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51화
쿠아가 황야를 향하여(3)
아비엥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둥지를 찾아온 길리도의 태도가 급변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금을 기한 내에 지불해 주지 않으면 연맹은 각하의 신용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뭐, 대금의 상환은 걱정하지 않습니다만.”
길리도의 시선이 초석 작업장 쪽으로 향했다.
아비엥이 지금까지 에르바키나 연맹에게 빌린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765호 둥지. 그러니까 누자베스와 격돌한 이후부터 급작스럽게 병력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에르바키나 연맹이 아비엥에게 큰 고민 없이 돈과 무기를 지원한 이유는 단순하다.
아비엥이 대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초석 채굴장을 받아가면 그만이었으니까.
“연맹의 말단 주제에 전쟁 군주를 협박할 셈인가.”
길리도의 시선은 명백한 협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비엥이 그런 것도 모를 만큼 둔하진 않았다.
아비엥과 길리도 사이에 싸늘한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길리도는 그런 아비엥의 위협적인 태도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아비엥 각하. 에르바키나 연맹이 이 세계의 상권을 장악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 같이 보잘 것 없는 말단조차 연맹의 규율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천한 장사치 놈들 주제에……!”
“제 털끝이라도 건드렸다간 그 미천한 장사치 놈들의 규율에 의해 각하께선 처단되실 겁니다. 그 점을 부디 잊지 마시길.”
아비엥은 어금니를 빠득빠득 갈았다.
분하지만 길리도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에르바키나 연맹은 전 세계를 장악한 현세대의 실질적 지배자다. 바체트령을 군림하고 있는 마왕 아일라드 조차 에르바키나 연맹을 거스를 수 없다.
이런 조그마한 섬의 둥지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건 어렵지도 않을 일이다.
연맹에게 명분만 주어진다면 말이다.
“아, 그리고 지난 전투 결과는 모두 상부에 보고되었습니다. 규모 면에서 수 배는 차이가 나는 765호 둥지에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레오란드가 마왕군 소속의 감독관이라면.
길리도는 에르바키나 연맹 소속의 감독관이나 다름없었다. 하이브 마인드를 감찰하고, 그 결과를 연맹에 보고하고 있는 일도 맡고 있었으니까.
“아비엥 각하. 연맹은 그저 돈을 쫓는 들개에 불과합니다. 돈 냄새가 짙은 쪽으로 달리는 들개일 뿐입니다.”
길리도는 느긋하게 걸어 하얀 흙을 한 줌 쥐었다.
“돈 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 붙어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만 기억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까지 에르바키나 연맹의 지원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아비엥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길리도가 용무를 끝마친 뒤 돌아갔고, 홀로 남겨진 아비엥은 괴성을 내지르며 날뛰었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에르바키나 연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아리카 섬을 통일시킬 것이란 사실은 자명했다.
가정 사실이나 다름없었단 말이다!
누자베스 그 눈엣가시 같은 놈이 나타나기 전까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
꽉 막힌 곳을 애써 뚫으려 할 필요는 없다.
아비엥은 흥분이 가라앉으며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만을 요구해 오는 에르바키나 연맹에게 보여줄 결과물도 필요했고 말이다.
“사크바하를 불러와.”
당장 누자베스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집어 삼킬 만한 먹잇감은 많이 남아 있었다.
* * *
“확실하다니까! 이 모기 새끼가 간첩이야, 간첩! 아주 얼굴도 야비하게 생긴 게 딱이라니까! 말라리아 병균 옮기는 모기보다 더 악질이라고!”
“아, 아픕니다, 누자베스 각하! 저는 진짜 결백합니다!”
“결백은 염병, 결핵균이나 옮기겠지! 안 되겠다, 형아가 오늘 5공 시절 고문 기술을 선보여야겠다. 햄토리 빠따 가져와.”
“쮸쮸!”
둥지를 찾아온 길리도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후다닥 도망치며 길리도가 말했다.
“각하! 연맹에 속한 상인의 털끝이라도 건드리시면 규율에 따라 처벌을 받으실 수…… 악, 아픕니다!”
“그래 처벌해! 처벌하라고! 뻔히 경쟁 업체 밀어주기 하면서 스파이까지 심어 놓는데 나도 엿 같아서 더는 못 해먹겠다. 서러워서 장사 접는다 이 새끼야.”
“그건 상부의 지시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한테 엉덩이 쳐맞은 것도 아비엥한테 가서 일러라, 짜식아. 아, 그리고 너네 오거도 팔았더라? 와, 진짜 그런 엿되는 걸 팔아? 내가 오거 상대한다고 개고생한 거 생각하면 아주 그냥 면상을 복합골절 피떡으로 만들어서 개사료로 만들어버리고 싶네.”
“사, 살려주십셔, 대모 님! 이러다 저 진짜 죽습니다!”
길리도가 스칼렛 쪽으로 달려가 등뒤에 숨었다.
스칼렛은 한숨을 내쉬며 다가오는 내 어깨를 살포시 밀어냈다.
“조금 진정하게. 길리도는 우리에게도 귀중한 정보원일세.”
“마, 맞습니다! 제가 대모 님이 계신 둥지를 배신할 리 없습니다!”
“스칼렛이 없었으면 진짜 간첩짓 했다는 거 아냐?”
“…….”
“너 이리와. 길리도 잠깐 앞으로 나와봐.”
“싫습니다, 저, 절대 싫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길리도가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상부의 동향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보를 전해주러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길리도 내가 좀 애정 표현이 서툴러서 이러는 거 알지? 진짜 엉덩이 좀 찼다고 연맹 애들 불러오는 거 아니지?”
“아, 알겠습니다…….”
“솔직히 나만큼 살갑게 대해주는 하이브 마인드가 또 어딨냐. 이거 먹을래? 둥지 주변에서 주운 건데 먹을 만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각하…… 윽, 으읍! 더럽게 맛없습니다!”
길리도는 내게 받은 과일을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아비엥에 대한 상부의 평가는 상당히 하락했습니다. 누자베스 각하의 활약 덕분이죠.”
“하긴 나 같은 하꼬 둥지한테 두 번이나 눈탱이 맞았으니 아주 호구로 보이겠지. 그래서 이제 아비엥 말고 우리 좀 지원해 줄 마음이 든데?”
“……아뇨.”
“진짜 표정 개패고 싶네.”
“그런 게 아니라. 누자베스 각하에겐 아비엥만큼의 포텐셜이 없지 않습니까. 아비엥은 시작부터 초석 채굴장을 지닌 채 스타트를 끊은 하이브 마인드입니다. 연맹에서도 충분히 기대를 걸만 했습니다.”
길리도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연맹에서 주시하는 건 능력과 목표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카타쿨라처럼 자신의 안전을 확보한 수준에서 안주할 것 같다면 지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반대로 바체트령 통일 같은 거창한 목표가 있어도 능력이 형편없다면 마찬가지죠.”
“그럼?”
“아비엥을 처리하고 초석 채굴장을 손에 넣으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누자베스 각하께선 능력과 포텐션을 인정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카타쿨라를 공격할 준비까지 한다면 목표까지 합격점에 도달합니다. 그 순간부터 에르바키나 연맹의 시트란테 서도 지부는 각하를 지원하기 시작할 겁니다.”
좋아.
이해했다.
연맹의 상품을 팍팍 소비해줄 우량 고객으로 성장하면 그만이란 소리다.
“아, 그리고 이 주변 섬에 페쉬나이트 광맥은 없냐? 혹시 연맹이 가지고 있는 광맥이 있으면 내가 사서 개발 좀 하고 싶은데.”
“페쉬나이트 광맥 말이죠. 슬슬 각하께서도 상질의 광석을 사용하실 때가 됐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길리도는 일단 돌아가 아리카 섬에 인접한 페쉬나이트 광맥이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현재의 시세라면 페쉬나이트 광맥은 9만 벨 정도 선에서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금의 여유가 생기면 바로 사려고 했는데 꽤나 늦어졌군.’
시세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꽤나 올랐지만, 현재로써도 나쁘지 않은 투자였다.
자, 그럼 해야 할 일을 끝마쳤으니 바로 오늘의 본론. 메모리얼 전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 * *
“쮸쮸!”
솔직히 이 분위기는 거북하다.
“쮸우, 쮸!”
그리고 이쪽을 향해 꽂히는 세 사람의 시선이 따갑다.
“쮸, 쮸쮸! 쮸우, 쮸쮸쮸!”
게다가 내 주변을 둘러싸고 흐르는 미묘한 긴장의 기류 때문에 속이 더부룩해질 지경이다.
“쮸!”
“햄토리 입 다물어.”
“쮸…….”
드디어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 참여할 엔트리 멤버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여기까진 나쁘지 않은 전개다. 내가 고르고 골라 엄선한 4명의 정예 멤버들!
하지만 문제는 멤버들끼리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자베스 각하. 제가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흡혈귀 따위와 같은 전장에 서는 건 치욕적인 일입니다. 게다가 인간 계집이라니…….”
루칸다가 가장 먼저 불평을 토로했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칼렛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도 이 멤버 구성에 도저히 찬동하기 힘들군. 귀공과 햄토리라면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필멸종과 인간 계집이라.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는 없겠어.”
“누자베스, 얘네들 네 부하 아냐? 왜 이렇게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워? 조련이 아직 덜 됐나. 내가 대신 조련해 줄까?”
페페는 아주 탁상에 다리까지 올려놓고 거만한 자세로 루칸다와 스칼렛을 번갈아 바라봤다.
저건 명백하게 도발하는 자세와 말투다.
참지 못하고 덤벼들면 아주 오늘 제삿밥을 먹여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쮸쮸! 쮸!”
“그래그래, 우리 햄토리가 제일 착하네. 형아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건 우리 햄토리밖에 없다.”
눈물이 찔끔 난다.
류시혁이 메모리얼 전투할 때는 안 이랬단 말이다.
레인보우 헤어컬러의 히로인 전원이 어떻게든 류시혁과 같이 메모리얼 전투에 참여하려고 상상도 못한 애교와 앙탈은 다 부렸단 말이다!
‘하이브 마인드 말고 류시혁 몸으로 빙의시켜 주지…….’
내가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류시혁으로 빙의해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3화부터 보아라 노블…… 아니, 보아라 얘기는 그만하자, 진짜.
참고로 보아라 노블레스를 아무리 읽어도 아기가 만들어지는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 그 점은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여러분. 이번만큼만 성질 죽이고 메모리얼 전투에 진지하게 임해주세요.”
“그나저나 각하. 메모리얼 전투라는 게 뭔지 설명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소수 멤버로 출전한다길래 별동대를 꾸려 야습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네만.”
“나도 아직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는데. 누자베스 그 메모리얼 전투라는 게 뭐야?’
“쮸쮸! 쮸!”
나도 그 설명을 지금부터 하려고 했다.
너희들이 만나자마자 엄마 죽인 원수 만난 것처럼 으르렁거리지 않았으면 말이다.
“쉽게 말해서 과거의 시간선으로 돌아가서 확정된 미래를 복기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오, 시간 역행 같은 것이로군. 내 사촌이 그쪽 방면으로 취미를 지니고 있네.”
시간 여행이 취미라니 참 대단하신 사촌을 지니고 계신다.
하기야 스칼렛은 나르시안의 직계 자손.
반쯤은 신에 가까운 존재들이니 그 정도의 능력은 있겠지만.
“그런 게 진짜 가능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과거라면 어느 정도의 과거야? 행선지는?”
페페가 그런 질문을 던졌고.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간략한 개요를 내뱉었다.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행선지는 쿠아가 황야. 피르에나 왕녀의 르 만타나 근위 유격대가 패전 후 퇴각 작전을 개시한 직후입니다.”
흘깃.
루칸다의 눈치를 살피자,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