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62화
아릿카사는 누구인가?(2)
둥지의 심부에 도착하자.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땅딸보 한 놈이 거만한 자세로 내 지정석에 앉아 있었다.
“그쪽이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인가?”
저놈이 바로 카타쿨라가 보낸 사자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전쟁 군주의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을 리 없지 않나?
그냥 지나가던 정신병자라거나, 자살 희망자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111호 둥지의 관리자이자, 아리카 섬의 실질적 지배자이신 위대한 카타쿨라 남작 각하의 사자 ‘구프’다. 적절한 예를 갖추기를 기대하지.”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나?
구프는 거들먹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이거 111호 둥지의 사자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조촐하지만 빵을 준비해 놨습니다.”
“빵? 고작 빵이라고? 푸하핫! 그래, 좋다. 성의를 봐서 맛을 보도록 하지.”
그대로 구프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뻐억!
창자가 통째로 철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의 타격감이다.
“꾸엑!!”
구프는 쇳소리를 토해내며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배빵이다 씹새꺄. 어디 숏다리 존만이 새끼가 대물인 척이야? 햄토리야 오늘은 형아 말리지 마라. 아리카의 실질적 지배자인 위대한 카타쿨라 남작? 이 새끼야 나는 아리카의 김현중 누자베스 님이다!”
“쮸쮸!”
타이밍 좋게 햄토리가 곡괭이 자루를 들고 달려왔다.
“그래, 빠따! 훌륭한 대화 수단이지! 20년 간 응어리진 한화 팬의 불빠따질 맛이나 봐라. 넌 오늘 한화가 우승할 때까지 쳐맞는 거야. 쉽게 말해서 영원히 쳐맞는단 소리다.”
“가, 감히이이! 111호 둥지의 사자인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하길…… 꺄흑!!”
빡!
곡괭이 자루로 옆구리를 후려치자 구프가 꼴사나운 비명을 토해냈다.
“캬아악! 잠깐, 잠깐만!! 대화로! 대화로 해결하지……! 지금 그만둔다면 이 무례를 용서하겠다!”
“진짜?”
끄덕끄덕!
구프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본의가 아니게 111호의 사자께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알면 됐네! 당장 그것부터 내려놓고 이야기를…… 캬하악!!”
빠각!
이번엔 곡괭이 자루를 높게 치켜든 뒤 구프의 무릎을 내리쳤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통쾌하게 둥지 내부를 울렸다.
“라고 할 줄 알았냐, 이 새꺄. 잘 들어라. 오늘만 산다! 이게 우리 모토야. 아주 내일이 없는 진지한 병신 새끼들이지…….”
곡괭이 자루를 휙 던져버린 후.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 살수가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아아아아, 아아악!! 목숨만, 목숨만 살려 준다면 뭐든 들어주겠네!”
“111호 둥지가 항복하고 내 둥지랑 합병할 수도 있어?”
“아니 그건 좀…… 갸아아악!!”
“그럼 뭐든지가 아니잖아 루저 호빗 새끼야!”
“캬하아아아악!!”
그 후로 구프는 불행하게도 홀딱 벗겨져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너무 잔인해서 뭘 벗겼는지 일일히 설명하진 않겠다.
대충 목함에 잘린 구프의 머리를 넣고 고블린 살수에게 넘겼다.
“이게 765호 둥지의 대답이자, 내 의지라고 카타쿨라에게 전해라.”
이걸로 메시지는 충분할 것이다.
잡무를 끝냈으니 바로 병력이 집결해 있는 평야로 향하자.
심부에서 나서는 중에 확장된 중급 부화장 시설이 보였다. 10여 개의 부화장에선 끊임없이 병력이 토해지고 있었다.
“다음 진격지는 681호 둥지와 723호 둥지입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소루테아 마을도 겸사겸사 정리하겠습니다.”
루칸다가 내 뒤로 따라 붙으며 진격 상황을 보고했다.
“개자식들. 감히 동맹을 맺어? 681호와 723호 관리자는 죽이지 말고 생포해. 동맹 맺고 깝치던 새끼들은 특별히 어떻게 처리되는지 본보기를 보일 테니까.”
“존귀한 의지를 받들겠습니다.”
“그 놈들만 처리하면 항구 시설 주변엔 더 없지?”
“예, 현재는 취항 노선이 없는 폐항입니다만. 시설 자체는 남아 있으니 정비하여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루칸다의 추가적인 보고를 들으며 걷던 중. 왼편에서 시체 썩은내가 진동했다.
고개를 돌리자 내게 저항했던 마을의 주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물론 사람을 저렇게 쌓아두는 건 인권유린이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이란 말이다.
그래서 우리 둥지는 번거롭지만 모두 죽여서 저런 식으로 쌓아 놓는 것이다. 시체는 저렇게 쌓아놔도 합법이니까.
“내일이면 그레이브 야드 부대의 병력 보충이 완료될 것 같네. 슬슬 남쪽 숲의 경계에 도달하겠군.”
그리고 북쪽으로 진격하던 루칸다의 군세와 반대로. 남쪽은 스칼렛의 담당 관할지였다.
내 왼편으로 따라 붙은 스칼렛이 금속 스트로를 이용해 잔에 담긴 혈루목의 수액을 쪽쪽 빨며 말했다.
“레드문 포션과 탄환의 보급도 안정화 되었지만. 여전히 비비큐 클럽의 부대장인 두르난의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네…… 귀공에게 마력 정제 시설의 업그레이드를 건의하라고…….”
“벌써 두 번이나 업그레이드했잖아! 여기서 더 업그레이드하려면 에르바키나 연맹에서 450만 벨을 지불하라는데.”
“그건 알 바 아니니 업그레이드를 더 하라는군.”
“드워프 아재들이 드디어 핵폭탄 같은 걸 쏘고 싶은 모양이네.”
마나석 정제 시설을 두 번이나 업그레이드한 덕분에 박격포 부대의 화력은 더욱 상승했고, 정제 효율도 상당히 좋아졌다.
그 외에도 자잘한 시설이 모조리 업그레이드했다! 초석 채굴장 만세다!
“여유 자금만 생기면 업그레이드할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해.”
“알았네. 그런데 그 드워프들은 나한테만 칭얼댄단 말일세.”
그리고 스칼렛이 칭얼대는 사람은 나였고 말이다. 부대가 확장되고 부대원의 수가 늘어나며 갖가지 불만이나 건의 사항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바로 어제는 햄토리가 인육 훈제기를 설치해 달라고 난리를 부리는 통에 달래느라 힘들었단 말이다…….
“각하. 보르가의 건의 사항입니다만…….”
“보르가는 또 왜?”
“저번에 405호 둥지에서 봤던 시설 때문에 불만이 생긴 모양입니다.”
“거기에 또 뭔 해괴한 시설이 있었길래.”
“암소를 붙잡아다 매음굴을 만들어 달라는 건의입니다.”
“……돌아버리겠네. 신중하게 검토해 보겠다고 전해라.”
그리고 다양한 종족이 모인 만큼 다채롭게 엿 같은 가치관을 받아들일 만큼의 도량이 필요했다.
각 종족마다 내 이해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욕망과 욕구가 있었으니까.
‘얼른 아리카 섬을 통일시키고 나 대신 둥지 관리해줄 놈을 찾아야겠네. 이거 골병 들겠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루칸다, 그리고 스칼렛과 함께 둥지의 출구로 나서자.
사열되어 있던 병력이 한눈에 들어왔다.
2천 여 마리의 병력이 일제히 거수경례를 올렸고, 내 명령을 기다렸다.
“둥지 까부수기에 딱 좋은 날씨군.”
궐련을 입에 물자, 고블린 살수가 재빠르게 불을 붙였다.
‘북동부 정리 작업도 곧 끝난다. 그 이후부터가 본선이 되겠지.’
인간의 영주 갈라우드.
그리고 111호의 관리자 카타쿨라.
내가 아리카 섬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 반드시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들이었다.
‘조만간 밑준비 작업을 해야겠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차례차례 정하며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내 눈에도 진정한 ‘전쟁 군주의 군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 * *
“리제 아가씨! 더는 못 참습니다! 어제도 고문헌 수업을 멋대로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꼴은 뭡니까?”
레오번은 오랫동안 갈라우드 가문을 섬겨온 가신이었다. 초로의 중년 신사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외견이었지만, 지금은 자글자글한 주름마다 근심과 노파심이 가득했다.
“어디에 내놓고 사내자식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숙녀란 자고로…….”
“아, 알았어. 알았다고 레오번! 미안, 당장 벗을 테니까 그만해.”
“제 앞에서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 것 자체가 조신하지 못한 짓입니다!!”
“그럼 옷 갈아입게 잠깐 나가줄래?”
“알겠습…… 아니, 그리고 또 도망치려는 거 아닙니까!?”
노발대발하는 레오번과 달리 리제는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영주 갈라우드의 슬하에는 1남1녀의 자식이 있었다. 첫째는 장남 ‘파오루’. 그리고 둘째는 장녀 ‘리제’였다.
덕분에 계승권 문제가 불거지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차기 영주가 되는 건 장남인 파오루였고. 리제는 그 빼어난 미모 덕분에 현왕의 직손. 그러니까 제13왕자의 첩의 자리를 약속 받았다.
비록 제13왕자가 왕위 계승권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고, 40을 바라보는 고령에 선천적인 지진아였지만. 현왕의 직손과 연을 맺게 된다는 건 벽지의 귀족에게 큰 행운이었다.
내년.
그러니까 리제가 18살이 되는 해에 수도로 가게 될 예정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리카 섬을 군림하고 있는 갈라우드 가문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별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레오번을 괴롭히는 이유는 확실히 존재했다.
“리제 아가씨…… 첩의 자리를 약속받았다고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왕궁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쫓겨나는 첩이 수십 수백 명입니다. 수도에 가면 리제 아가씨만큼 아름다운 숙녀들이 차고 넘친단 말입니다.”
“그래? 쫓겨나면 모험가나 할까? 어때, 시릴스?”
리제는 고개를 돌려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는 차가운 이미지의 여성이 조용히 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리제의 전속 호위 무사인 시릴스였다.
시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언제든 아가씨를 따르겠습니다.”
“팀 결성이네! 아, 레오번도 불쌍하니까 동료로 끼워 줄까?”
“농담 들을 기분이 아닙니다! 리제 아가씨. 작금의 행동들이 영지의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헤아리지 못하시는 겁니까?”
레오번이 사뭇 진지한 얘기를 꺼내자 리제는 입을 삐죽 내밀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파오루 님께서 후대 영주가 되시고, 리제 님께서 제13왕자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이 섬의 백성들을 위한 일입니다.”
“아, 알았어…… 조신하고 정숙한 숙녀 말이지.”
“여자가 나서고 다니면 될 일도 안 됩니다. 자고로 현명한 여성은 부군을 보필하고 내조하며 기쁨을 얻는 법입니다.”
“네…… 조신! 정숙! 내조! 보필!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자아자!”
“그 대답의 절반만큼만 진심이었으면 좋겠군요.”
레오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방을 빠져나간 뒤 리제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시릴스는 그런 리제를 지긋이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는 아가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선택할 게 뭐가 있겠어. 레오번이 말이 다 맞는데. 귀족의 여식으로 태어난 이상 당연히 할 일이지.”
리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허름한 외투와 바지를 벗어 던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리제와 시릴스는 방에서 멀어져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발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리제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