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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63화 (6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63화

    아릿카사는 누구인가?(3)

    “그래도 첩으로 들어가기 전까진 자유롭게 지내고 싶었는데. 아, 그나저나 굴덴 마을에 다녀온 덕분에 재밌는 걸 봤지?”

    “하이브 마인드 누자베스 말이군요.”

    리제의 눈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성겨 있었다.

    “이래서 성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그만둘 수 없다니까. 세상에! 파종하는 마물은 처음 봤어! 그것도 하이브 마인드가!”

    “확실히 이상한 일입니다. 하이브 마인드가 마을의 농사일을 자진해서 돕고 있다니…….”

    지금은 아리카 섬 전체가 농번기였다.

    이런 시기에 군사를 일으켜 점령전을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농사일에 차질이 생긴 마을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누자베스는 농민들의 입장을 헤아린 듯 병력을 파견하여 부족한 일손을 돕게 했다. 병력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시간이 날 때 직접 밭으로 찾아와 농사일을 도왔다.

    “있잖아, 시릴스. 진짜 마물과 인간은 공존할 수 있을까?”

    “그런 이상을 품었던 분이 과거에 계셨죠. 그리고 그 분께서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됐는지 아가씨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피르에나 왕녀 전하 말이지…….”

    그녀의 이상은 마물의 배신으로 끝맺어졌다.

    결국 인간과 마물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생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남긴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하이브 마인드는 원래 다 그렇게 잘생겼어? 하이브 마인드는 첩 필요 없나? 한번 시릴스가 물어보고 올래?”

    “아가씨…….”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시릴스까지 레오번처럼 무서운 표정 짓지마.”

    리제는 묶어놨던 긴 머리를 풀며 거울 앞에 섰다. 귀족의 영애 치고는 탄탄하게 단련된 상체와 하체 근육이 여실 없이 드러났다.

    “시릴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데.”

    “…….”

    “암탉이 운 정도로 망하는 집안은 옆집 개가 짖었어도 망했을 거야.”

    “아가씨.”

    시릴스는 리제의 눈동자에 비친 비릿한 욕망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갈라우드 가문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은 것은 파오루가 아닌 리제였다. 그것도 대를 건너뛰어 발현된 갈라우드 가문의 본능.

    글로레나 왕조를 구심점 삼아 뭉쳤던 수많은 가문들 중 언제나 선봉에 섰던 가문은 갈라우드 가문이다.

    피와 화약의 냄새를 갈구하는 본성.

    날붙이와 비명을 쫓는 본능.

    죽음마저 두려워 않는 불같은 투쟁 본능만이 갈라우드 가문의 상징이었다.

    강적을 마주할 때마다 공포보다 먼저 투쟁심이 들끓는 전쟁광!

    리제의 눈동자는 흥분과 닮은 고양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누자베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리제는 이 고착화된 섬의 환경에서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얌전히 성에서 머물다 내년쯤에 왕자의 첩으로 순순히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누자베스의 등장으로 아리카 섬은 삼파전의 양상에 돌입했다. 이 혼전 상황은 리제의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할 걸 알면서도, 어째서 암탉을 미리 잡아먹지 않았지? 너무 안일하지 않아?”

    리제는 그녀의 증조부가 남긴 유물을 바라봤다. 벽에 걸려 있는 레이피어 형태의 무기는 대륙의 공학 병기의 일종.

    갈라우드 가문의 선조가 아리카 섬의 점령전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유물이었다.

    “시릴스. 어디까지 따라 올 수 있어?”

    리제는 공학 병기 ‘아르테간트’를 집어 들며 시릴스 쪽을 돌아봤다.

    이미 양뺨이 붉게 상기되어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지옥의 밑바닥까지 따르겠습니다, 아가씨.”

    그 대답이 효시였다.

    리제는 아르테간트의 칼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독존극의 주역은 한 사람이면 충분해.”

    그러는 와중에도 아리카 섬의 전황은 격변하고 있었다.

    * * *

    “나는 이 순간이 좋더라고.”

    저벅.

    구두굽이 흙바닥을 즈려밟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퍼졌다.

    571호 둥지의 하이브 마인드 ‘유스탄’은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의 심부까지 침입한 소년을 노려봤다.

    저 증오스러운 침략자가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하이브 마인드 ‘누자베스’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잿빛이 희미하게 섞인 칠흑색의 제복.

    금빛의 자수로 포인트를 준 저 제복이 누자베스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각모를 푹 눌러쓰고 있는 덕분에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그림자 밑으로 유려하게 그려진 입꼬리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상정 가능한 모든 발버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확정되는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

    스릉!

    누자베스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유스탄과 방위 병력 20여 마리가 모여 있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둥지 내에서도 정예라고 손꼽히는 병력들이다.

    거기에 571호 둥지의 챔피언이자, 미노타우로스인 ‘구로칸’이 양손도끼를 쥔 채 떡 버티고 있는 상황.

    그에 비해 누자베스는?

    대동한 챔피언은커녕 병력도 없다.

    단신이란 말이다.

    유스탄이 분노와 당혹감을 동시에 느끼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이건 기회였다.

    제아무리 대단한 하이브 마인드라고 해도 결국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군세를 지니지 못한 하이브 마인드는 슬라임보다 못한 마물에 불과했으니까.

    “이쪽을 향해 쏟아지는 당혹감 어린 시선. 눈동자에 성긴 분노. 그 안쪽으로 슬며시 엿보이는 일말의 희망. 피비린내 나는 사투 직전의 경직된 공기.”

    휘릭.

    누자베스는 발걸음을 멈추며 검을 고쳐 쥐었다. 동시에 반대편 손으로 매직 스크롤을 펼쳤다.

    1서클의 원소 공격마법 ‘파이어월’의 스크롤이었다.

    “나는 이 경직된 공기를 만끽하며 자비없는 선고를 내리겠지.”

    누자베스가 스크롤을 허공으로 던진 것이 신호였다.

    유스탄이 악을 내지르듯 소리쳤다.

    “죽여 버려……!”

    중무장한 오크 전사 20여 마리가 누자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하이브 마인드라고 해도 이 정도의 병력을 상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무슨 해괴한 재주를 가지고 있든 말이다!

    “데드 엔딩이다.”

    촤악!

    누자베스의 검이 허공에 흩날리던 매직 스크롤을 갈랐다. 스크롤이 파손되며 봉인되어 있던 스킬이 발동되었다.

    화르르륵!

    누자베스의 앞에 거대한 불꽃벽이 생성되었다.

    “멍청한 놈! 위치를 잘못 잡았구나!”

    미노타우로스 구로칸과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불꽃의 벽은 너무 빠르게 전개되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거리에 생성되었다.

    저것이 비장의 수였을 것이다.

    저런 식으로 매직 스크롤을 전개하여 기습하려던 작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장의 수는 어처구니 없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유스탄이 승리를 확신한 순간.

    데굴.

    사람의 머리통만한 철구가 불꽃벽을 통과해 굴러왔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닌 수십여 개.

    “포, 포탄!”

    오크 전사 중 누군가 단말마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철구가 아닌 포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불꽃벽을 통과해 나온 포탄은 이미 점화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혼자서 이렇게 많은 양의 포탄을 어떻게 운반했는지. 어디에 숨겨 놨던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콰과과광!!

    둥지의 심부가 통째로 뒤흔들릴 정도의 폭발이 연쇄했다. 비명과 폭음이 어우러져 지옥도를 이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스탄의 병력들이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쉬익!

    “카악!!”

    불꽃을 뚫고 나온 누자베스의 칼날이 무자비하게 몰아쳤다. 유스탄은 20여 마리의 오크 전사와 둥지의 챔피언이 학살당하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이었다.

    단 한 마리의 하이브 마인드가 20여 마리의 병력을 처참하게 도륙해버린 것이다.

    비상식적인 수준의 전투 능력이다.

    하이브 마인드가 이런 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유스탄은 넋이 나간 듯 실소를 흘렸다.

    누자베스는 상처 하나 없이 유스탄의 앞에 섰다.

    휙!

    그리고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기도는 다 했냐? 아니면 사탄 뿔 턱 빠지게 빨 준비는 했어? 멋드러진 유언은 미리 생각해 놨지?”

    “구, 구로칸은…….”

    “응?”

    “구로칸은 나의 어머니가 되어줄 지도 몰랐던 미노타우로스였다!!”

    “백억점만점!”

    푸욱!

    누자베스의 검이 유스탄의 흉부를 꿰뚫었다.

    이미 수십 번이고 반복해온 지겨운 작업의 일환이었다.

    * * *

    유스탄의 숨통을 끊고 둥지를 나서자.

    루칸다가 이끄는 병력들이 일대를 모조리 박살내고, 정리를 시작한 참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무리야. 절대 우리 둥지엔 안 들인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미노타우로스는 우수한 기동성과 전투력을 갖춘 종족입니다.”

    “아니, 그냥 그놈들은 존재 자체가 역겨워. 크레타가 생각나서 싫다고.”

    낳아라! 신의 아이를! 그아아앗!

    같은 전개가 될 것 같아서 무섭단 말이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 종족의 전투력이 우수하다는 건 사실입니다. 제가 유격대에 있었을 때도 검투사 출신의 미노타우로스가 있었는데…….”

    “혹시 이름이 가이우스야?”

    “아닙니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가이우스가 아니면 크레스켄스겠지.”

    루칸다는 끌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이걸로 항구 시설을 손에 넣었군요. 일전에 말씀하셨던 ‘카테라도’까지 왕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리카 섬의 북쪽으로 7키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무인도였지.”

    카테라도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척박하고 조그마한 섬이다. 크기는 아리카 섬의 1/5도 안 된다.

    뭐, 아리카 섬이 속한 시트란테 서도 자체가 카테라도 같은 조그마한 섬이 모인 지역이다.

    “인어족이 목격됐다는 정보는 있습니다만. 크게 위협이 될만한 야생 마물은 없습니다.”

    “인어는 좋아. 인어는 내 수비 범위 안에 들어온다.”

    하반신이 어류라서 체외수정을 하는 종족이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아니, 잠깐?

    상반신이 인간이면 하반신이 당연히 어류잖아?

    그럼 체외수정 확정인가?

    아니아니. 그럼 하반신이 인간인 쪽이 낫나?

    ‘젠장, 그럼 상반신이 어류잖아!’

    이건 예상치도 못했던 복병이다.

    끔찍한 선택지가 제시된 기분이다.

    ‘상반신이 인간이고 하반신이 어류인 게 정석이지만…… 이러면 체외수정이고. 상반신이 어류고 하반신이 인간이면 체내수정이겠지만, 아니 시발…… 상반신이 어류인데 어떻게 해? 생선대가리랑…….’

    이, 이 무슨 잔혹한 설정이란 말인가……!!

    “루칸다 너라면 어쩌겠냐? 상반신이 고블린이고 하반신이 어류인 인어와. 상반신이 어류고 하반신이 고블린인 인어가 있다면 어느 쪽을 고르겠냐?”

    “둘 다 싫습니다, 각하.”

    애초에 루칸다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게 잘못이다.

    얘기를 들어보면 루칸다는 고블린 사이에서 초인싸가 아니던가? 그냥 걸어만 다녀도 암컷 고블린들이 물구나무를 서며 사열종대로 집합하는 놈이란 말이다.

    왜 물구나무를 서냐면 이게 체외수정과 체내수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행위인데…….

    “각하. 일단은 카테라도의 개발에 관한 이야기부터 정리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그래! 카테라도! 페쉬나이트 광맥!”

    얼마 전에 드디어 페쉬나이트 광맥을 구매했다.

    꽤나 값이 올라 있었지만, 길리도가 나름대로 손을 써줘서 8만 벨 정도에 구매할 수 있었다.

    ‘코볼트 작업대를 추가적으로 고용하고, 화물선을 한 대 사야겠지.’

    그 이후에 병력을 파견하여 카테라도의 야생 마물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광맥 개발을 시작하면 된다.

    페쉬나이트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광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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