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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60화 (60/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60화

    결전(4)

    “이럴 리 없어…… 이럴 리 없다고! 내가, 내가 패배할 리가……!!”

    701호 둥지의 심부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아비엥이 절규했다. 절대적인 규모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701호 둥지의 병력은 765호의 군세에 의해 차례차례 무너져 가고 있었다.

    믿고 있었던 분다조차 일격에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아리카 섬에서는 무상성일 것이라 예상했던 머스킷티어 부대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

    값비싼 돈을 내고 도입한 대포 조차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765호 둥지의 박격포 부대가 가장 먼저 대포를 노려 파괴했으니까.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사크바하는 뭘 하고 있는 거냐! 당장 누자베스를 찾아내 처리한다면…….”

    하이브 마인드만 처리하면 게임은 끝이다.

    아무리 전략적 열세 상황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비엥은 집게발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마인드 모드를 다시 활성화시키려 했지만.

    “똑똑.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찾아 왔습니다. 잠시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

    심부의 입구 부근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비엥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자.

    선이 고운 소년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날이 바짝 선 검을 든 채로.

    “둥지 방위 병력까지 모조리 쏟아 부었더라?”

    덕분에 누자베스는 별 고생도 않고 701호 둥지의 심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칼날에 찢겨 나간 고블린 시체를 아비엥의 앞으로 휙 던지며 누자베스가 빙긋 웃었다.

    “누자베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옛성자의 변치 않는 가르침에 대해 가르쳐주지.”

    “입 닥쳐라, 개자식! 죽여버리겠다!!”

    아비엥이 누자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집게발을 휘둘러 누자베스의 머리를 노렸지만!

    휙!

    터엉!

    누자베스는 아비엥의 공격을 어렵지도 않게 피하며 검을 치켜들었다.

    콰득!

    내리 꽂힌 누자베스의 검은 아비엥의 다리 하나를 끊어냈다. 절단면에서 녹갈색의 피가 솟구쳤다.

    “크아악! 으아아악!! 자, 잠깐! 잠깐…… 대화를, 대화로 해결하도록 하자.”

    아비엥은 벽쪽으로 물러나며 태세를 전환했다.

    다른 하이브 마인드들과 달리 누자베스는 전투 능력을 갖춘 개체다.

    대다수의 하이브 마인드는 고블린 한 마리에게도 고전할 만큼의 전투력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아비엥이 누자베스와 1:1로 싸워 이길 확률은 한없이 낮았다.

    “무, 무승부. 무승부를 제안한다. 그래, 누자베스 이 아비엥은 너를 높이 평가한다!”

    벽의 바짝 내몰린 아비엥은 회유를 시도했다.

    누자베스도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닌지, 치켜들었던 검을 내려놓고는 잠시 아비엥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석 생산량의 2할을 넘겨주지. 그리고 우리는 전략적 동맹을 맺는 것이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카타쿨라 놈도, 인간 영주 녀석도 적수가 아니다!”

    아비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일단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

    그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목숨만 부지한다면, 오늘의 굴욕을 갚아줄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게다가 나는 에르바키나 연맹의 지원을 받는 몸이다. 나와 함께 한다면 누자베스 네게도 혜택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 만약 나를 죽인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다. 에르바키나 연맹의 보복을 감당할 수 있겠나?”

    에르바키나 연맹이 애써 키운 고객을 죽인다면 그 후폭풍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를 들었다면 합리성을 지닌 하이브 마인드가 취할 행동은 뻔했다.

    아비엥은 누자베스를 완전히 설득했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보호하듯 치켜들었던 집게발을 내리며 누자베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주 얘기가 안 통하는 얼간이는 아니었군. 좋아, 나를 돕는다면 이런 코딱지만 한 섬은 넘겨줄 수도 있다. 이 아비엥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본도! 아리카 섬은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카 섬은 내가 직접 마왕 폐하께 말씀드려 누자베스 네 영지로 만들어주지. 어떤가? 만족할만한 제안이 아닌가?”

    “뺨을 맞았으면 반대편 뺨도 내밀어라.”

    “어, 어……? 캬아아악!!”

    우드득!

    이번엔 누자베스의 검이 아비엥의 오른쪽 집게발을 잘라냈다.

    아비엥은 지면을 뒹굴며 바둥거렸다.

    “만족? 이런 쥐꼬리만한 섬에서 만족할 것 같냐?”

    “크, 크핫! 본도까지 넘보던 것인가. 욕심이 과하다, 누자베스!!”

    하지만 누자베스의 눈빛에 어린 탐욕은 ‘본도’라는 단어에도 만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지금 저 탐욕스러운 눈은 이 세상 전체를 집어 삼켜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 번뜩였다.

    “미, 미친새끼…….”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탐욕의 깊이가 다르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저열한 욕망의 규격 자체가 다른 생물체다.

    도저히 같은 하이브 마인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유언치고는 너무 쌈마이한데. 뭐, 그래도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공짜로 얻은 목숨이잖냐. 갈 때도 노마진으로 가는 법이야.”

    푸욱!

    누자베스의 검이 아비엥의 가슴을 깊숙히 찔렀다.

    “오우, 아주 황장이 눅찐하네.”

    누자베스는 검에 묻은 아비엥의 피를 털어내며 마인드 모드를 활성화시켰다.

    아리카 섬의 북동부를 군림할 자가 누구인지 결정된 순간이었다.

    * * *

    결착이 난 후.

    누자베스는 동이 트기 시작한 비탄의 숲 일대를 돌아다니며 부대의 피해 상황을 점검했다.

    “언더 케이지 전사자 38마리. 부상자 11마리.”

    “그레이브 야드는 구울의 절반 정도가 당했네.”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전사자는 없습니다. 고블린 서비스 부대에서 전사자 20마리. 부상자 6마리입니다.”

    “우린 다 멀쩡해! 밤새도록 잠을 못자서 좀 졸리긴 하지만 말이야!”

    대충 계산해봐도 둥지 병력의 절반이 손실되는 큰 싸움이었다. 아비엥의 둥지 병력은 절반 이상이 남아 있었지만, 아비엥의 사후 통제력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걸 모조리 생포한 참이었다.

    “분다는 처리했고. 사크바하는?”

    “생포했습니다.”

    누자베스는 루칸다와 스칼렛을 대동하여 사크바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루칸다의 말대로 사크바하는 전신을 포박당하여 무릎을 꿇은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이긴 아깝네.’

    누자베스는 사크바하를 바라보며 그런 감상을 떠올렸다.

    비록 적의 챔피언이었지만 그간 사크바하가 보여줬던 능력은 둥지의 관리자인 누자베스가 보기에 매력적인 점이 많았다.

    아비엥이 죽고 더 이상 사크바하와 적대할 이유도 없어졌다.

    누자베스는 사크바하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싸울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그 능력을 나를 위해 사용할 용의가 있냐?”

    사크바하는 누자베스를 똑바로 올려다 봤다.

    사크바하의 눈은 패잔병의 눈빛이 아니었다.

    비굴하지도 않았고, 자비를 바라는 기색도 없었다.

    “후환은 남겨두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전쟁 군주여.”

    “그래?”

    누자베스가 오른손을 들자.

    대기하고 있던 구울 머스킷티어들이 총구를 들어 사크바하를 겨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부탁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일단 들어는 줄게.”

    “아비엥이 채굴을 준비하던 다음 유물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정보를 각하께 숨김 없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게 원하는 건?”

    “왕녀 전하를 시해한 배신자와 결착을 짓고 싶습니다.”

    누자베스가 고개를 돌려 루칸다를 바라봤다.

    루칸다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사크바하가 그렇게 말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내키지 않는데. 솔직히 얘기해주면 되잖아?”

    누자베스가 옆으로 다가온 루칸다를 향해 작게 말했지만.

    “늙고 지친 자의 최후엔 신이 필요한 법입니다, 각하. 눈에 보이는 명확한 신 말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무엇이 자비로운 결정일지 헤아려 주십시오.”

    “그러냐.”

    누자베스는 혀를 작게 차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싸울 이유는 없었다.

    루칸다와 사크바하.

    두 수컷이 싸워야 할 이유도 없었고,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합리적 이점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 결착이 나든 말이다.

    물론 그런 질문을 구태여 입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그딴 질문은 암컷이나, 암컷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정신적으로 거세당한 수컷이나 하는 질문일 테니까.

    쉭!

    루칸다가 검을 휘둘러 사크바하를 포박하고 있던 오랏줄을 끊어냈다.

    그리고 고블린 한 마리가 빼앗아 놨던 사크바하의 공학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사크바하는 폴암을 받아들고는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던졌다.

    “다음 유물의 위치입니다. 이걸로 거래는 성사됐습니다.”

    보르가가 지면에 떨어져 구르던 양피지를 주워 누자베스에게 가져왔다.

    누자베스는 양피지를 펼쳐보지도 않고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루칸다와 사크바하를 위해 뒤로 물러났다.

    병력이 뒤로 물러난 후 동이 터오는 숲의 평야에서 루칸다와 사크바하. 두 수컷이 마주섰다.

    같은 곳을 바라보던 둘이었다.

    그런 둘이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는 것은 일종의 비극일 것이다.

    아이러니한 참상이거나, 혹은 얄궂은 드라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네놈이 전부터 싫었다.”

    “그건 초문인데. 내가 왕녀 전하를 죽이기 전부터였나?”

    “시답잖은 질투였지. 피르에나 님과 가장 가까웠고, 가장 신뢰를 받았던 건 유격대의 대원들 중 루칸다 너였으니까.”

    “나도 네놈이 싫었으니 피차일반이군.”

    “이유라도 있나?”

    “발냄새가 고약해서.”

    루칸다와 사크바하는 웃었다.

    어린 짐승들 같은 꾸밈 없는 웃음이었다.

    둘은 빛바랜 과거가 남기고 간 오랜 상처를 핥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그만큼 늙고, 지쳐 있었으니까.

    두 수컷의 눈은 스치고 지나갔던 찰나의 추억으로 향했다.

    그들이 잃어버렸던 낙원의 풍경이었다.

    두 번 다시 발을 들이지 못할 낙원을 애도하듯 검을 치켜들었고.

    구릉선을 따라 아침의 햇살이 붉게 번지기 시작한 것과 동시였다.

    사크바하의 일격은 루칸다의 가죽 망토의 끝자락을 베어냈고, 루칸다의 검은 사크바하의 목을 정확하게 갈라냈다.

    쿠웅!

    묵직한 소리를 울리며 사크바하가 뒤로 쓰러졌다. 반쯤 절개된 목에서는 검붉은 혈액이 솟구쳤다.

    “사크바하…….”

    루칸다는 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사크바하는 이윽고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그토록 꿈꿨던 낙원의 저편을 보고 있는 겐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용서받을 자격조차 박탈당한 짐승에게 목놓아 울 수 있는 권리 따윈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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