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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61화 (6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61화

    아릿카사는 누구인가?(1)

    “쮸쮸!!”

    “이보게 그 전리품은 주군께 먼저 주는 게 낫지 않겠나?”

    “쮸!! 쮸, 쮸쮸쮸! 쮸!!”

    “아니, 이 늙은이한테 그렇게 화를 내봤자…….”

    스칼렛과 햄토리가 마주서서는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햄토리가 전리품 더미에서 뭔가를 찾아내 방방 뛰고 있는 참이었다.

    “우리 햄토리 형아가 요즘 오냐오냐해서 똥오줌 못 가리네. 강냉이 털어버리기 전에 3초 내로 가져와라.”

    “쮸…….”

    햄토리가 가져온 것은 검은 가죽띠였다.

    새까맣게 도색된 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팔찌라기엔 너무 둘레가 크고, 허리띠라고 하기엔 너무 작다.

    “아, 제필프의 최종선고군요. 이번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중에선 가장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루칸다가 뒤늦게 따라와 설명했다.

    “착용한 후에 원할 때 언제든지 갑주의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혈액의 공급만 충분하다면 별도의 수리도 필요없으니 꽤나 쓸만한 유물입니다.”

    “드디어 이것도 손에 넣었네…….”

    이걸로 내가 얻어낸 아리카 섬의 유물은 2개.

    세글리트의 미혹과 제필프의 최종선고.

    이 유물은 어떻게 사용할지 잠시 생각을 해보자.

    “이거 갖고 싶은 사람 없냐?”

    “쮸, 쮸쮸!!”

    “햄토리 넌 인마 안 돼. 이미 하나 줬잖아.”

    “쮸우우…….”

    햄토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물러났다.

    이걸로 남은 선택지는 루칸다나 스칼렛이다.

    제필프의 최종선고는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방어력을 얻게 되는 유물이다.

    루칸다와 스칼렛. 둘 다 생존력을 높여놔서 나쁠 건 없었지만.

    “나는 됐네. 그런 정체도 모르는 마구에 피를 빨리고 싶지도 않고.”

    “저 역시 흡혈귀 따위에게 줘서는 안 되는 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루칸다 네가 쓸래?”

    내가 그렇게 묻자, 루칸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게도 저는 제필프와 상성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내가 쓸 수밖에 없나.”

    솔직히 말해서 내가 입는 것보단 전열에서 몸을 굴려가며 싸우는 야전 지휘자들에게 주는 게 효율적일 것이다.

    하지만 챔피언 둘 다 받기를 거부하고, 햄토리에게 몰빵해주는 것도 좀 그러니까.

    잠깐 제필프의 최종선고 성능이나 확인해 보자.

    [제필프의 최종선고]

    [착용 조건 : 레벨48, 근력 25]

    [방어력 : 480]

    [추가 체력 : 300]

    [추가 근력 : 40]

    [추가 민첩 : 30]

    [상태이상 저항 : 50%]

    [내구도 : 0/0]

    [옵션1 : 영원불멸 -장착자의 혈액이 공급되는 한 이 갑옷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옵션2 : 블러드스테인-피해를 상쇄하는 대신 혈액을 소모합니다.]

    [옵션3 : 오버도즈-대량의 혈액을 소모하여 근력과 민첩을 대폭 증가시킵니다.]

    [옵션4 : 혈액 갈취 -적을 처치할 때마다 혈액의 1%를 흡수합니다.]

    [정보 : 메르키나 지방의 윤왕 제필프는 순수하게 정제된 희생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라고 믿었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욕망과 요소가 희생의 정제를 가로막는 방해물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유지가 현화한 이 무구는 당신을 제필프의 재판장 위에 올릴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희생할 수 있는가?]

    ‘옵션 진짜 생각없이 만들었네. 이런 사기템을 수십 개나 뿌려놨는데…….’

    혹시나 다른 하이브 마인드 놈들이 유물을 손에 넣었을까봐 걱정이 될 지경이다.

    제필프의 최종선고만 보더라도 밸런스 파괴의 주역이 될 정도가 아닌가?

    “그런데 이거 어디에 차는 거야?”

    “어디에 차든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만.”

    손목이나 발목에 차기엔 너무 크고, 허리에 차기엔 너무 작다. 오거 같은 놈들은 팔목에도 찰 수 있겠지만.

    대충 버클을 풀러 목에 두르자 조금 헐렁하지만 딱 맞아 떨어졌다.

    “무슨 초커 같네.”

    “이제 초기 형상을 정하면 장착이 완료됩니다. 머릿속에 있는 전투에 적합한 갑주의 형상으로 변환되니까요.”

    “전투용…… 전투용이라.”

    거기까지 생각한 직후.

    어떻게 디테일한 형상을 생각할 새도 없이 초커에서 검고 찐득한 콜타르 같은 액체가 콸콸 흘러 나왔다.

    “우왁!?”

    순식간에 몸으로 퍼진 액체가 꿈틀거리더니, 이내 의복 같은 형상을 갖췄다.

    “그게 무슨 의복 양식인가? 기괴한 형태로군.”

    “각하…… 그건 갑옷이 아니라 제복입니다.”

    “아니, 나도 갑옷으로 하려고 했는데 이게 멋대로.”

    루칸다의 말대로 군의 제복 형태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이쪽 세계관에 전혀 걸맞지 않게도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장교복 같은 차림새다.

    ‘내 머릿속에 있던 전형적인 전투복이 이런 형태라서 그런가?’

    잿빛을 살짝 머금은 칠흑색 제복이다.

    금빛의 체인이라던가, 간결한 패턴이 포인트로 들어가 있었지만 기본 베이스는 흑색.

    야전 코트는 이 몸에 꽤 크게 제단되어 망토처럼 보일 정도다. 투구 대용인지 각모까지 머리 위에 얹어져 있었고 말이다.

    “형태야 어찌되었든 제대로 기능만 하면 그만이지.”

    이걸로 방어력도 챙겼고, 나머지는 북동부의 둥지를 빠르게 통합하여 덩치를 갖추는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각모를 고쳐 쓰며 발밑 아래로 펼쳐진 아리카 섬의 전경을 둘러봤다.

    “자, 그럼 우리의 이웃사촌들에게 북동부의 주인이 누군지 알려주러 가야지.”

    카타쿨라와 갈라우드.

    어느쪽이 먼저 참지 못하고 나설지 기대하며 작업을 개시해 보자.

    * * *

    누자베스의 군세는 순식간에 아리카 섬의 북동부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안정화된 초석 수급으로 대규모 구울 머스킷티어 부대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다른 둥지의 병력을 일방적으로 짓밟을 수 있었다.

    남은 초석을 에르바키나 연맹에게 매각하여 재정적 여유를 갖춘 765호 둥지는 보급 걱정 없이 쉴 새 없이 전투를 속행해 나갔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바짝 말라 있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아리카 섬의 북동부를 차례차례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북동부에 자리를 잡았던 다른 하이브 마인드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해본 채 누자베스의 군세에 의해 짓밟혔다.

    “카타쿨라는? 카타쿨라는 뭘 하고 있는 겐가! 동부의 안정화를 약속하지 않았나!!”

    아리카 섬의 영주 ‘갈라우드’는 펄쩍 뛰며 소리쳤다. 굴러다닐 만큼 뒤룩뒤룩 살찐 몸뚱이가 출렁였다.

    오늘 보고받은 북동부의 이변은 도저히 경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갈라우드는 이미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골칫거리는 하이브 마인드 카타쿨라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갑자기 신흥 하이브 마인드가 나타나 무서운 기세로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니!

    “그게…… 일전에 섬에 도착했던 모험가 팀이 카타쿨라의 둥지 공략에 나선 모양입니다. 현재 그 모험가 팀을 저지하느라 미처 북동부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하필이면, 이럴 때……!”

    갈라우드는 처참한 심경이었다.

    왕명을 수행하는 모험가 팀만 아니었어도 당장 섬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카타쿨라의 편의를 봐줬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도착한 모험가 팀은 왕령 직계.

    영주인 갈라우드가 둥지 토벌을 반려할 수 없는 상대였다.

    “자경단은? 어째서 자경단만으로는 진격을 저지할 수 없는 것인가?”

    갈라우드가 그렇게 물었지만.

    상황을 살피고 왔던 수색대 대원은 말하기 껄끄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실은…… 대다수의 마을에서 저항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개소리야!! 마물놈이 마을에 쳐들어왔는데 어째서 항전하지 않는단 말이야!”

    갈라우드가 답답함을 토해내던 와중.

    누자베스는 마침 무혈입성한 굴덴 마을의 중앙광장에 서서 주민들과 마주했다.

    둥지와 가장 가까웠지만 이제야 점령하게 된 참이다. 칼처럼 사열된 마물 부대의 사이를 지나, 칠흑색의 제복을 걸친 누자베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굴덴 마을의 주민들은 저마다 복잡한 심정을 드러내듯 탄식을 토해냈다.

    어쩌면 안도의 한숨이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누자베스…… 자네가 하이브 마인드였다니.”

    굴덴 마을의 촌장 바커스는 놀란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실력과 열의를 갖춘 어린 모험가라고 생각했던 누자베스가 실은 마물들의 전쟁 군주. 하이브 마인드였다니.

    “지금까지 속여서 죄송합니다, 촌장님. 그리고 오늘의 현명하고 용기 있는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누자베스는 점령한 마을 주민들을 난폭하게 대하지 않았다.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안전을 보장했고, 약탈과 파괴는 일절 없었다.

    굴덴 마을의 촌장 바커스도 주변 마을의 소식을 듣고, 순순하게 투항했던 것이다.

    누자베스는 마을 주민들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죽어도 마물에게 지배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은 지금 나서도 됩니다.”

    그 누구도 앞으로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누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말했다.

    “좋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일 역시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영주의 지배를 받든, 마물의 지배를 받든 말이죠.”

    누자베스는 궐련을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여러분의 곁에 머물 것이고, 평생 일궈낸 삶의 터전이 변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누자베스는 모여 있는 마을 주민들을 한 사람씩 유심히 살피며 이어 말했다.

    “어디에 달려 있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이데올로기를 위해 용감하지 마십시오. 이념과 사상은 가진 자들의 사치품입니다.”

    누자베스의 말에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그의 목소리에 담긴 자비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분이 협조적이라면 제가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여, 영주의 군대가 온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누자베스의 군세에 협조한 마을들은 이후 영주에게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마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겠습니다. 스텔라 님의 이름에 맹세코 무고한 희생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자베스는 짐짓 한 마디를 끊은 후 옅은 미소와 함께 다음 말을 토해냈다.

    “스스로 검을 쥘 수 없는 백성을 향해 저열한 보복을 가하는 영주에게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런 영주의 보복이 두렵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지금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모두가 죽을 때까지 의미없는 항전을 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이견은 없었다.

    누자베스는 거기까지 말한 후 급조한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 직후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이 한 마리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타쿨라의 사자가 도착했습니다. 현재의 둥지 확장이 충분히 위협적이며, 선전포고 행위로 해석될 수 있으니 카타쿨라와 적대할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확장 행위를 멈추라는 전언입니다.”

    “그 새끼 잡아 놨냐?”

    “예, 카타쿨라의 사자가 각하에게 직접 전언을 전하겠다고 해서 남아 있습니다.”

    “그대로 살려놔. 내가 확인한 뒤에 카타쿨라한테 반송해야 되니까.”

    “명을 받들겠습니다.”

    누자베스는 각모의 챙을 푹 눌러서 눈빛을 가렸다. 적어도 지금 만큼은 굶주린 포식자의 눈빛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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