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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67화 (6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67화

    삼파전(3)

    [누자베스 : 이야, 저기 지휘자 누구냐? 그래도 어깨 위에 뭔가 달린 새끼 같은데?]

    누자베스는 텐즈 강을 넘어오고 있는 중장갑 오크 무리에서 시선을 돌렸다.

    오베론의 오크 부대는 아직까지 머스킷의 사거리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비비큐 클럽의 박격포 사거리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설령 텐즈 강이 가로막고 있지 않았더라도 고지에 도달할 때까지 쉴 새 없이 박격포 포격을 받았을 것이다.

    강을 도하하느라 가뜩이나 진격 속도가 느려진 탓에 부대의 피해는 급속도로 커져갔다.

    [누자베스 : 강을 건너는데 성공한 놈들은 숨을 헐떡이며 이쪽 고지를 공격하려 하겠지.]

    하지만 이미 200마리 이상의 구울 머스킷티어가 참호를 파놓고 방어선을 구축해 놨다!

    머저리처럼 도끼를 치켜들고 돌격해 오는 원시 병력 따윈 순식간에 벌집 확정이란 말이다!

    나머지 650여 마리의 구울은 스칼렛의 지휘 하에서 강 너머에 위치한 111호 둥지의 보급 기지를 점령한다.

    누자베스가 고지의 수비를 맡아 오베론을 상대하는 동안, 스칼렛이 111호 둥지의 방위 병력을 격파한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오베론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100여 마리의 오크를 우회시켜 고지의 우측에서 접근시키고 있었다.

    ‘별동대를 운영해서 곡사 화기를 무력화시킨다는 건 정석 중의 정석 같은 싸움법이지만.’

    안타깝게도 누자베스는 전쟁에 특화된 합성생물인 ‘하이브 마인드’였다.

    병력이 전개된 전장의 전경은 손바닥에 펼친 것처럼 훤히 볼 수 있었다. 병력의 시각과 청각을 통해 수집된 모든 정보가 한 장의 지도처럼 펼쳐져 있었으니까.

    게다가 박격포 부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참호는 원형이다. 어느 쪽에서 공격을 받아도 사각은 없었다.

    [누자베스 : 뭔가 좀 너무 쉬워서 꺼림칙하네. 어떻게 생각해, 스칼렛?]

    [스칼렛 : 상대도 하이브 마인드의 챔피언이라면 ‘마인드 모드’라는 능력을 모를 리가 없을 터.]

    대놓고 정답이 적힌 문제지다.

    눈에 보이는 정답을 고르기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너무 쉬운 난이도가 누자베스의 뇌리를 간지럽혔다.

    불길한 촉이다.

    가벼운 무장을 한 별동대가 우회해서 곡사 화기를 노린다는 생각할 수도 있었다.

    ‘단순히 주의를 끌 생각 인가? 진짜 노림수는 따로 있나?’

    이럴 때 루칸다와 비르겐슈타인 부대가 있었다면 대응이 한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루칸다와 휘하 부대는 카테라도를 정리하기 위해 원정에 나간 상황. 누자베스와 스칼렛 둘의 힘만으로 이번 전투를 끝마쳐야만 했다.

    [누자베스 : 이건 꼭 그거 같다? 가위바위보 할 때 꼭 먼저 ‘나는 바위 낼게!’ 같이 헷갈리는 선언하고 하는 얌생이 새끼들이 있잖아.]

    그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누자베스는 잠시 마인드 모드를 종료한 후 육안으로 전장의 흐름을 살폈다.

    [스칼렛 : 그래서 그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상책인가?]

    낌새를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전쟁군주로써 성장하며 함께 발달한 직감이 이 전투의 승패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패배였다.

    이번 전투는 싸우기 전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 누자베스는 빠르게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상대의 수를 믿든, 믿지 않든.

    어느 쪽을 택하든 패배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럴 땐 포기가 빠른 쪽이 피해가 적은 법이다.

    [누자베스 : 그래도 다시는 가위바위보 못하게 손목을 분질러 줘야지.]

    누자베스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누자베스 : 스칼렛! 병력의 절반은 고지 수비로 돌리고, 나머지는 별동대를 타격한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 * *

    타다다당!

    격발음과 함께 산을 오르던 중장갑 오크들이 픽픽 쓰러졌다.

    “캬아악!”

    “크락!!”

    번쩍이는 금속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오크 전사들은 눈에 띄는 표적이었다.

    그에 비해 진녹색 염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쓴 구울들은 상당히 은밀하게 숲속을 이동할 수 있었다.

    “젠장, 젠장!! 개자식들! 암컷처럼 숨어 있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

    전우들이 쓰러지는 걸 뒤에서 목격한 오크가 흥분해서 앞으로 뛰쳐 나왔다.

    허공에 도끼를 휘두르며 기세 좋게 소리친 것까진 좋았으나.

    탕!

    “칵!!”

    바짝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뛰쳐나와 소리까지 질렀으니 당연한 결과다.

    확연한 온도차.

    구울 머스킷티어들은 이미 죽어서 흡혈귀에게 의식을 지배당하고 있는 마물이다.

    머리를 파괴당하지 않는 한 불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구울의 큰 장점 중 하나였지만.

    감정이 일절 없다는 것 역시 구울의 장점이었다.

    겁에 질리지도 않고, 패닉에 빠지지도 않는다.

    반대로 흥분하거나 분노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저 흡혈귀의 명령대로 지시받은 임무를 수행할 뿐인 것이다.

    “녀석들을 조종하고 있는 흡혈귀가 있을 것이다! 흡혈귀를 찾아 먼저 죽인다!”

    전술 부사관 그로카가 경사면에 엎드린 채 주변을 살폈다.

    이 정도 규모의 구울 부대라면 흡혈귀는 반드시 근처에 있을 것이다. 어지간히 영적 위계가 높은 흡혈귀가 아니라면, 상당한 거리에서 이 정도 규모의 구울 모두를 의식 간섭을 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냄새를 쫓으려고 해도 흡혈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환장하겠군. 도대체 얼마나 더 버텨야 되는 거야?’

    그로카는 오베론의 명령을 되새기며 혀를 찼다.

    도대체 무슨 비책이길래 이런 작전을 지시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그저 병력의 낭비에 불과하다.

    용맹이나 희생 같은 단어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란 말이다.

    “아아, 그랬군. 더러운 첩자가 섞여 있었던 것이로군. 나도 이 진격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일세.”

    “그래!! 근접 병력만으로 고지를 향해 진격하는 것 자체가…….”

    그로카가 대답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뇌가 녹아내릴 만큼 달콤했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소리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가운 미성이었다.

    그로카는 후다닥 물러나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자.

    “뭘 그렇게 놀라나, 흡혈귀는 처음 보나?”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수면 위에 부유해 있는 기름방울처럼 이질적인 분위기가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따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스칼렛은 머스킷의 총구를 그로카의 미간에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이 해괴한 명령을 내리기 전에 네 지휘자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죽여라……! 나는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

    스칼렛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그로카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말이다.

    “고맙네, 드디어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군.”

    타앙!

    그로카의 머리가 탄환에 꿰뚫렸고,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스칼렛은 머스킷을 거칠게 휘둘러 탄연과 핏물을 털어냈다.

    “설마 우리 주군이 이 늙은이보다 먼저 퍼즐을 완성한 건 아닐 테고.”

    스칼렛은 텐즈 강 너머에서 퇴각을 준비하는 오베론과 오크 부대를 바라봤다.

    그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는 검은 그림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단순히 직감만으로 이런 판단을 내린 거라면 자질이 있는 것이로군.’

    수천 번의 전장을 경험해 본 스칼렛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결국 전장에서 압도적인 승률을 자랑하는 녀석은 지능이나 전술적 재능. 혹은 무력이나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련함이 우월한 놈이 아니다.

    그저 불공평할 만큼 전쟁의 여신에게 사랑받는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누자베스는 전쟁의 여신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

    “오호.”

    오베론은 강을 너머 퇴각하는 765호 둥지의 병력을 바라보며 감탄을 삼켰다.

    언제,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765호 둥지의 관리자는 현시점에서 도출해 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택했다.

    지금의 퇴각은.

    약간의 피해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이번엔 손을 떼겠다는 제스처였다.

    “이래서야 이 노인네가 스스로 미끼를 자처한 보람이 없군.”

    오베론은 끌끌 웃으며 고삐를 쥐었다.

    두 시간도 채 지속되지 않은 탐색전은 끝이 난 것이다.

    이걸로 오베론은 ‘누자베스’라는 둥지 관리자의 기본적인 기량을 확인했다.

    북동부의 패자 아비엥을 꺾고 올라선 신예 전쟁군주. 그 평가에 흠이 생길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자, 그럼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지.”

    현재 텐즈 강 너머를 지키고 있던 22방위대의 부대장 ‘호즈칸’에게도 이야기는 끝내 놓았다.

    오베론의 오크 부대와 호즈칸의 방위대는 이 곡창 지대를 공터로 만들어 놓는다.

    그 공터에 완충재가 들어와 자리를 잡을 것이다.

    구태여 111호 둥지의 병력이 765호 둥지의 병력과 충돌하며 지루한 소모전을 할 필요는 없었다.

    현재 가장 필사적이어야 하는 쪽은 따로 있었으니까.

    오베론이 시간을 잰 뒤 전장에서 물러나려던 찰나.

    “어디 가려고? 어지간히 바쁜 일이 아니면 좀 더 놀아주고 가는 게 어때?”

    타닷!

    오베론의 귓가에 누자베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지면을 박차며 도약하는 소리가 울렸고!

    촤악!

    “크어억!!”

    허공에 그려진 은빛의 궤적은 정확하게 오베론의 목덜미를 향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몸을 날린 오크 전사가 누자베스의 검격을 몸으로 막아냈다.

    “넌 뒤졌어. 이 구역에서 내 성깔 건드리고 멀쩡히 숨 쉬고 있는 새끼는 없거든.”

    “맙소사, 전쟁군주가 호위 병력도 없이 적진의 한가운데까지 돌격해온 것인가?”

    오베론은 순수한 의미로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자베스라는 개체가 얼마나 이례적인 케이스인지 실제로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런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만큼 현명하진 않군.”

    오베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크 전사들이 누자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누자베스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수백 마리의 오크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무서운 기세로 거리를 좁혀오는 오크 전사들을 슥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슬슬 놀아보자고, 두르난. 모조리 직화구이 페티로 만들어주마.”

    카앙!

    누자베스는 날이 나간 검을 버리고, 새로운 검을 허공에서 뽑아냈다.

    겁을 먹거나, 주눅이 든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여유롭고 태연한 모습이다.

    오베론은 눈을 크게 뜨며 누자베스를 응시했다.

    ‘이쪽에게도 시간 제한이 걸려 있다는 걸 간파하고 있다는 건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어느 정도까지 통찰한 것인지 어림짐작으로 상상해볼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건 도출된 결과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저 베짱과 실행력.

    만약 이 섬에 카타쿨라가 없었다면 일찍이 아리카 섬을 통째로 집어 삼켰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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