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59화
결전(3)
터엉!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햄토리의 몸이 크게 밀려났다. 방패로 막아냈다지만, 팔이 부러질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쮸.”
하지만 방패 너머로 보이는 햄토리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져 있었다.
701호 둥지의 제3부대.
그리고 그 부대를 이끌고 있는 사크바하를 가로막은 것은 햄토리의 언더 케이지 부대였다.
첫 번째 충돌에서 언더 케이지 부대의 렛맨 전사들이 십수 마리가 죽었지만. 충돌 이후 백병전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사크바하가 이끄는 고블린 머스킷티어는 280여 마리. 대략적으로 언더 케이지 부대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아무리 저급한 수준의 고블린으로 구성된 부대라고 해도 이 정도의 규모차는 무마하기 힘들다.
심리적인 위축은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니까.
승산 따윈 보이지 않는, 죽음이 확정된 전장.
그런 환경에서 용맹할 수 있는 병사는 많지 않다.
하지만.
“쮸! 쮸쮸!”
“쮸!!”
렛맨과 고블린의 종족적 특성은 확연했다.
불리한 전황에서 전의를 급속하게 잃는 고블린과 달리. 렛맨은 철저한 위계 질서를 통해 결속하는 종족이다.
가장 먼저 햄토리가 맹렬한 방패 돌격을 가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주저나 거리낌도 없이 적진으로 돌진한 것이다.
렛맨 전사들의 눈에 보이는 건 그게 전부다.
전황이 어떻고, 병력의 규모라던가 전술적 상성 관계가 어떻다는 둥의 판단이 불가능하니까.
우두머리가 당연하다는 듯 덤볐다는 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란 의미다.
이길 수밖에 없는 전투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언더 케이지 부대가 방패를 앞세워 돌격했고, 무서운 기세로 고블린 머스킷티어를 도륙하기 시작했다.
부웅!
사크바하는 폴암을 크게 휘두른 뒤 자세를 고쳐 잡았다.
‘죽음조차 두려워 않는 기개라…… 훌륭하군.’
언더 케이지의 부대장 햄토리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우두머리를 따라 맹목적으로 돌격하는 부대원들과 달리. 햄토리는 스스로 이 전투가 승산이 없음을 판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움직이기 위해 가장 먼저 죽음을 불사했다.
‘하지만 이 부대의 파훼법은 간단하다.’
우두머리의 목을 치는 순간 승패가 결정된다.
아무리 언더 케이지 부대가 하이브 마인드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고 해도.
우두머리가 죽는 걸 목격한 렛맨 전사들이 전투를 속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설령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전투일지라도.
우두머리가 죽는 순간 렛맨 전사들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원한은 없지만 여기서 죽어줘야겠군. 최후의 성전을 위한 밑준비를 위해 말이다!”
철컹, 철컹!
폴암 자루에 달린 슬라이드가 연속으로 제껴지며 두 발의 탄피를 배출해냈다.
사크바하의 폴암은 대륙의 공학 기술인 ‘히팅 블레이드’ 기술까지 탑재된 병기다.
수십 센치의 강철판까지 절단해낼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쮸, 쮸우.”
햄토리는 목을 양옆으로 꺾어 풀어준 후 방패를 높게 치켜들었다.
물러설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 * *
‘불멸의 딸이여. 영원한 밤을 걷는 원죄의 상속자여. 이 검이 기약없던 용서의 권리이며, 그대의 죽음이노라.’
스칼렛은 먼옛날 자신을 죽음까지 몰아넣었던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거칠었던 숨소리와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에 이르러서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둥지를 나서기 직전.
누자베스가 무심하게 내던진 눈빛이 과거의 기억과 겹쳐졌다.
‘언젠가 본명을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만한 남자가 되겠다라…….’
스칼렛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늙은이가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면 좋겠군.’
과연 누자베스가 자신을 한번 더 두근거리게 만들어줄만한 사내일지 내심 기대를 품고 있었다.
아직도 듣지 못한 그 검의 이름에 대하여,
스칼렛은 아주 약간의 동경을 품었다.
“주저 앉지 않을 정도로만 등을 밀어줘야겠지.”
스칼렛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아비엥의 제1부대가 100여 미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산개하여 각지에 은폐하고 있는 그레이브 야드와 상반될 정도로 깔끔하게 정렬된 채로 말이다.
“하이브 마인드의 지배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해본 적은 없지만.”
스칼렛의 눈에서 구혈빛의 안광이 흘렀다.
나르시안의 성배를 사용하여 잃었던 혼령을 일부 회복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사용하지 못했던 능력도 되찾았다.
칠흑 같은 밤의 숲.
수목 사이로 흐르는 붉은 안광은 백여 미터 바깥에서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고작해야 여덟 기둥 중 하나인 아일라드의 잔재주로 만들어낸 장난감이지.”
최전열에 나와 있던 고블린 머스킷티어들이 스칼렛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와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스칼렛의 뒤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 아비엥의 군세 쪽으로 향했다.
타다다다다당!
머스킷티어 부대의 일제 사격이 가해졌고.
스칼렛은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수십여 발의 은탄에 덮쳐졌다.
은탄에 꿰뚫렸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었다.
그야말로 갈기갈기 찢겨져 사체의 파편이 사방에 흩뿌려졌으니까.
스칼렛이 서 있던 곳에 짙은 피안개가 자욱이 피어 올랐고, 그대로 바람을 타고 흘렀다.
“키륵?”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 직후였다.
전열에 나서 있던 고블린 머스킷티어들의 눈이 풀렸다. 초점을 잃고 흐릿해지나 싶더니,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다시 장전을 시작했다.
부스스.
수목 속에 숨어 있던 그레이브 야드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해야 100여 마리.
중앙을 가로질러 진격한 아비엥의 제1부대는 300여 마리에 달한다. 게다가 은탄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구울의 불사성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비엥은 1열을 뒤로 물리고, 2열을 앞으로 세워 사격을 가하려 했지만.
“키륵?”
“키륵! 키륵키륵!”
1열의 고블린 머스킷티어들이 아비엥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장전한 머스킷을 아군을 향해 겨눴다!
[아비엥 : 이, 무슨……!!]
타다다다당!
1열의 일제 사격이 아군을 덮쳤다!
바짝 붙어 있는 거리에서 이뤄진 근접 사격이다. 피해가 적을 리 없었다. 순식간에 2열과 3열의 고블린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 총성을 신호탄 삼아 그레이브 야드의 구울들이 사방에서 원호 사격을 개시했다.
사격을 가해 제압하려 해도 레드문 포션으로 기동성을 극대화한 구울 부대는 얄미울 정도로 잽싸게 도망 다니고 있었다.
“캬아악!”
“키륵!”
다행히도 아비엥의 통제에서 벗어난 고블린들은 아군을 공격하다가 이내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쓰러진 고블린들은 코와 입, 그리고 귀에서 피를 흘리며 괴로운 듯 경련했고.
퍼엉!
쓰러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폭탄처럼 폭발했다!
전장은 순식간에 비명과 공포로 물들었다.
시체가 폭발하는 광경도 충격적이었고, 위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이 괴현상이 악몽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체가 폭발할 때 피를 뒤집어 쓴 고블린들 역시 모두가 똑같은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아군을 공격하다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
죽은 뒤엔 시체가 폭발한다.
시체가 폭발할 때 가까이 있던 고블린은 죽거나, 피에 감염되어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아비엥 : 분다! 분다는 뭘 하고 있는 거냐! 당장 중앙의 원호를……!]
콰앙!
거기에 쉴 새 없이 내리꽂히는 박격포 포격까지!
이제 믿을 건 제필프의 최종선고로 무장한 오거 분다뿐이었다.
* * *
“크워어어어!”
부우웅!
분다의 철제 메이스가 밤의 허공을 갈랐다.
우직끈!
메이스가 스친 곳에 있던 거목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이봐, 덩치 형씨. 왜 그렇게 화가 많이 났나?”
루칸다는 분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내며 거리를 벌렸다. 메모리얼 전투에 참가하기 이전에 비해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이전의 루칸다도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더욱 여유가 생긴 듯한 모습이다.
“새로 산 옷이 촌스럽다고 암컷한테 차였나?”
“쿠워어어! 죽인다아아아!!”
“이런, 농담이었는데 진짜인 모양이군. 확실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블랙은 소화하기 힘든 패션이야.”
루칸다는 분다가 입고 있는 갑옷 ‘제필프의 최종선고’를 바라봤다.
‘옛동포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군.’
잠시 옛기억을 곱씹은 후 다시 분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는 20미터.
하지만 제필프의 최종선고로 무장한 분다라면 1초도 채 걸리지 않아 도약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 갑옷이 한낱 오거 따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만.”
3인의 윤왕 제필프.
제필프의 최종선고는 그가 남긴 3개의 비보 중 하나였다.
루칸다는 허리춤 오른편에 차고 있던 흑요석 검을 손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키이이이잉.
날카로운 공명음과 함께 첫 번째 흑요석 검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제필프의 비보는 희생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는 자를 위해 마련된 유산이다. 그 누구도 동조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얻을 것이라곤 세간의 냉소밖에 없는 가엾은 놈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지.”
그것이 제필프의 유지를 이어나갈 새로운 그릇이 갖춰야 할 미덕이자 덕목이었다.
툭툭.
두 번째 흑요석 검을 두들기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문양이 빛을 발했다.
두 자루의 흑요석 검은 서로의 빛에 공명하듯 통곡하는 소리를 토해냈다. 느릿하게 웃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빠르게 오열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도 없지.”
“쿠워어어!!”
쿵, 쿵쿵!
분다가 메이스를 치켜들며 루칸다를 향해 뛰쳐들었다. 오금이 저릴 정도의 위압감.
하지만 루칸다는 느릿하게 검을 뽑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내가 직접 벗겨줄 수도 있는데. 수컷 옷을 벗겨본 적은 없어서 살짝 거칠지도 모르겠지만.”
밤의 숲을 가로지르던 바람이 멈췄다.
시공이 정지된 듯 고요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분다가 다음 발걸음을 내딛었다.
쿵.
지면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분다는 드디어 루칸다의 검이 닿는 거리까지 도달했다.
“네 죽음의 이름이 ‘루아 카날다’였음을 기억하여라. 그림자의 권세가 건재함을 지옥의 밑바닥에서도 알게 되리라.”
얼어붙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루칸다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뒤로 돌아서 있었다.
“끄륵?”
분다는 자신의 가슴팍을 손으로 더듬어 봤고.
절단면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루칸다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쩌엉!
하늘에서 내리 꽂혀 땅을 꿰뚫는 절단선이 분다의 몸을 갈랐다.
아니.
절단선이 갈라낸 것은 분다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 지면이 갈라졌고,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반으로 쩍 쪼개졌다.
“크, 카아아악……!”
정확하게 반쪽으로 갈라진 분다가 최후의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루칸다는 주머니에서 담배잎을 한 장 꺼내 우적우적 씹으며 걷기 시작했다.
아직 처리해야 될 잔존 병력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