으니 이런 독백이라도 넣어 두자는 내 나름대로의 배려다.

    미래의 내가 조금 더 편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신경 꺼라.

    “그래서 우리 길리도가 또 무슨 첩자질을 하려고 슬금슬금 기어 오셨나.”

    길리도가 쭈뼛거리며 내 앞까지 다가왔고, 녀석의 어깨에 팔을 툭 걸쳤다.

    “길리도 요즘 먹고 살만한가 봐? 아주 혈색이 좋아. 전보다 더 귀여워졌네. 누구는 카타쿨라 그 빌어먹을 놈이랑 피똥 싸며 나뒹굴고 있는데, 도대체 뭘 주워 먹었길래 이렇게 낯빛이 좋아졌을까? 누가 이렇게 혈색 좋은 놈을 흡혈귀라고 생각하겠어? 그치?”

    “각하…… 저도 요즘 아리카 섬의 균형이 무너지는 바람에 집에도 못 돌아가고 힘들어 죽겠습니다…….”

    “말에 가시가 있네.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거야 뭐야. 표정 봐라? 도대체 무슨 표정이지?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고 싶다는 의사표현인가?”

    “하…….”

    “하? 하아아? 넌 뒤졌다. 햄토리! 형아 빠따 가져와라! 이 모기 새끼가 감히 존귀하신 전쟁군주 앞에서 피 빨아먹고 트림하는 소리를 내? 하?? 하, 뭐?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까지 궁댕이 불나게 빠따질 당하고 싶다고?”

    “대모님! 대모님!!”

    “하핫! 오늘 스칼렛 없는데! 넌 뒤졌어.”

    “쮸, 쮸쮸!”

    “그래, 햄토리 이 새끼가 스칼렛 없는 날에 온 게 아주 제삿날이야.”

    요즘 스칼렛이 자꾸 길리도를 감싸고도니까 아주 기고만장한 것이다. 햄토리가 가져온 곡괭이 자루를 치켜들자, 길리도가 호다닥 뛰어 도망치며 소리쳤다.

    “아아악! 아악! 누자베스 각하! 죄, 죄송합니다! 이 미천한 것이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결례 씨를 왜 범했어!”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와 이젠 진짜 되는대로 막 내뱉네…… 끄가아아악!”

    카앙!

    길리도가 양팔을 들어 머리를 감싼 것과 동시에 곡괭이 자루가 휘둘러졌다. 그리고는 길리도의 머리 바로 옆의 벽면을 후려 갈겼다.

    “장난이야, 길리도. 너 패면 연맹 애들이 나 가만히 안 놔둔다며?”

    “예, 일단은…… 상해를 입힌다면 같은 방식으로 보복하는 게 연맹의 규율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그래서 오늘 심심해서 찾아왔을 리는 없고. 뭔가 할 얘기가 있겠지?”

    길리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상부의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에르바키나 연맹의 시트란테 서도 지부는 현시점부터 765호 둥지와 상호 협력적 관계를 구축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중졸이라 이해력이 딸리니까.”

    “연맹의 상품을 싼값에 외상으로 구매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지금까지 카타쿨라나 아비엥이 누려왔던 혜택을 나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길리도가 말했던대로 아비엥을 처리하여 초석 채굴장을 손에 넣고, 카타쿨라와 한 판 붙은 걸 연맹 내부에서 높게 평가한 모양이다.

    “아, 그리고 각하의 내규 등급이 상승한 덕분에 현재는 ‘플래티넘 클래스’의 고객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아니라 지부장의 직속 관리자가 각하를 모실 겁니다.”

    “오! 길리도 너 오늘 낯빛이 좋더라니, 드디어 나한테 해방돼서 그런가 봐?”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첩자 새끼야.”

    “어쨌거나 이 간 떨리는 첩자 짓도 오늘도 끝입니다.”

    길리도는 품속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건냈다.

    “111호 둥지. 카타쿨라의 최근 구매 품목 리스트입니다. 대륙제 공학 부품을 다량으로 매입하고 있습니다.”

    “왜? 둥지에 마찌꼬방이라도 차렸나?”

    그럴 리가 없다.

    하이브 마인드가 공학 부품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고대 병기를 발굴해냈군.”

    “예. 구매한 부품만 보고 무엇을 복구하려고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짐작할 수 있는 건…….”

    길리도는 구매 목록에서 ‘로스레프 광학 렌즈’를 가리키며 말했다.

    “로스레프 광학 렌즈는 화포와 관련된 병기에 들어가는 부품입니다. 그리고 여기 ‘유압식 피스톤’도 다량으로 구매했는데 보행 기동 병기의 부품으로 곧잘 들어가죠.”

    “포를 쏘면서 걸어 다니는 병기라는 말이잖아.”

    카타쿨라가 발견해낸 고대 병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발견한 게 무엇이든 간에 복구에 성공했고, 현재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라면.

    ‘젠장, 아리카 섬에서 죽치고 앉아 있던 이유가 있었군.’

    카타쿨라는 평화와 공존을 원하던 게 아니다.

    최대한 갈라우드와 협력하는 척을 하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이 섬을 차지했을 때 온전하게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다.

    ‘게다가 아리카 섬은 보물섬이나 다름없으니까. 카타쿨라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이 섬의 가치를 이해했다는 의미겠지.’

    이걸로 확실히 방향성이 정해졌다.

    내 안에서 리제보다 카타쿨라의 위협도가 확연히 오른 것이다.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될 상대는 카타쿨라였다.

    더 많은 고대 병기를 복구하는데 성공한다면 이쪽의 승산은 0%에 가까울 테니까..

    * * *

    “진짜 하이브 마인드였구나…….”

    그로부터 3일 뒤 고지 방어 병력을 일부 남겨놓고, 리제의 전초 기지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마물들의 등장에 놀라는 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루칸다에게 내 병사들이 사고를 치지 않도록 관리하라고 지시한 후. 다시 리제와 마주하자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전에는 뭐라고 생각했던 거야?”

    “하이브 마인드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냥 이렇게 마물들을 이끌고 온 걸 보니까 실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리제는 내 곁에 서 있는 스칼렛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애도 마물이야?”

    “그래 딱 봐도 흡혈귀잖아. 그리고 애가 아니라 내 둥지 최고령 어르신이지.”

    “흡혈귀! 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엄청 귀엽게 생겼잖아!”

    스칼렛은 리제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눈살을 찌푸리며 내 뒤로 숨었다.

    “시끄러운 계집은 질색일세. 주군의 명령이라 가축들과 협력을 하게 되었지만, 그다지 엮이고 싶진 않군.”

    “알았어. 귀찮게 못하게 할 테니까 그렇게 싫은 표정 짓지마.”

    스칼렛은 꽤나 고지식한 늙은이라, 이런 반응을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내게는 꽤나 살갑게 대하고 있어서 가끔 착각을 하게 되지만. 스칼렛은 기본적으로 혈통의 격이 맞지 않는 상대에겐 일말의 흥미도 주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이라니.

    마치 귀족집의 영애에게 지나가던 더러운 들개와 사이 좋게 지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실제로 귀족집의 영애는 리제지만.’

    어쨌거나 오늘 이 주둔지를 찾아온 건 3:3미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적인 친분을 쌓을 생각도 없다.

    그저 가장 큰 위협을 서둘러 링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일시적 협력을 하려는 것뿐이다.

    “저번에 받은 제안을 수락할 생각이다만. 혹시 조건이 바뀌었나?”

    “언제든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어.”

    리제는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을 붙잡아 가볍게 흔들어준 후 말했다.

    “그나저나 병력이 꽤나 늘어났는데?”

    “영주의 병력이란 결국은 호족의 지원에 의해 생겨나는 거니까. 일전의 전투 결과를 들은 호족장들이 뒤쳐지기 싫어서 너도나도 앞다퉈서 병력을 보내기 시작했거든.”

    어림잡아 헤아려 봐도 2천이 훌쩍 넘는 규모다.

    물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직업 군인의 수는 적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몸집을 불린 군대는 충분히 위협이 된다. 맞다이든 전쟁이든 체급이 깡패니까.

    “오늘 저녁쯤에는 병력의 수가 3천여 명이 될 거야. 아마 그쯤이면 보급로도 확보되어서 다음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겠지.”

    “내가 늦지 않게 온 모양이군.”

    하지만 리제는 어째선지 전투복 차림이 아니었다.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시골 소녀처럼 가벼운 천옷을 걸치고 있었다.

    푹 눌러쓴 밀짚모자와 어깨에 걸치고 있는 낚싯대가 전장의 풍경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그 차림새를 쳐다보고 있자, 리제가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모처럼 텐즈강 근처까지 왔으니까 낚시라도 다녀오려고 했거든. 저녁까진 병사들도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조치해 뒀고.”

    그러더니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누자베스도 같이 갈래? 낚싯대는 하나 더 만들면 되니까.”

    “아니, 나는…….”

    바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스칼렛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다녀 오게.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느긋하게 쉴 수 없을 테니.”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낚시보다 리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만들어낸 불완전한 존재.

    그 피조물이 어떤 식으로 이 세계의 섭리에 맞춰져 완성되었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 * *

    내 기대와 달리 리제는 순수하게 낚시를 즐기려는 모양이었다.

    신발을 벗고, 치마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후 강으로 발을 들였다. 녹색을 띈 탁한 강물은 그다지 수질이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무 그늘 쪽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비스듬히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따스한 봄바람이 청명한 하늘을 가로질렀다.

    낮잠을 즐기기에 딱 좋을 정도로 포근한 햇살이 강의 수면에 반사되어 반짝였고, 리제는 무릎이 수면에 닿는 지점에서 멈춰 서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누자베스는 안 들어와? 물이 적당히 시원해서 기분 좋아.”

    “미안하지만 하이브 마인드는 방수 기능이 없어서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네.”

    “그래?”

    리제는 싱긋 웃으며 능숙한 솜씨로 낚시바늘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갑각류 벌레를 끼웠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자.

    리제가 문득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누자베스 넌 어떤 세계에서 온 거야?”

    “…….”

    리제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눈빛과 표정을 숨기려는 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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