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71화
공투(3)
“최선의 결과 노리는 것보다 최악의 결과를 소거하는 걸 우선해야지?”
리제는 천막의 한쪽 벽면에 걸린 지도 앞에 섰다. 지도에는 아리카 섬의 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절구통 형태의 이 섬은 북쪽과 남쪽에는 험준한 산악 지대, 혹은 울창한 숲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북쪽과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중앙 지대는 동쪽에서 서쪽을 가로지르는 ‘텐즈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동쪽 상류 쪽에는 저수지가 위치해 있었고, 강의 주변에는 넓은 평야 지대가 존재했다.
강의 북쪽은 765호 둥지.
즉 내 영토였고. 남쪽은 111호 둥지 ‘카타쿨라’의 영토다. 그리고 이번 전투의 결과로 리제 역시 서쪽 지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완벽하게 3등분 된 상황이었다.
“내가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카타쿨라가 아리카 섬의 통일에 성공하는 거야.”
적어도 카타쿨라보다는 인간들에게 우호적인 내가 차악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누자베스 네게도 카타쿨라가 우세를 점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겠지?”
“확실히. 그건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은 아니군.”
“이 섬에서 인간 영주와 하이브 마인드가 공존한 전례는 있어. 하지만 큰 세력을 갖춘 두 하이브 마인드가 경계를 맞댄 채 사이 좋게 지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내가 아리카 섬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면, 카타쿨라가 아닌 리제를 밀어주는 편이 낫다는 얘기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쥐꼬리만 한 섬을 나눠 먹어 봤자…….”
“아니. 실재의 영지 분배의 얘기가 아니야.”
“부디 헛소리를 해서 내 성질을 건드리지 않길 바라지.”
혹여나 자신이 아리카 섬을 차지하고 내게 부수적인 무언가를 대충 던져준다는 얘기라면 들어볼 가치도 없다.
“아리카 섬을 통일하는 건 갈라우드 가문이 될 거야. 아리카 섬에서 살아남은 하이브 마인드는 한 마리도 없게 되는 거지.”
리제는 내 표정을 살피며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니까.”
“계속 말해봐.”
“단순한 가능성의 이야기인데. 누자베스 넌 아리카 섬을 점령하면 끝이라고 생각해?”
리제는 지도 바깥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본도의 군대가 아리카 섬을 되찾기 위해 나선다면? 이런 벽도를 점령한 게 고작인 하이브 마인드가 섬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리카 섬은 해상 요새와 같은 섬이다. 방위 설비만 제대로 갖춘다면 어지간한 병력으로는 상륙조차도 불가능하겠지.”
“오, 그래? 그럼 용사는 어때?”
“용사?”
이건 꽤나 예상치도 못한 단어를 듣게 되었다.
리제가 용사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니?
‘첫 번째 용사인 류시혁이 소환되기까지 앞으로 2개월이 남았는데.’
슬슬 타임 아웃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아리카 섬을 점령해서 요새화하지 않는 이상 생존 가능성은 희박했다.
“왕정파에서 이계의 용사를 소환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잖아? 소문의 진위는 둘째로 치더라도, 이 지루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취하려 할 거야. 그런 움직임이 과장되고 와전되어서 용사를 소환한다는 식으로 퍼진 것이겠지.”
“그런 전설 같은 얘기는 믿지 않는 편인데.”
어쨌거나 리제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내가 아리카 섬을 차지하게 되더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위협도가 증가하여 인간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둥지로 쳐들어오게 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설마하니 이 쥐꼬리만 한 섬을 차지하는 걸로 만족할 셈은 아니지?”
“글쎄. 생각보다 살기 좋은 곳이면 아주 눌러 앉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 농담은 재미없었어, 누자베스.”
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제안을 종합했다.
“내가 아리카 섬을 통일시킬 수 있게 도와줘. 카타쿨라를 제거하는데 성공만 한다면 나머진 큰일도 아니거든.”
“그 보상으로 내가 받을 수 있는 건?”
“수도의 감시가 닿지 않는 완벽한 은신처의 제공. 그리고 본도 진출에 필요한 군수 물자는 가능한 선에서 지원할게. 꽤나 파격적인 지원 아냐?”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아리카 섬은 표면적으로 갈라우드 가문의 리제가 통일시킨 섬이 된다. 나를 비롯해서 카타쿨라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리제의 뒤에 숨어 본도 진출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여기서 만족하고 느긋하게 여생을 보낼 수도 있지.’
류시혁이나 백주월 같은 용사가 하이브 마인드가 없는 이 섬에 구태여 찾아올 리도 없고 말이다.
“내 제안은 이걸로 끝이야. 더 묻고 싶은 얘기라도 있어?”
“어째서 제안의 상대가 이쪽이지? 카타쿨라에게도 같은 제안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그렇게 묻자.
리제는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시선을 마주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비에 젖은 짐승의 체취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역겨운 냄새.
마치 자기혐오와 닮은 악취였다.
“나는 네가 좋아, 누자베스. 나랑 너무 닮았거든.”
리제는 그렇게 말하며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리제의 눈동자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내가 마주하고 있었던 것은 짐승의 눈이었다.
그래.
이 녀석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이다. 성격이 파탄난 신이 변덕처럼 빚어낸 결함 덩어리의 피조물이다.
인간으로써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모든 부품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평생을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저열한 방식으로 비루한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짐승이란 말이다.
“우리 같은 놈들을 위해 지옥이 원리주의자들의 헛소리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루칸다에게 일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추상적인 이야기였던 터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용서받을 권리조차 박탈당한 짐승이란 저런 눈을 하고 있는 것이다.
* * *
이야기를 끝마친 후 리제는 나를 쉽사리 풀어줬다. 오히려 내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호위 병력까지 붙여서 말이다.
고지의 전초 기지에 돌아오자 루칸다의 모습이 보였다.
“오, 루칸다! 우리 루칸다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각하는 루칸다 네가 없어서 아주 뒤질 고생은 다 하고 온 참인데.”
“스칼렛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또 꽤나 무모한 짓을 하신 모양이군요.”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내 삶 자체가 그냥 무모한 짓이야. 배양막 뚫고 나온 순간부터.”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궐련을 꺼내 내 입술 사이에 끼워 넣었다.
“카테라도는 어떻게 됐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묻자, 루칸다도 파이프에 담뱃잎을 채워 넣으며 대답했다.
“순조롭게 제압을 끝마쳤습니다. 예상치도 못하게 고대 병기가 하나 있었던 탓에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만.”
“수고했다. 이제 코볼트 작업대를 파견하면 되겠군.”
페쉬나이트는 류시혁이 소환되는 2달 뒤까지 철괴로 재련하여 비축할 셈이었다.
“고대 병기 쪽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우리가 복구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겠지?”
“저 역시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지만, 시간과 자원이 상당히 드는 작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단은 아리카 섬 쪽에 집중하자고.”
“예, 각하.”
루칸다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려 몇 번이고 부싯깃을 긁다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인간들의 시체가 담긴 배 한 척이 카테라도 해변 근처에서 발견되었기에 수색을 했습니다만.”
“카테라도에?”
“예. 얼굴을 긁어낸 후에 불로 태운 시체들입니다. 이런 식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건 인간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 시체들이 누군지 식별할 길은 없나?”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만…… 이것 역시 시간이 걸리겠군요.”
“그러냐.”
나란히 앉아 텐즈 강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봤다.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토해내다 문득 리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루칸다.”
“또 무슨 얘기로 저를 곤란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런 거 아냐, 인마.”
궐련을 대충 바위에 비벼 끈 후 말했다.
“용서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놈은 어떻게 해야 다시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거냐?”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 누구도 권리의 박탈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평생을 속죄하며 극히 희박한 구원의 확률을 바라보며 사는 것뿐이죠.”
“그렇게 착하게 살다보면 용서받을 수도 있고?”
내가 묻자, 루칸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이다.
“그저 자기 위안일 뿐입니다. 박탈당한 권리를 되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루칸다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등쪽에서 갑자기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거의 동시에 서늘하고 가느다란 팔이 내 목을 감쌌다.
“우리 주군이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로군. 그런 쪽의 이야기는 이 늙은이가 더 박식할 텐데.”
“스칼렛? 뭐야, 언제 나왔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둘이서 무슨 흉계를 꾸미나 궁금해져서 나와 봤네.”
스칼렛은 쿡쿡 웃으며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 내 앞에서 형체를 드러냈다.
“확실히 신에게 박탈당한 권리는 되찾을 수 없네. 어디까지나 극히 적은 확률이기에 현실적으로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뭐야, 그럼 루칸다의 말이 맞았잖아?”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닐세.”
스칼렛은 폴짝 뛰어 내 무릎 위에 걸터앉더니, 고개를 들어 이쪽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꽤나 짓궂은 표정으로 말이다.
“신을 죽이는데 성공한다면 그깟 권리 하나나 둘쯤 박탈당한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겠지.”
“그 말은 즉…….”
“초극에 도전하는 것일세.”
신이 규정한 섭리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
꽤나 얄궂은 플롯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주인공의 이야기로 쓰기엔 끝맛이 더러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