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68화
삼파전(4)
“커억!!”
“카학!”
비명 소리가 연쇄하듯 울려 퍼졌다.
오크 전사들은 중장갑으로 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픽픽 쓰러져 나갔다.
그것도 단 한 마리의 하이브 마인드에 의해 말이다! 누자베스의 검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했다.
마치 그 자리에 휘둘러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갑옷의 이음새나, 장갑이 얇은 쪽을 노리고 있었다.
누자베스의 스킬인 ‘크랙 펠론 렌드마이어’의 효과가 발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병기의 숙련도를 큰폭으로 증가시키는 고유 스킬.
류시혁이 사용하는 ‘펠론 렌드마이어’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지만. 그 새 발의 피 수준만으로도 일대의 오크 전사들을 공포에 전율하게 만들 수 있었다.
“크아아아!”
누자베스가 전방의 오크를 향해 검을 휘두른 것과 동시에 후방에 빈틈이 생겨났다.
사방을 포위한 채 달려드는 오크 전사들에겐 이러한 호기가 몇 번이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상대하기는 힘들다.
하물며 기본적으로 나약한 육체를 지닌 하이브 마인드가 사방을 포위당한 채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다섯 마리의 오크 전사가 동시에 누자베스의 등을 향해 몸을 날린 순간!
터엉!
2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방패가 허공에서 떨어져 누자베스의 등을 보호했다.
오크 전사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아니다.
전투가 개시되고 오크 전사들은 저 거대한 방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콰과과광!!
일대를 뒤흔들 정도의 충격과 굉음이 누자베스의 등뒤에서 울려 퍼졌다.
달려들던 오크 전사들은 고기 파편이 되어서 허공에 흩뿌려졌다.
박격포 포격!
누자베스의 지휘에 맞춰 ‘비비큐 클럽’이 박격포를 쏘고 있는 것이다.
전투를 수행하며 거의 동시에 마인드 모드로 포격 위치를 쉴 새 없이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포탄의 발사와 착탄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여 방패를 소환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후방의 빈틈이란 누자베스가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함정일지도 모른다.
‘저것이 북동부의 전쟁군주……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까다로운 상대가 되겠군.’
오베론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누자베스의 전투를 지켜봤다.
마치 피에 홀린 악귀나찰과 같은 모습이다.
하이브 마인드가 전쟁에 특화된 합성생물이란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순수한 살육에 특화된 생물체처럼 보였다. 전쟁 따위의 개념보다 훨씬 상위에 위치해 있는 원초적 폭력과 파괴의 화신이다.
‘베놈 복구 작업이 조금만 늦었어도 위태로웠겠어.’
감탄과 동시에 오베론은 섬뜩함을 느꼈다.
카타쿨라가 아키라 섬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누자베스를 목격한 후 생각을 고쳐 먹을 수밖에 없었다.
누자베스의 등장이 조금만 더 빨랐어도 111호 둥지는 명운을 걸고 전력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의 가정이다.
이미 111호 둥지는 베놈을 다섯 대나 복구한 상황. 제대로 싸운다면 누자베스에게 승산 따윈 없을 것이다.
‘만약 765호 둥지가 111호 둥지에 합병당한다면?’
오베론은 카타쿨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되도록이면 누자베스를 죽일 리 없었다.
저 정도로 우수한 하이브 마인드는 생포하여 둥지의 지휘관으로 삼는 게 정답이니까.
허공에 치솟은 무수한 수의 핏방울을 헤치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누자베스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안타깝군, 안타까워. 태어난 시기와 장소가 좋지 않았어. 다른 곳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밤의 어머니께 사랑받을 만한 전쟁군주가 되었을 터.’
더더욱 이 자리에서 누자베스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생겨났다.
그리고 누자베스 역시 점점 체력이 고갈되어 가는지 움직임이 느려지고, 반응이 둔해지고 있었다.
“오베론. 물러나야 할 때다.”
22방위대의 대장 호즈칸이 오베론을 향해 말했다. 호즈칸은 트롤 전사 중에서도 눈에 띌 만큼 거대한 체구를 지닌 챔피언이었다.
“아직, 아직이다. 호즈칸 이 자리에서 765호 둥지의 관리자를 처리해 둔다면 이후의 행보는 더욱 간단해지지 않겠나?”
“영주의 군대가 도착할 것이다.”
“나도 알고 있네, 호즈칸.”
“병력의 손실이 이 이상 커진다면 카타쿨라 각하께서도 간과하시지 않을 것이다.”
“뭐든 얻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법이지. 이곳에서 765호 둥지의 관리자를 처리한다는 공적을 세운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호즈칸은 오베론의 시선을 쫓았다.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숨을 헐떡이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누자베스가 똑똑히 보였다.
“앞으로 10분 더 기다려주지. 그 이상 지체하려 한다면 방위대가 먼저 퇴각하겠다.”
“고맙군. 운 좋게 먹게 된 만찬을 혼자 즐기게 해줘서.”
호즈칸은 작게 혀를 차며 오베론의 곁을 떠났다.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 노인이었다.
* * *
“시릴스. 나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거 같아. 만져 볼래? 시, 싫으면 싫다고 하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어쨌든 그 늙은이들 다시는 만나기 싫어, 너무 긴장해서 밥을 입으로 넣었는지 아래 입으로 넣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 하핫!”
“……아가씨.”
“그냥 웃자고 한 농담이야. 아래로 넣었으면 당연히 알지. 내가 얼마나 잘 느끼는 체질인데.”
리제는 싱긋 웃으며 구릉지의 언덕에서 텐즈 강 너머를 바라봤다.
“텐즈 강의 북쪽 고지는 765호 둥지의 병력들이 차지했고. 남쪽의 평야는 111호 둥지의 병력이 점거하고 있었지만.”
방금 전의 충돌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쪽 평야를 점거하고 있던 방위대의 병력이 퇴각을 개시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오크 중장갑 부대.
어림잡아 800마리 남짓한 규모다.
리제는 잠시 신음하며 가슴에 덧댄 강철 플레이트를 손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근위대가 400명. 지원받은 보병이 800명.’
대략적으로 1200의 병력이다.
일반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 보병 셋은 중장갑 오크 한 마리에 해당한다.
그런 식으로 계산하자면 800대400의 싸움.
거의 두 배가 차이나는 전력이다. 근위대의 훈련 수준이 일반 보병보다 조금 더 낫다고는 해도 말이다.
리제는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뒤에는 전투 개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1200의 병력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리제를 향하고 있었다.
불만과 불신의 눈빛이다.
전쟁 경험은 커녕 마물과 싸워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소녀가 자신들의 생사를 쥐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계집의 명령이라니?
기회만 있다면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도망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리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네.’
탈주병은 군법으로 즉결처형에 해당한다.
그런 식으로 윽박질러 꾸역꾸역 전장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리제는 호족회에서도 인정한 정식 영주였으니까.
리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아르테간트를 손끝으로 훑으며 작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병사들의 앞으로 걸어가 모두의 시선 앞에 당당히 섰다.
‘기선제압을 할 작정이군.’
‘초짜 야전 지휘자들이 곧잘 하는 짓이지.’
‘정신나간 계집년한테 끌려나와서 곧 죽겠구나.’
‘자기 아비한테 버림받아서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아무리 악을 쓰고 겁박을 해봐라. 눈이나 꿈쩍하나.’
병사들은 삐딱하게 서서 리제를 바라봤다.
조시네스가 지원한 병사들 뿐만이 아니라, 갈라우드 가문의 직계 근위대 병사들 역시 리제를 불신하긴 마찬가지였다.
리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잘 부탁합니다!!”
병사들 앞에서 기세 좋게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러는 와중에 리제는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목숨을 한동안 맡게 된 야전 지휘관 리제입니다. 일단은 임시로 영주 자리도 맡고 있긴 하지만, 그런 복잡한 얘기는 나중에 차차 하죠.”
리제는 사열된 병사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어라, 이런 어린 계집이 야전 지휘관이라고? 계집애의 명령에 따라 진격해야 된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목소리에는 당당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병사들이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를 먼저 발견한 것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진격을 명령하지 않겠습니다. 희생을 강요하지도 않겠습니다.”
리제는 다시 돌아서며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직접 선봉에 서겠습니다. 용맹하신 신사분들은 어린 계집의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오시면 됩니다.”
꽤나 도발적인 언사였다.
하지만 선봉에 서는 지휘관은 언제나 병사들의 신뢰를 얻는다.
“그리고 결과는 명백할 것입니다. 공적에 따른 분배 역시 명확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명령에 따를 수 없는 분들은 여기에 남아도 됩니다.”
리제는 잰걸음으로 사열된 병사들 사이를 빠져나와 전열의 앞으로 섰다.
“아, 한 가지 말씀드리는 걸 잊었습니다만.”
휘릭.
경쾌한 발걸음으로 뒤로 돌아서자.
갈라우드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가 서풍에 나부꼈다.
화살과 삵.
갈라우드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아리카 점령전 때 마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깃발의 문양이기도 했다.
“그 어떤 경우도.”
리제는 아르테간트를 뽑아 들었다.
세공된 유리처럼 투명한 검신이 석양의 붉은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갈라우드는 적보다 먼저 쓰러지지 않습니다.”
리제의 눈빛은 이미 천진난만한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나이브하지도 않았고, 하물며 순진무구하지도 않았다.
아리카 섬에 오랜 전설처럼 전해졌던 ‘선봉창’의 가계. 갈라우드의 피를 짙게 이어 받은 우두머리의 눈빛이다.
“시릴스, 레오번. 일단은 병력의 지휘를 일임해 둘게. 그럼 뒤를 잘 부탁해.”
리제는 지면에 꽂아두었던 갈라우드의 깃발을 왼손으로 뽑아 깃대를 어깨에 걸쳤다.
“아, 아가씨 잠시만요! 진심입니까!?”
“아가씨!!”
두 사람이 리제를 말릴 새도 없었다!
리제는 구릉 지대를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의 오크 전사들이 밀집해 있는 저 ‘지옥’이 처음으로 피를 흘릴 무도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