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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56화 (5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56화

    쥐와 고양이(4)

    소환진에서 등장한 것은 20마리의 드워프 무리였다.

    140센치 남짓한 크기에 머리의 절반을 덮을 만큼 큼지막한 투구를 푹 눌러쓴 차림새다.

    풍성한 머리카락 만큼이나 풍성한 수염.

    꾹 다물어진 입을 보면 우직한 고집이 느껴지는 종족이다.

    “오, 여기가 새로운 부대로구먼!”

    “포격 지원은 맡겨 두게! 상대가 누구든 아주 개박살을 내주지.”

    “어허! 개박살이라니 말을 교양 있게 해야지.”

    “문명화된 드워프라면 조슬 까버린다고 하지. 전문 용어로 할례라고 한다네!”

    “그려그려! 껄껄! 우리한테 다 맡기게! 우린 아주 할례 전문가들이야!”

    음, 그래.

    눈앞에 나타난 20마리의 드워프는 모두가 베테랑 할례 전문가들이었다. 아비엥이 곧 맞이하게 될 포경 수술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도록 기도나 해주자.

    ‘분대 하나에 4명씩 배속된 거겠네.’

    그래서 5개 분대.

    총 20마리의 드워프가 보상으로 소환된 것이다.

    ‘포열 담당. 포판 담당. 포다리 담당. 그리고 한 놈은 포탄 담당이겠지.’

    각자 포열, 포판, 포다리, 그리고 포탄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거 무슨 원리야? 머스킷처럼 화약 쑤셔 넣고 터뜨리는 건 아닐테고.”

    내가 박격포의 포열을 가리키며 묻자.

    드워프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갸웃거리다 갑자기 일제히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화약? 이 친구가 아주 촌놈이구만! 그런 구시대의 유물과 드워프의 기술력을 똑같다고 생각하지 말게!”

    “이 박격포로 말할 것 같으면 드워프 최신 기술인 세틀라이트 압축 기술로 개발된 무기지! 포탄 제조에 마나석이 들어간다는 것만 빼면 발사 자체는 코스트 없이 반영구적으로 가능하네.”

    나름대로 희소식이다.

    혹시나 박격포 부대 운영에 화약이 소모된다면 지금의 재정 상황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을테니까.

    포탄 제조에 마나석만 쓴다면 이번 전투까진 어떻게든 물자를 조달해볼 수 있었다.

    “그럼 시험 삼아 한 번 쏴볼까?”

    마침 좋은 표적이 하나 있었다.

    * * *

    “드디어 손에 넣었다! 밤의 어머니께서 나의 손을 들어주신 것이다!”

    아비엥이 고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검은 갑주로 전신을 덮고 있는 분다가 서 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이 전신 갑주는 단순한 방어구가 아니었다. 각종 유물이 수없이 묻혀 있는 아리카 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우수한 유물.

    아리카 섬을 점령하기 위해 글로레나 왕조가 대륙에서 조달해온 마법 무구 중에서도 독보적인 성능을 지닌 물건이었다.

    제필프의 최종선고.

    서대륙의 전설적인 기사 로안이 생전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갑옷이다.

    장착자의 몸에 뿌리를 내려 혈액을 흡수하고, 흡수된 혈액 만큼 방어력이 강화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갑옷은 공격을 당하여 손상될 때마다 혈액을 사용해 스스로 수복한다. 오거인 분다에게 있어서 ‘제필프의 최종선고’가 흡수해가는 혈액은 미량에 불과하다.

    즉, 아무리 공격해도 뚫을 수 없는 무적의 갑옷이란 말이다.

    게다가 장착자의 움직임을 보조하여 신체 능력을 두 배 이상 강화시키는 능력도 있었다.

    인간인 로안이 사용했을 때도 최강의 성능을 보여주던 마법 방어구. 오거가 사용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위협적일지 상상만해도 흡족할 지경이었다.

    “큭, 크하하핫! 테네브레 님께서 이 아비엥의 승리를 바라신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 사용할 제물은 바로 누자베스였다.

    “오늘밤 끝장을 내주마, 누자베스. 편하게 죽을 순 없을 것이다. 당장 병력을 집결시킨…….”

    아비엥이 의기양양하게 사크바하를 향해 명령하려던 찰나.

    쿠웅!

    멀리서부터 폭음과 함께 둥지가 흔들렸다.

    아비엥이 눈살을 찌푸리며 둥지의 천장 쪽을 쳐다봤다.

    “역시나 섬의 북동 쪽은 지하 기반이 약하군. 누자베스 그 빌어먹을 버러지만 없었어도 지금쯤 카타쿨라의 남쪽 영지를 차지했을 텐데.”

    아비엥이 다시 사크바하를 향해 말을 꺼내려 했지만.

    쿠구구구궁!

    콰광!

    잇달아 폭음이 울리며 둥지 내부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둥지 내부의 병력들이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던 사이. 계속되는 충격으로 인해 둥지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르륵!

    “부, 분다아아!”

    무너져내린 돌더미가 분다를 덮쳤고, 분다가 순식간에 돌더미에 밑에 깔리며 쓰러졌다.

    “이, 이…… 이 미친 새끼가아아아아!!”

    이런 개짓거리를 하는 놈이 누군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누자베스의 소행이었다.

    * * *

    [누자베스 : 이야. 멀리도 날아가네.]

    마인드 모드로 박격포 분대의 시험 사격을 지켜보자 속이 뻥 뚫린듯 시원했다.

    이런 맛에 사이다에 중독돼서 사이다패스가 되고 그러는 모양이다. 내 둥지 위에서 아비엥의 둥지까지 다이렉트하게 후려 갈길 수 있다니!

    물론 둥지가 이 정도 포격으로 무너질 리는 없지만, 아비엥의 단잠을 방해할 정도는 되지 않겠나?

    ‘산악 지형에서 곡사 화기 부대를 손에 넣는다는 게 이렇게나 기분이 좋을 줄이야!’

    백주월한테 뒤질뻔 했지만 역시 메모리얼 전투에 참가했던 게 다행으로 느껴진다.

    ‘관측반은 부화장에서 고블린 살수를 더 뽑아내서 따로 운용해야겠네.’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 살수 수준까지는 사치다. 그것보다 성능이 떨어지더라도 관측 임무 정도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누자베스 : 아재들, 그만 쏴요. 이러다 포성애자 될 거 같으니까.]

    박격포 부대에게 사격 중지 신호를 내린 후 마인드 모드를 종료했다.

    “이 둥지에 있는 마나석 정제 시설은 완전 골동품일세!”

    “골동품이 아니라 쓰레기.”

    “거저 줘도 안 갖을 수준이지.”

    “더 성능 좋은 마나석 정제 시설을 도입하게. 고농축 정제 마나가 있으면 박격포의 위력도 더 높아지니까!”

    “아, 알았어. 아비엥 둥지만 털어 먹으면 마나석 정제 시설도 업그레이드할 테니까 그만해.”

    바라는 건 더럽게 많다.

    나 같은 영세업자는 매달 임대료와 인건비 내기에도 버겁단 말이다.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여유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페쉬나이트 광산 개발이 끝나면 여유 좀 생기려나.’

    길리도에게 연락이 오는 대로 광산 개발에 착수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자금적으로 여유가 좀 생길 테고, 그 자금으로 다음 목표인…….

    ‘그나저나 길리도 녀석한테 연락이 늦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하려던 찰나.

    “각하, 전원 집결했습니다.”

    어느새 루칸다가 내 뒤에서 나타나 있었다.

    “오케이. 곧 갈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

    이후의 목표보다 먼저 메모리얼 전투의 정리를 해야만 했다.

    * * *

    “일단 내 생각부터 말하도록 하지.”

    자리에 모여 앉은 인원은 셋.

    루칸다, 스칼렛, 그리고 나였다.

    페페는 이런 마물 놈들과 더 이상 어울리기 싫다고 전투가 끝나자마자 돌아갔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입을 연 쪽은 스칼렛이었다.

    “시간추 번복의 대의 명제에 대해선 기억하고 있나?”

    “아, 그러니까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과거는 현재와 동일한 시간선이 아니라 평행세계의 과거란 얘기였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점까진 동일한 시간선이었던 과거일세. 무언가의 계기로 갈라져 나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평행세계가 된 것이지.”

    “결론적으로 과거에 개입한다 하더라도 현재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거지만.”

    내 말이 얼추 맞았는지 스칼렛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처음 경험한 일이라 뭐라 확단할 수는 없네만. 그 ‘메모리얼 전투’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세. 그러니까 시간추 번복의 대의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지.”

    “그럼 뭐야? 설마 현재와 같은 시간선의 과거였다고?”

    “그건 아닐 겁니다. 바깥 고리의 존재들의 개입과 관련이 있을 것 같지만, 그 정도의 간섭력은 없을테니.”

    이번엔 루칸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박리 차원일 가능성이 큽니다.”

    “박리 차원이라면?”

    “과거도 미래도 없는 단면적 임의 차원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겠나?”

    스칼렛은 발밑에 떨어져 있던 긴 나뭇가지를 나이프로 툭툭 자르며 말했다.

    “메모리얼 전투의 주체. 즉 관측자가 존재하는 순간만 존재하는 기괴한 차원일세.”

    “그리고 만약 메모리얼 전투라는 것이 한 사람의 관측자에 대하여 1회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가정이라면.”

    “그건 가정이 사실이라면?”

    루칸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이어 말했다.

    “박리 차원은 관측자가 존재하는 순간만 존재가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관측자가 계속해서 메모리얼 전투를 수행하는 것으로 연결 고리를 지니게 됩니다.”

    “즉 관측자인 귀공이 여러 개의 박리 차원을 시간순과 상관 없이 뒤죽박죽으로 연결하고 다니게 된다는 말이지. 이해하겠나?”

    “대충은?”

    그러니까 이번에 내가 경험했던 메모리얼 전투는 내가 이쪽으로 돌아온 것과 동시에 소멸했지만.

    내가 다음 메모리얼 전투에 참가하면서 과거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이게 무슨 문제가 될까?”

    내가 묻자, 이번엔 루칸다와 스칼렛이 동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스칼렛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네. 이 기괴한 현상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메모리얼 전투를 수행하며 단서를 찾아 보겠습니다.”

    스칼렛이나 루칸다도 모르는 일이라.

    정작 이 세계를 창조해낸 나도 메모리얼 전투에 관해선 잘 모르고 있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주인공인 류시혁한테 아이템 퍼주려고 만든 거였단 말이다.

    누가 그런 걸 신경 쓰겠나?

    류시혁이 얻게 되는 아이템 옵션이나 신경 쓰겠지.

    루칸다를 슥 쳐다보자 뭔가 전과 다른 게 눈에 띄었다.

    “루칸다 그 흑요석 검 원래 한 자루 더 있었냐?”

    “아. 눈치 채셨군요.”

    루칸다는 쿡쿡 웃으며 두 자루의 흑요석 검을 보였다.

    “한 자루는 과거의 제게서 잠시 빌려온 겁니다.”

    “진짜?”

    “사실대로 말하자면 뺏어 온 겁니다만. 저도 같은 경험을 했으니 피차일반입니다. 아리카 섬에 놔두겠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군요.”

    한 마디로 루칸다는 이전에 미래에서 온 자신에게 흑요석 검을 한 자루 빼앗겼고.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서 자신이 당했던 짓을 똑같이 과거의 자신에게 했단 말이다.

    “검이 늘어난 건 축하하는데, 설마 우리 루칸다가 얌체 같이 자기 것만 챙겨온 건 아니겠지?”

    이걸로 메모리얼 전투에서 보상 외에도 질량을 지닌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내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자, 루칸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외투 안쪽 주머니를 꺼냈다.

    “당연히 각하께 드릴 물건도 챙겨 왔습니다.”

    덜그럭.

    주머니에서 나온 건 무광의 철제 잔이었다.

    그 표면은 붉게 녹이 슨 금처럼 보였고.

    “성배를……!!”

    스칼렛이 벌떡 일어나며 철제 잔을 들어올렸다.

    “성배?”

    내가 묻자.

    “예, 각하. 저것이 바로 나르시안의 성배입니다.”

    “와우! 역시 우리 루칸다야! 루칸다가 우리 둥지 하드캐리 머신이다!”

    나르시안의 성배라니……!!

    이런 예상치도 못한 수확이 있었을 줄이야!

    “당장 내놔 스칼렛! 이런 건 각하가 먼저 확인해야 되는 거야. 옛말에도 장유유서라고…….”

    “내가 귀공보다 수천 살은 더 많네만.”

    스칼렛은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게 성배를 넘겼다.

    성배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밑바닥에 뭔가 문자가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

    “뭐야 이거? 원래 이런 거 적혀 있었어?”

    성배를 뒤집어 밑바닥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렸다.

    “진짜 전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누자베스 경……?”

    내가 글자를 소리내어 읽자, 같이 보고 있던 루칸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피르에나 왕녀님의 필체입니다…….”

    소름 돋았다.

    내가 피르에나 왕녀와 만난 적은 없지만.

    이 여자가 소름 돋는 여자라는 사실 만큼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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