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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65화 (65/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65화

삼파전(1)

리제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자.

이미 저택의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하인들이 웅성이는 소리.

경직된 분위기에 뒤섞인 어수선함.

몇몇 이들의 눈동자엔 이미 선명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리제는 귀족 가문의 영애답게 다소곳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하인들은 리제를 발견하고는 입을 멈췄다.

그 무리 중에서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집사 레오번이었다.

“아가씨…… 진정하시고 들으셔야 합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스러워?”

“영주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리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레오번이 이어 말하길 기다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님께서 사라지시다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파오루 님께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오번은 잠시 말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간밤에 배가 한 척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고용했던 항해사도, 하인 몇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사실만을 나열해 놓고 봐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추론하기 어렵지 않았다.

레오번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주와 그의 장남이 섬에서 도망쳤다.’

그런 얘기였다.

영주와 그 장남이 간밤에 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갔다는 정황상의 증거는 충분했다.

리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주변을 둘러봤다.

공포에 질린 자도 있었고, 리제를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자도 있었다.

영주가 영지를 버리고 도망칠 만큼 상황이 악화된 것이다. 아무리 갈라우드가 타고난 겁쟁이라도 영지를 버린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국왕에게 하사받은 영지를 버린다는 건 귀족의 지위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영지를 버려야 될 만큼 가망이 없다는 소리잖아.”

“어째서 아가씨는 데리고 가시지 않은 거지?”

“가엾게도…….”

“하이브 마인드의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방위전을 준비해야 되는 거 아냐?”

“멍청한 놈! 농번기에 모두 성에 틀어박혀 있으면 올해 다 굶어 죽어!”

하인들은 저마다 불안 섞인 말들을 토해냈다.

리제는 레오번을 대동하여 저택의 밖으로 나섰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기에 성채의 전경과 그 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농작지가 한 눈에 보였다.

“레오번. 아버님께선 도망치신 게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가씨. 영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을 리 없습니다.”

“강대한 하이브 마인드가 두 마리나 나타났으니 우리의 힘만으론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겠지. 그러니까 그저 원군을 요청하러 본도로 가신 것뿐이야.”

리제는 성채를 나서 밭에서 분주하게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영지민들을 둘러봤다.

평생 흙을 만지며 살아온 이들이다.

씨앗을 뿌리고, 작물을 거둬들이며 사는 걸 삶의 전부라 여기며 사는 소탈한 이들이었다.

농민들은 리제를 알아보고는 손을 멈추며 고개를 조아렸다.

“레오번. 어째서 아버님께서 나를 데려가지 않았는지 알겠어?”

“그건 저도 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장남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장녀인 리제를 버릴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작은 쪽배로 도망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백성들을 위해 흘러야 할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지.”

고결한 피는 낮은 곳에서 가장 먼저 흐른다.

글로레나 왕조의 신조였고, 모든 왕족과 귀족들은 그 신조를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었다.

“고결한 자의 피는 백성들의 눈물을 대신한다. 그런 말이잖아?”

리제는 작게 읊조리듯 말했다.

레오번은 사뭇 놀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격해진 어조로 소리쳤다.

“아가씨, 안 됩니다! 아가씨께선 첩의 자리를 약속받으신 몸입니다. 영주님께서 원군을 요청하러 가셨다면 저희는 항구와 성채만 지키고 있으면 됩니다. 머지않아 본도에서 원군이 도착할 것입니다!”

“원군이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약 없이 기다릴 수는 없어. 게다가 식량 사정도 여의치 않은 시기에 수성전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설령 원군이 도착한다 하더라도 파종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다면 영지민들에게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다.

굶주려 죽는 자가 심심치 않게 나올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레오번. 나의 영지민들에게 필요한 건 왕자의 첩이 아니야.”

리제는 스스로 검을 쥘 수도 없고, 싸울 줄도 모르는 농민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 눈빛은 ‘갈라우드’의 핏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투견의 것이었다.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피를 흘릴 수 있는 군주겠지.”

“리제 아가씨…….”

“그래, 왕자 따윈 필요 없어. 호족의 우두머리들을 집합시켜. 수성전 따위의 시답잖은 짓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걸 미리 알려줘야 되니까.”

리제는 품속에 늘 숨겨서 가지고 다니던 담배갑을 꺼냈다. 궐련을 꺼내 입에 물자. 평소라면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을 레오번이 잠자코 리제를 지켜봤다.

그리고는 잠시 후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리제가 물고 있던 궐련의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리제를 향한 레오번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 * *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로 병력을 출자할 수 없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카타쿨라와 신예 하이브 마인드가 손을 잡고 공세를 가한다면 승산 따윈 없습니다.”

“애초에 이번에 나타난 하이브 마인드가 카타쿨라의 무언의 허락 하에 성장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마물 놈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계집이 총지휘권을 잡겠다는데 뭘 믿고 병력을 지원한단 말이오?”

“갈라우드 가문도 끝이로군. 계집애가 나서서 호족회의를 명하다니.”

저택에 모이게 된 호족의 우두머리들은 빠르게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뒤이어 리제에 관한 불평이 토해졌다.

손녀 뻘이나 되는 까마득히 어린 계집에게 명령받아 모이게 된 것이다. 호족의 우두머리들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덜컹.

각자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던 사이.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 볼 수 있었던 드레스 차림이 아닌, 가벼윤 튜닉에 모피 망토를 두른 모습이었다.

망토에는 갈라우드 가문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저 망토를 두르고 왔다는 건 가문의 대표로서 자격을 갖췄다는 의미다.

리제는 8명의 호족 우두머리들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연로하신 분들을 이렇게 불러들여서 죄송하네요. 힘든 발걸음을 하셨을 텐데 가볍게 식사나 하고 가시죠.”

리제가 자리에 착석한 후.

미리 준비되어 있던 요리가 차례차례 옮겨져 왔다. 때마침 점심 식사를 해야 될 때였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 같이 모여 밥이나 먹자고 호족의 우두머리들을 호출하진 않는다. 긴급한 사안을 처리해야 될 때가 아니면 말이다.

“영주. 아니, 임시 영주라고 해야겠군. 설마하니 밥이나 먹으며 면식이나 익히자고 부른 건 아니겠지?”

호족의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인 ‘토골라’가 사뭇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리제는 그 질문에 시선도 주지 않고, 자신의 몫으로 놓인 고깃덩어리를 게걸스럽게 뜯어 삼키고 있었다.

일단 리제는 귀족 가문의 영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랑자만큼이나 천박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치 며칠이나 굶은 사람처럼 말이다.

리제는 소매로 입가를 대충 닦아내며 뒤늦게 대답했다.

“배가 고프면 전쟁도 못 하잖아요. 여러분도 여유롭게 드실 수 있을 때 맘껏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전쟁? 무슨 전쟁 말인가? 영주가 원군을 부르러 본도로 향했다는 얘기를 들었네. 그쪽의 병력만으로도 수성전은 충분할 터.”

토골라는 리제에게 협력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철없는 어린애에게 병력을 맡길 만큼 호락호락한 늙은이가 아니었으니까.

리제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성전은 하지 않습니다.”

“뭐?”

“지금이야 말로 공세를 펼칠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신예 하이브 마인드의 등장으로 카타쿨라의 병력이 분산되었을 때가 적기입니다. 텐즈 강을 넘어 전선을 구축할 작정입니다.”

그 한 마디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호족의 우두머리들은 질 나쁜 농담을 들은 사람들처럼 입을 반쯤 벌린 채 굳어버렸다.

“미쳤군…….”

“들을 가치도 없고, 이곳에 모일 필요도 없었군! 이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소.”

“저런 정신병자 계집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습니다! 다들 일어납시다!”

호족의 우두머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그대로 회의장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인 ‘조시네스’가 조용히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정지의 신호다.

조시네스는 호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자였다. 다른 우두머리들은 조시네스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크흠!”

“어험!”

호족의 우두머리들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앗다.

조시네스는 풍성한 은발을 천천히 쓸어올리며 리제에게 계속 말해보라고 턱짓을 했다.

“진격하겠습니다.”

리제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조시네스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진격하겠습니다.”

강단이 깃든 목소리였다.

주저나 두려움은 일절 없었다.

“설령 병력의 지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진격하겠습니다.”

조시네스는 주름진 눈을 감으며 리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좋은 목소리다.

자질을 갖춘 지휘자의 목소리다.

흔들림이 없는 우두머리의 목소리였다.

결단을 내린 사내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가용 병력이 근위대뿐일지라도 진격하겠습니다. 승산이 제로에 수렴할지라도 진격하겠습니다. 개죽음이라 비웃음을 당할지라도 진격하겠습니다. 강을 넘어, 포탄과 화살의 세례를 맞으며 진격하겠습니다. 사지가 토막나고 창자가 쏟아져도 진격하겠습니다.”

리제의 시선은 이미 전장을 향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광적인 투쟁 본능이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예, 진격하겠습니다! 진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잃을 것이 알량한 목숨뿐이며, 얻을 수 있는 것이 흙냄새 묻은 눈물이라면. 진격하여 전장에서 피를 흘리겠습니다.”

호족의 우두머리들은 리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그 누가 감히 이 고결한 사명에 득실의 저울을 들이밀 수 있겠습니까. 이 순수한 의도와 과정의 결과를 감히 단정지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태양의 어머니뿐입니다.”

“그런 궤변으로 늙은이들의 입을 틀어막는 건 누구에게 배웠나?”

리시네스는 만족스럽게 끌끌 웃으며 리제에게 물었고. 리제는 황급히 조시네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역시 너무 오래 살다보면 어지간한 일에는 자극을 받지 않는단 말이야.”

조시네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다른 늙은이들은 내키지 않는 것 같으니 이쪽이 보병 800명을 출자하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텐즈 강 상류의 저수지 근처가 먹음직스럽던데. 당연히 내가 가장 먼저 맛을 볼 수 있겠지?”

리제와 조시네스의 시선이 교차했다.

서로 바라보는 것은 달랐다.

하지만 나아가야 할 방향은 공교롭게도 같았다.

“스텔라 님의 이름에 맹세코 그리 될 것입니다, 조시네스 경.”

그리하여 리제의 첫 출격지가 결정되었다.

성과를 남겨야만 했다. 다른 호족장들이 혹해서 병력을 지원하고 싶어질 만큼의 성과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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