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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57화 (5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57화

    결전(1)

    메모리얼 전투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러니까 루칸다가 내 명령을 수행하던 도중 몰래 유격대와 접촉하여 성배를 훔쳐왔다고 하더라도.

    ‘피르에나 왕녀가 맞이하게 될 운명은 변하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이건 그저 루칸다가 지니고 있던 일말의 미련이었고, 의미 없는 속죄이자, 죄악감의 되새김질에 불과하다.

    나르시안의 성배를 바라보며 그런 감상을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성배 밑에 적혀 있는 재밌는 메시지까지.

    ‘마치 나를 알고 있는 것 같네.’

    이건 앞으로의 메모리얼 전투를 수행할 때 도움이 되는 정보일지도 모른다.

    일단은 기억해 두자.

    피르에나 왕녀가 말한 ‘진짜 전장’이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 성배를 어디에 쓸까? 초극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볼래? 없어?”

    내가 그런 농담을 던지자, 루칸다와 스칼렛이 실소를 머금었다.

    “그럼 내가 초극할 수밖에 없겠네.”

    물론 이것도 농담이다.

    내가 알기론 ‘초극’이란 인간을 초월한 정신력을 소유한 자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시험이다.

    나 같이 평범한 일반인이 도전한다고 해도 결과는 뻔하지 않겠나?

    “마땅히 쓸 곳이 없다면 내게 주는 건 어떤가?”

    “오, 스칼렛. 재도전 희망이야?”

    “그럴 리 없지 않나. 그저 이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를 어느 정도 수복할 수 있는 정도일세.”

    “흠…….”

    확실히 이쪽은 나르시안의 성배를 쓸 구석이 없다. 물론 두고두고 챙겨 놨다가 먼 훗날 초극에 도전할 가능성도 있지만.

    ‘스칼렛은 내 부대의 핵심이 된 그레이브 야드의 야전 지휘자. 아비엥과 결착을 짓기 전에 강화를 시켜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아비엥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현재 내가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게 최선일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성배를 스칼렛에게 내밀자, 스칼렛이 받아 들기 위해 양손을 뻗어 왔지만.

    휙.

    다시 성배를 이쪽으로 당겼다.

    스칼렛은 눈살을 찌푸렸고, 다시 성배를 내밀자 받으려 했지만.

    휙.

    “공짜로 주면 재미없잖아?”

    “그 성배는 본래 내 아버지의 물건일세.”

    “엄연히 소유권을 따지자면 그렇지만. 지금은 존엄하신 전쟁 군주 누자베스 님의 전리품이지! 싫으면 힘으로 뺏어 보던가.”

    “진심인가?”

    “……아뇨. 장난이에요. 그런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지 마세요…….”

    지금 요실금 걸린 중년 남성처럼 살짝 지렸으니까.

    “아니, 그래도 이 정도로 가치 있는 전리품을 주는 건데…… 어느 정도 감사의 표시 정도는 해줘야 되는 거 아냐?”

    “이 늙은이한테 뭘 바라나?”

    “본명을 알려주는 게 어때?”

    스칼렛은 내 쪽으로 뻗었던 팔을 거두며 눈을 살포시 감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흡혈귀가 본명을 알려준다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혈족이 아닌 존재에게 본명을 스스로 알려준다는 건 피의 유대보다 더 강한 족쇄를 스스로의 목에 채우는 것과 같네.”

    “한 마디로 아직 내가 스칼렛 네가 충성을 다하기엔 부족한 놈이란 말이지.”

    “자기 주제는 잘 아는군.”

    스칼렛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뒤 심부의 방을 잰걸음으로 빠져 나가버렸다.

    “각하, 너무 상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원래 흡혈귀란 족속은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놈들입니다.”

    “루칸다. 그런 식으로 위로하지 마라. 그러니까 마치 사귄 적도 없는데 까인 놈 같잖아.”

    “실제로 그렇습니다.”

    “너무 상냥하게 위로해줘서 눈물이 다 나네…… 원래 각하가 잘 안 우는 사람인데…….”

    루칸다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스칼렛이 진짜 나르시안의 직계 자손이라면 지금의 반응이 이해가 갑니다.”

    “워낙 대단하신 분의 따님이라 나 같은 놈은 거들떠도 안 본다는 건가? 잠깐 놀아주고 있는 엔조이 관계에서 만족하란 말이지.”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어지간한 정신력으론 본명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광란하다 죽을 가능성이 다분하니까요.”

    진짜 스칼렛이 나를 배려하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배를 들고 나와 스칼렛의 뒤를 쫓았다.

    마침 스칼렛이 이쪽을 발견하고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노려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휙 돌리며 못 본 척을 했다!

    이건 적지 않게 상처를 받는다만.

    들고 있던 성배를 스칼렛을 향해 던졌다.

    스칼렛이 받아들더니, 이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명은 알려주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네만.”

    “조금만 기다려 봐. 머지않아서 본명을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만한 놈이 되어 있을 테니까.”

    자, 이제 아비엥과의 결전이나 준비하자.

    * * *

    먼저 새롭게 편성된 드워프 부대를 확인해 봤다.

    [제3부대 : 비비큐 클럽]

    -부대장 : 두르난(드워프 화기 사수)

    -부대원 : 드워프 화기 사수 19체, 고블린 살수 5체

    -정보 : 오 스텔라 맙소사! 도대체 어떤 사악한 존재가 이런 끔찍한 부대를 고안해 낸 것일까요? 이 집단은 언제 어디서든 지옥의 바베큐 파티를 개최할 수 있습니다. 예? 고기는 물론 현지 조달입니다.

    드디어 내 둥지에도 곡사 화기 부대가 생기다니…… 감동에 그만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코볼트들과 빌어먹을 지하 수도를 전전하며 시궁창쥐를 때려잡던 것이 엊그제의 일 같은데 말이다.

    ‘언더 케이지, 고블린 서비스, 비비큐 클럽.’

    이걸로 간신히 필수적인 병종을 모두 모았다.

    여기에 후방 침투나 암살을 주된 임무로 하는 루칸다의 직계 부대 ‘비르겐슈타인’과 스칼렛의 전열보병 부대 ‘그레이브 야드’가 추가된 형태다.

    ‘코볼트 작업대는 페쉬나이트 광산 개발에 착수할 때 쯤 확장해야지.’

    그때가 되면 대장장이 빌리도 꽤나 바빠질 것이다. 이쪽은 페쉬나이트 원석을 그대로 매각하는 게 아니라, 철괴 형태로 가공하여 잔뜩 쌓아둘 작정이니까.

    좋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병력을 둥지 주변에 배치한 상황.

    마인드 모드로 전환하여 일대의 동태를 살피고 있자, 바로 루칸다의 보고가 이어졌다.

    [루칸다 : 아비엥의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누자베스 : 내가 아까 슬쩍 쳐봤는데 그거 때문에 야마에 스팀 돌았나 봐.]

    아비엥의 둥지 입구에서부터 무장한 고블린 머스킷티어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벌집을 건드려도 저 정도 규모의 벌이 쏟아져 나오진 않겠지.

    어림잡아 확인해도 800마리가 넘는 규모다.

    아비엥이 이번에 급작스럽게 병력의 규모를 확장했다는 얘기를 길리도에게 들었는데, 꽤나 상상 이상이다.

    [누자베스 : 이야…… 병력 머릿수 좀 봐라. 미친 새끼, 저렇게나 병력을 모아 놨으니 자신만만한 거겠지.]

    그것도 박도나 죽창 같이 조잡한 무기로 무장한 고블린 부대가 아니라. 전원 머스킷티어! 전열보병이란 말이다.

    게다가 그 뒤로 10대가 넘는 대포가 따라 나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 정도 규모의 병력이면 어택땅만 찍어놔도 다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한 둥지의 관리자는 그냥 저 병력 목격하는 순간 쇼크사 확정이다.

    [누자베스 : 우리는 하꼬 둥지라 300마리도 채 안 되는데.]

    [스칼렛 : 게다가 은의 냄새가 나는군.]

    [루칸다 : 은탄은 브람스의 영지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머스킷 탄환에 은을 덧입혀 발포하면 흡혈귀들에게 치명적이었죠.]

    [누자베스 : 너무한다 진짜…… 800마리가 일제 사격하면 은탄 아니라도 죽을 텐데.]

    머리만 멀쩡하면 전투를 속행할 수 있는 구울이라고 해도 말이다. 머리가 멀쩡한가 아닌가의 수준이 아니라, 그냥 산산조각이다!

    [누자베스 : 얘들아 저거 봐라. 내가 살다살다 태닝한 오거는 처음 보네. 태닝 금발남은 들어 봤는데 태닝 오거는 진짜 처음 본다. 그런데 태닝하다가 기계가 고장났나 봐. 아주 숯검댕이를 만들어 놨네.]

    [루칸다 : 저 갑옷은…….]

    마지막으로 새까만 갑주로 전신을 뒤덮은 분다.

    그리고 사크바하가 둥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누자베스 : 루칸다 이번엔 오거 좀 맡아줘라. 나 저번에 저 빌어먹을 새끼랑 다이다이 뜨다가 황하강 건널 뻔했잖아.]

    [루칸다 : 제필프의 최종선고라……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요.]

    [누자베스 : 진짜? 테네브레 맙소사……!]

    시발!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아리카 섬에서 파낸 유물이라면 분다가 입고 있는 갑옷이 ‘제필프의 최종선고’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러면 루칸다가 분다를 묶고 있는 사이에 고블린 머스킷티어를 빠르게 정리하고, 화력을 집중하는 수밖에 없겠어.’

    과연 그걸로 저 빌어먹을 갑옷을 뚫을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금으로써는 취할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내가 녀석과의 결전을 준비한 것처럼.

    아비엥 역시 나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자베스 : 스칼렛? 상태는 좀 어때?]

    [스칼렛 : 무슨 상태 말인가?]

    [누자베스 : 아니, 성배 줬잖아. 막 파워업되고 그런 거 없어?]

    [스칼렛 : 손실됐던 혼령의 일부가 돌아온 것뿐일세. 다행히도 저런 순도 낮은 은쪼가리에 치명상을 입지 않을 정도는 됐군.]

    너무 짜다.

    나르시안의 성배 정도면 전성기 때의 힘을 되찾아서 다 때려 부숴버리는 전개를 기대했는데 말이다.

    이번에 이쪽이 메모리얼 전투로 얻은 소득은.

    고블린 서비스의 부대장 ‘보르가’의 무기가 업그레이드 된 것.

    박격포 부대인 ‘비비큐 클럽’이 새롭게 군세에 합류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르시안의 성배로 스칼렛의 힘이 조금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아비엥 쪽은 제필프의 최종선고인가. 병력의 규모도 소폭 상승됐고.’

    규모만 따지자면 아비엥의 군세가 내 군세를 3배나 압도하고 있는 상황.

    게다가 ‘제필프의 최종선고’로 무장한 오거 ‘분다’는 절반쯤은 무적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누자베스 : 브리핑대로 진행해 보자고.]

    [스칼렛 : 알고 있네.]

    [누자베스 : 그런데 루칸다. 그 오른쪽 눈은 언제 그런 거야?]

    [루칸다 : 아…… 이 상처는, 어? 오른쪽? 오른쪽…… 아, 젠장 오른쪽이었군요.]

    루칸다는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대답했다.

    [루칸다 :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면 눈알 하나나 둘쯤은 두고 다니게 되는 법입니다.]

    [누자베스 : 아, 그래…….]

    둥지에서 나온 아비엥의 병력이 가지런히 열을 맞춘 뒤 진격을 시작했다.

    ‘아주 맛있게 플레이팅해서 대접해주려는 모양이네.’

    매우 먹음직스러운 모양새다!

    역시 먹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도 있지 않나?

    딱!

    손가락을 튕긴 것과 동시에 내 둥지의 병력들 역시 지정된 위치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넌 뒤졌다, 아비엥 이 게새끼야.”

    아 욕설을 따로 검열할 필요는 없다.

    게새끼라고 했으니까 문제없었다.

    실제로 게새끼고 말이다.

    [누자베스 : 일단 조진 뒤에 생각해 보자고. 저 새끼를 간장게장으로 할지, 양념게장으로 할지.]

    요즘 트렌드는 간장게장 엔딩이었나?

    역시 간장게장 엔딩이 좋으려나?

    아비엥 최후의 단말마는 ‘크흑!’이 적당할 것 같았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누자베스 : 제군들. 눈이 부실 만큼의 공훈을 기대하도록 하지.]

    아비엥의 이야기에 에필로그를 두들겨 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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