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64화 (6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64화

    아릿카사는 누구인가?(4)

    111호 둥지의 관리자 카타쿨라.

    그는 헬베르카 가문의 분가 중 하나인 ‘캘러제드’의 혈맥을 잇는 하이브 마인드였다.

    헬베르카 가문의 혈맥이 완전히 끊긴 후.

    21개의 분가는 서로가 정통성을 지닌 계승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헬베르카의 공석을 차지하기 위해 21개의 분가가 충돌했던 사건이 ‘국화 전쟁’이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다시피 국화 전쟁은 명확한 결말을 도출해내지 못한 전쟁이다.

    누가 헬베르카의 이름을 계승할지 투닥거리는 사이 ‘여덟의 기둥’이 자신들을 스스로 ‘마왕’이라 칭하며 일어섰으니까.

    동맹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이 우선되었고, 국화 전쟁은 흐지부지되었지만.

    국화 전쟁은 승자 없는 전쟁이었지만, 패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분가는 다섯 곳.

    그 다섯 곳에 캘러제드도 속해 있었다.

    가장 위협적인 분가였기에 전쟁 반발 초기 다른 분가의 연합 공세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헬베르카에 가장 가까웠던 분가는 캘러제드였던 것이다.

    비록 국화 전쟁에서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지만.

    카타쿨라 남작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정체성에 관한 또렷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존재했다.

    반 르낙시나 동맹을 이끌었던 수장 헬베르카.

    그리고 그 헬베르카에 가장 가까웠던 분가 캘러제드의 피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의 역경은 크게 신경 쓸 정도도 아니었다. 캘러제드의 피를 잇는 카타쿨라 자신에겐 말이다.

    “카타쿨라 각하! 2구역까지 돌파당했습니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모험가 팀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대책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텐즈 강을 끼고 765호 둥지의 머스킷티어 부대가 계속해서 기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병력을 철수시켜 저지선을 다시 구축해야 합니다!”

    “갈라우드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제부터 서신의 답변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돼지놈이 음흉한 짓을 벌이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제게 부대를 맡겨 주신다면 녀석의 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오겠습니다!”

    “765호의 둥지의 관리자가 구프의 목을 쳤습니다! 개자식들! 사자를 죽이다니 이런 야만적인 짓을 하는 놈들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달갑지 않은 보고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카타쿨라는 턱을 괸 채로 둥지의 챔피언들이 차례차례 전해오는 소식들을 머릿속에서 나열시켰다.

    현재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는 건 둥지의 1차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모험가 팀이었다.

    모험가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이브 마인드의 목을 치는 것. 소수 정예로 움직이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유도해 천천히 말려 죽이는 게 정석적인 처리법이다.

    평시의 111호 둥지였다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 카타쿨라의 판단을 방해하고 있는 요소가 계속해서 나열되고 있었다.

    ‘텐즈 강을 어처구니없게 빼앗긴 것이 뼈아픈 실책이로군.’

    텐즈 강은 765호 둥지와 111호 둥지의 경계선처럼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었다.

    누자베스가 아비엥을 처리한 후.

    북동부를 정리한 뒤에 남쪽으로 눈을 돌릴 것이라 안일하게 판단한 것이 실책이었다.

    누자베스는 북동부를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남쪽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스칼렛’이라고 불리는 흡혈귀가 이끄는 구울 머스킷티어 부대. 그리고 대륙제 병기인 ‘세틀라이트 박격포’로 무장한 드워프 부대.

    산의 고지에 방어선을 전개하고, 곡사 화기로 괴롭히는 전략은 111호 둥지의 병력들에게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어처구니 없게 텐즈 강까지 점령을 허용한 후. 스칼렛의 부대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방어선 구축을 위해 모여드는 111호 부대의 병력을 야금야금 갉아 먹기 시작했다.

    그대로 포기할 수도 없고, 후퇴하기엔 혈압이 오르는 지역이다. 스칼렛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천재적인 전략은 아니다.

    다만, 흡혈귀는 노련하고 영악했다.

    이보다 더 더러운 전장을 수백, 수천 번은 더 경험해본 것처럼 말이다.

    ‘당장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지 않지만, 고려해야 될 것도 있었지.’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

    에르바키나 연맹의 기대를 받던 하이브 마인드 ‘아비엥’을 집어 삼킨 신예 전쟁 군주다.

    그리고 얼마 전 765호 둥지로 보냈던 사자 ‘구프’는 죽어서 머리만 돌아왔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의심할 여지고 뭣도 없이 명명백백한 적의.

    그것도 오만방자할 정도의 자신감으로 가득찬 적의다!

    ‘그리고 갈라우드의 침묵.’

    인간 영주 갈라우드와 바로 며칠 전까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누자베스의 등장으로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고, 이 상황의 해결을 재촉하기 시작한 건 갈라우드 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카타쿨라가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누자베스와 거래를 했거나.’

    더 승산이 높아 보이는 쪽으로 박쥐처럼 붙어먹은 것이다. 과연 그 선택이 정답일지 어떨지는 차차 두고 봐야 하겠지만.

    ‘도망쳤거나.’

    애초에 갈라우드는 심약한 남자다.

    전쟁은 커녕 눈앞에서 싸움만 나도 심장이 벌벌 떨려서 잠도 못 잘 겁쟁이란 말이다.

    가능하다면 직접 싸움에 나서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이브 마인드끼리 치고 박은 후에 살아남은 쪽과 협상을 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충분히 영지와 영지민들을 버리고 도망칠 만큼 한심한 사내였다.

    ‘마지막 가능성은…….’

    카타쿨라는 거기까지 생각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베놈을 준비해 놓는 게 좋겠군.”

    “예, 바로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카타쿨라가 망토를 챙겨 어깨에 걸치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뒤를 따라오는 부관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신나서 까불고 있는 귀염둥이는 오베론이 살짝 혼내주도록.”

    “예, 각하.”

    오베론은 111호 둥지의 챔피언이자, 1000여 마리에 달하는 ‘중장갑 오크’ 부대의 부대장이었다.

    오크 부대의 부대장은 가장 강한 오크가 맡는 게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오베론은 왜소한 체구를 지닌 ‘인간 노인’이었다.

    걸치고 있는 의복을 봐도 군인이 아닌, 학자 같은 차림새. 도저히 하이브 마인드의 챔피언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뒷일을 부탁하지.”

    카타쿨라가 아리카 섬에서 취미 생활만 즐기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누자베스에게 격의 차이란 걸 알려줘야 할 때가 왔고 말이다.

    * * *

    콰앙!

    굉음과 함께 트롤 병사들이 팝콘처럼 솟구쳤다! 트롤의 사지와 창자가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이야…… 우리 스칼렛이 아주 캐리 머신이야. 머리채 캐리가 이런 거구나.”

    남부 전선에 도착한 후 상황을 바로 살폈다.

    루칸다에겐 카테라도 정리를 명령한 후 직계 부대를 이끌고 남부 전선에 도착하자.

    스칼렛이 이미 산의 고지 위에 진지를 구축해 놓고, 카타쿨라를 한창 괴롭히고 있는 중이었다.

    ‘텐즈 강을 넘어 오자니 감수할 피해가 크고. 그렇다고 어이없게 물러나자니 빡돌겠지.’

    이건 확실히 국지적이지만 체크 메이트다.

    비비큐 클럽의 박격포 포격으로 강 건너에서 얼쩡거리는 놈들까지 괴롭힐 수 있었고.

    산의 고지에 참호를 파고, 방어선을 구축해서 어지간한 규모의 병력으로는 접근하기 힘든 상황이다.

    “강 너머에 점령할 만한 곳이 있었나? 저번에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정찰 결과로는 꽤 큰 곡창지대가 있었는데.”

    어디까지 더 갉아 먹을 수 있을지 펼쳐져 있는 지도를 보며 얘기를 꺼내자.

    스칼렛은 다리를 꼬고 앉아 차분하게 말했다.

    “퇴각을 준비할 때일세.”

    농담인가?

    스칼렛의 얼굴을 다시 살피자, 도저히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강의 상류 쪽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네. 이 섬의 농경지 3할 정도에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지.”

    “텐즈 강 너머로 널찍한 평지도 있고 말이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딱 이 지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좋은 땅을 내가 아닌 다른 놈이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배가 아파서 구급차를 부르고 싶을 지경이다.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걸세. 이쪽이 욕심에 눈이 멀어, 지형적 이점을 포기하고 진격을 개시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걸 수도 있지.”

    “그렇다면 현재의 위치를 고수한다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퇴각을 권한 이유는?”

    스칼렛은 장기간 계속된 전투에 피곤이 쌓인 것인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현재는 둥지 가까이까지 인간 모험가들이 침투한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걸세.”

    그렇게 말하더니 탁자 위에 한쪽 다리를 턱 걸쳤다. 슬슬 동이 틀 때다. 스칼렛은 졸음이 가득 찬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생각하기엔 적의 전력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네.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했을 뿐, 방향성만 잡는다면 송곳처럼 뚫고 들어오겠지. 만약 그 방향이 이쪽이라면 전멸을 면하기 힘들 걸세.”

    스칼렛은 치맛자락 안쪽으로 손을 뻗어 가터벨트의 버클을 풀었다. 이어서 반대편 다리도 탁자 위에 올린 뒤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스르륵.

    슬슬 수면을 취할 생각인지 가느다란 다리를 타이트하게 감싸고 있던 검은 스타킹을 벗었다. 스타킹이 벗겨지자 창백하리 만큼 투명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건 그렇고, 내가 전에 건의했던 장미나무 관은 언제쯤 줄 생각인가?”

    “요즘 별 해괴한 건의가 잔뜩 들어와서 좀 밀렸는데…….”

    “관이 없어서 요즘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는 것 같군.”

    스칼렛은 작게 한숨을 토해내며 스커트의 허리춤을 묶고 있던 매듭을 풀렀다.

    하반신의 유아한 선이 여과 없이 드러났고, 스칼렛이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던 중. 가슴골 사이로 큼지막한 상흔이 보였다.

    검이나 그와 비슷한 날붙이로 꿰뚫린 흔적이다.

    “그 상처는…….”

    “전에 말한 적이 있지 않나? 귀공의 동혈이 남긴 흔적일세.”

    스칼렛은 블라우스까지 모조리 벗어 대충 천막의 벽쪽에 걸어놓고 야전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잠시 스칼렛의 가슴 사이에 남은 상처를 바라보고 있자. 스칼렛이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늙은이가 시체처럼 자는 걸 구경하는 취미라도 있나? 아니면 다른 용무라도 남은 겐가?”

    “그냥. 내 형제가 어떤 녀석이었을지 상상하고 있었어.”

    “바하무트 말이로군.”

    스칼렛이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 머리맡 쪽에 걸터앉았다.

    “원하는 건 기어코 해내는 사내였지. 아마도 태어난 순간부터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걸세.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 그런 이중일택의 선택지가 삶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스칼렛은 자연스럽게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귀공은 과연 어떨지.”

    쿡쿡 웃으며 스칼렛은 이쪽을 올려다봤다. 그 붉은 눈동자가 요염한 빛을 흘렸다.

    “나는 바하무트가 아니야.”

    “알고 있네.”

    “그렇다고 살짝 겁을 준 정도로 물러날 얼간이도 아니지.”

    “흐음…… 정말인가?”

    “이렇게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건 성미에 안 맞거든.”

    눈을 깜빡할 새도 없이 상체가 침대 위로 파묻히듯 쓰러졌다. 눈을 뜨자 스칼렛이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숨결이 맞닿을 만큼 얼굴이 가까웠다.

    한껏 상기된 날숨이 입술을 스쳤고, 스칼렛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속삭였다.

    “숨통을 조이는 건 언제나 과욕일세.”

    “이런 천성을 타고난 이상, 욕심을 부리다 죽는 게 천명이지.”

    스칼렛의 가슴골 사이에 새겨진 상처를 손끝으로 훑으며 대답하자.

    내 대답이 꽤나 마음에 든 것처럼 스칼렛이 웃음을 터뜨렸다.

    “밤의 어머니께서 그대들을 사랑한 연유를 알 것 같군.”

    스칼렛은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벗어놨던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주군. 그렇게 멍하니 누워 있을 여유는 없을 텐데. 품고 있는 욕심만큼 부지런해야지 않겠나?”

    진짜 땅따먹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물러설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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