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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48화 (4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48화

    결전(3)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숲에 홀로 남겨진 페페는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누자베스가 이끄는 765호 둥지의 병력들도 모두 철수한 뒤였다. 고요한 밤바람이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전부인 밤이었다.

    ‘페페가 저를 죽이고 싶다면 기꺼이 죽어줄 수 있어요. 페페의 말대로 모든 하이브 마인드가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라면요.’

    누자베스는 짐짓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

    바로 오늘밤 굴덴 마을을 덮치려 했던 하이브 마인드. 아비엥과 그의 701호 둥지의 병력이 여전히 건재했다.

    누자베스는 페페에게 유예를 요청했다.

    ‘아비엥이 살아있는 한 이 일대의 마을은 안전하지 못해요. 아니, 그대로 방치했다간 아리카 섬 전체가 위험할 수 있어요. 카타쿨라와 달리 급진적인 하이브 마인드니까요.’

    그렇기에 누자베스 자신이 아비엥을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뒤엔 기꺼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페페는 아직 조금 젖어 있는 손등을 손끝으로 훑어 봤다.

    눈물은 순수하게 정제된 고독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싸움의 말로였다.

    아무도 동조하지 못할 것이고, 그 어떤 역사가도 그 희생을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싸움일 것이다.

    누자베스는 지금까지 홀로 그런 싸움을 계속해 왔다.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동족의 배신자라는 딱지.

    잃게 될 것은 목숨이다.

    보답 따윈 감히 바랄 수 없는 길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무엇이 누자베스에게 그런 길을 걷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었을지.

    혹은 인간들을 향한 연민의 감정일지.

    아니면 지닌 적도 없었던 인간성의 환상통일지 말이다.

    “하아…… 내가 어찌하면 좋겠니, 누자베스…….”

    페페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발걸음을 돌렸다.

    유물주의적 추정은 오해를 낳는다.

    그건 페페가 왕도에서 아카데미 생도였을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가르침이다.

    하지만 자비와 희생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하이브 마인드와 인간을 나누는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흐릿해졌다.

    * * *

    “이야……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연기였어. 작가나 하이브 마인드가 아니라 배우를 했어야 됐는데.”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런 거짓말은 평소에 생각해두는 겐가, 아니면 즉흥적으로 그냥 나오는 건가?”

    “당연히 즉흥적으로 나오는 거지! 당장 목 따이게 생겼는데 아주 그냥 두뇌가 풀가동돼서는…… 아악! 아파, 거기 아프니까 살살해!”

    무사히 둥지까지 돌아온 후 바로 스칼렛에게 상처를 치료받게 되었다. 이번 전투에서 촌락 습격을 무난하게 저지했고, 아비엥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이쪽의 피해는 내가 피곤죽이 됐다는 것만 빼면 제로에 가깝고 말이다.

    “어쨌거나 인간에게 정체가 발각되었으니 성가신 일이 늘었구만.”

    스칼렛은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입술을 살짝 벌려 혀를 내밀었고, 길고 가느다란 혀끝에 맺혀 있던 타액이 긴 선을 그리며 내 옆구리로 떨어졌다.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버둥거려 봤지만, 양팔을 꽉 붙잡은 채 올라탄 스칼렛이 도저히 놔주지 않았다.

    “흐읍, 하아…… 젠장, 둥지에 제대로 된 힐러를 얼른 영입하던가 해야지……. 어쨌든 그 모험가 계집에게 정체를 들킨 건 본의가 아니지만, 이 전개를 유용하게 활용할 궁리나 해보자고.”

    대충 치료를 끝내고 옷을 걸치고 있자, 촌락의 피해 상황을 살피러 갔던 루칸다가 돌아왔다.

    “오, 루칸다. 멀쩡해 보이네. 내가 너무 늦었을까봐 걱정했더니.”

    멋쩍게 웃으며 간만에 인사를 건넸다.

    루칸다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누자베스 각하.”

    “뭐 겸사겸사니까 감사 인사를 받을만한 짓은 아닌데. 아비엥 그 새끼가 노동력을 확보하는 걸 방해할 작정이었고. 아, 촌락의 피해는 어때?”

    “포격에 휘말려 죽거나 다친 고블린이 있지만, 심각한 상황은 아닙니다.”

    루칸다는 구석의 의자를 끌어와 털썩 앉으며 말했다.

    “제 판단이 안일했습니다. 파르카만 처리하면 일시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문제의 근원까지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오, 그럼 우리 다시 같은 배에 타는 건가?”

    “각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미력하나마 힘이 되어 보이겠습니다.”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비엥 그 망할 새끼의 대갈통을 으깨서 갈아버리기 위해서는 아군은 더 많은 편이 낫지 않나?

    “좋아, 그렇다면 서로의 정보를 병렬화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나와 스칼렛. 그리고 루칸다가 지니고 있는 정보를 완전히 공유하는 게 먼저다. 향후의 계획은 그 정보를 기반으로 세워져야 한다.

    루칸다가 떠난 뒤에 변동된 765호 둥지의 상황을 모두 설명했고, 루칸다 역시 촌락의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스칼렛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보게, 필멸종. 이건 내 개인적인 의문이다만, 그 피르에나라는 인간 계집이 어떻게 초극의 자격을 얻었지?”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루칸다의 태도가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을 건드린 것처럼 말이다.

    ‘피르에나라고?’

    이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백주월이 주역으로 등장한 에피소드인 ‘주인 없는 둥지’ 편에서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나도 궁금한데. 무슨 일이 있어도 숨겨야 할 일이라면 묻지 않겠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루칸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제가 인간의 편에서 싸웠던 적이 있다는 얘긴 들으셨을 겁니다.”

    “아, 워포레이를 해치울 때 그런 얘기를 했었지.”

    “그때 제가 소속되어 있었던 ‘르 만타나 유격대’는 글로레나 왕조의 제7왕녀 피르에나 님의 휘하에서 조직된 부대였습니다.”

    루칸다는 간략하게 과거사를 설명했다.

    송곳 왕녀 피르에나가 이끄는 근위 유격대가 남긴 활약상. 그리고 피르에나 왕녀의 말로에 대해서.

    “첫 패주 이후 피르에나 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연전연승을 기록하다 처음 깨져보면 멘탈이 나갈 법도 하지.”

    모두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다는 건 그 정도의 중압감일 것이다. 게다가 두 번째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압박감. 그런 심리적 압박은 어린 소녀에게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루칸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어 말했다.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았기에, 작전의 치밀함과 지휘력이 부족했고. 그 때문에 유격대의 전우들이 수없이 죽었다는 사실에 극단적으로 자책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그 인간 계집이 초극에 눈을 돌렸다?”

    스칼렛이 묻자, 루칸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초극의 자격을 얻을 수 없을 터…….”

    “그래. 스칼렛 정도의 고위계의 존재가 아니라면 자격 자체가 없었을 텐데.”

    “브람스의 영지에서 얻은 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르시안의 성배’입니다.”

    나르시안의 성배.

    그 이름을 듣자 스칼렛이 사뭇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계집 설마 성배를 사용한 것인가?”

    나르시안의 성배.

    어떤 액체를 담아도 나르시안의 혈액으로 대체된다는 고대 유물이다.

    성배에 담긴 혈액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영적 위계를 높일 수 있는 강력한 유물이었다.

    한 모금은 꿀처럼 달콤할 것이고.

    두 모금은 만년설을 녹인 계곡수처럼 청량할 것이며.

    세 모금에서 모든 번뇌와 세속적 금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네 모금을 마시면 시간의 굴레와 죽음으로부터 모습을 숨길 수 있으며.

    다섯 모금을 마시면 용서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죽음보다 더 깊고 짙은 고통에 사로잡혀 평생을 죄인으로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 대가를 치루고 초극에 도전했지만 실패했군.”

    “그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루칸다는 악몽을 떠올린 듯 목소리가 떨렸다.

    초극에 실패한 인간의 말로. 그 형상이 얼마나 끔찍할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광경을 목격한 루칸다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초극에 실패하여 끔찍한 꼴이 된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피르에나의 숨통을 끊어주는 것뿐이었다.

    “흐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스칼렛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미소를 머금은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번뜩였다.

    “귀공도 나와 비슷한 추론에 도달한 모양이군.”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긍정의 의사를 밝혔다.

    물론 내 경우엔 추론이 아니라, 직접 쓴 소설이니까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백주월이 메인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 ‘주인 없는 둥지’는 본도에서도 마왕의 영지에 가까운 ‘쿠아가 황야’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백주월이 박살낸 둥지는 기묘하게도 하이브 마인드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마물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었고, 결국은 백주월도 원인을 규명해내지 못한 채 쿠아가 황야를 떠나며 끝이 난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모여서 둥지를 지키려하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어쨌거나 이 에피소드에서 거론되는 이름이 피르에나였지.’

    루칸다의 얘기를 들어보면 피르에나 왕녀가 첫 패전 이후 퇴각한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그곳에서 만약 피르에나가 초극에 도전하였고, 실패했다면 모든 톱니바퀴가 맞아 떨어졌다.

    ‘피르에나 왕녀가 사실은 죽지 않았고, 그곳에서 계속해서 마물들을 집결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하지만 여러모로 결락된 정보가 너무 많다. 내 설정이 대충 짜놓은 것이라 그런 것도 있었고, 이 세상이 제멋대로 채워 넣은 부분이 어딘지 명확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인간 계집이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네. 그저 그것은 피르에나라고 불렸던 인간 계집의 부스러기나 찌꺼기 같은 것이겠지. 거기에 소름 돋을 정도의 원념이 의식체로 재구성된 것이라면 납득이 가는군.”

    “부활해서 다시 한 번 마왕군하고 한 판 벌일 생각인가?”

    “글쎄. 그 정도의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진 않네만. 그건 그저 찌꺼기일 뿐일세. 생전의 기억을 토대로 반복되는 원념을 되풀이할 뿐인 의식체이기도 하지.”

    스칼렛은 ‘확실한 사실은’이라고 작게 중얼거린 후 루칸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필멸종이 뒤처리를 제대로 못한 탓에 그 인간 계집의 의식이 영겁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 뿐일세.”

    팔짱을 끼며 암반으로 된 벽에 등을 기댔다.

    ‘쿠아가 황야라…….’

    머릿속에서 바체트 령의 세력도가 그려졌다. 쿠아가 황야는 그 대척점의 중앙에 위치한 지역.

    ‘써먹을 수 있는 정보는 일단 기억해 두자.’

    원래 뭐가 뭔지 잘 모를 때 해야 될 일은 하나뿐이다.

    전부 다 엉망진창으로 뒤집어 놔서 모두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로 만드는 것.

    평등한 혼란이 나 같은 약자가 활개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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