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43화 (4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43화

    반 르낙시아 동맹(2)

    “루칸다, 오늘도 낚시 다녀온 거야? 바깥에 망태기가 놓여 있던데.”

    메루는 촌락의 젊은 암컷 고블린이었다.

    성실하고 밝은 성격 덕분에 그녀를 호감 어린 시선으로 보는 고블린들이 많았다.

    특히 젊은 수컷 고블린들 사이에선 더더욱 그랬다. 귀여운 외모라거나, 누구에게나 상냥한 성품. 혼기에 들어선 수컷 고블린들 대다수가 메루를 반려로 삼고 싶어 할 정도다.

    물론 방랑자의 삶을 택한 루칸다에겐 연이 없는 얘기다.

    루칸다는 담배를 문 채로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해먹에 누워 있다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메루가 낑낑거리며 들고 온 자루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화덕 근처에 놓인 다른 자루들 옆에 내려놓았다.

    “아, 고마워 루칸다.”

    메루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지만, 루칸다는 그런 메루를 무시하듯 지나쳐 해먹에 다시 누웠다.

    창문 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다, 담뱃잎을 파이프에 채워 넣는 것 외엔 관심이 없는 고블린 같았다.

    “배고프지? 얼른 저녁 만들어 줄게. 오늘은 오랜만에 사냥에 나섰다나 봐. 사슴을 잡아 왔는데 추장님이 루칸다 너한테 가장 좋은 부위를 가져다주라고 하셔서 이렇게나 많이 얻어 왔어.”

    메루는 화덕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루칸다는 반쯤 열어 놓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았고, 그녀의 말에 반응하거나 대답하는 일도 없었다.

    루칸다가 메루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 지 나흘이 지났다. 섬의 남쪽으로 떠나기 전까지 이 촌락에서 지내겠다고 말한 쪽은 루칸다였다.

    하지만 메루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 것은 그녀의 부탁 때문이었다.

    어째서 귀찮은 식객을 자진해서 집으로 들이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메루는 루칸다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부상을 입고 이 주변 숲길에 쓰러져 있던 루칸다를 발견하고 치료해준 은인이 바로 메루였다.

    그러니까 루칸다가 이 집에 머무는 이유는 은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있잖아.”

    금방 조촐한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루칸다가 약초와 함께 푹 끓여낸 고기 덩어리를 덥석 문 순간이었다.

    “추장님께서 그러셨는데, 루칸다가 실은 페이드레트라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블린이라고…….”

    “그래서?”

    “다, 다른 대단한 의미는 아니구…… 그런 도시 출신이면 다른 곳의 고블린들하고 역시 다르겠지? 이런 산속에 사는 암컷 고블린들하곤 다르게 화려한 장신구도 많이 갖고 있을 테고, 더 예쁠 테고…….”

    루칸다는 메루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슴고기 덩어리를 우적우적 씹었다.

    “그냥 이건 소문인데, 루칸다가 실은 페이드레트에 혼약자를 두고 와서 이 촌락의 암컷들에게 관심이 없다구.”

    “헛소문이군.”

    “아, 정말?”

    메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혼약자가 없다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루칸다는 그런 메루를 흘깃 바라본 후 다시 손으로 고기 덩어리를 집었다.

    “그, 그럼 나는 어떻게 생각해?”

    메루가 뺨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칸다는 잠시 오늘 편하게 저녁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를 떠올렸다.

    루칸다가 메루를 관찰하기 위해 지긋이 바라보자, 메루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암컷을 칭찬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루칸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어색하게 내뱉었다.

    “……건강한 새끼를 낳을 것 같은 둔부로군.”

    아무리 고블린들이라도 이런 식의 노골적인 발언을 하면 암컷의 손톱에 얼굴을 긁힐 각오를 해야 된다! 칭찬으로 한 말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메루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내심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발언을 하고도 암컷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고블린은 루칸다 외엔 없었다. 고블린 암컷은 강한 전사의 아이를 낳는 걸 삶의 목표로 삼고 있으니까.

    루칸다 정도의 전사가 아니라면 뺨을 맞고 다리 사이를 걷어 차일만한 발언이었다.

    “나 계속 루칸다를 기다릴 테니까. 그러니까 루칸다만 괜찮으면 루칸다의 아이를 키우면서…….”

    “잠깐, 무슨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쿠웅!

    루칸다가 황급히 메루의 말을 끊으려던 찰나였다. 폭음과 함께 열어놨던 창문 너머로 빛무리가 터졌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지 않길 바랐건만.’

    루칸다는 주저 없이 식탁 앞에서 일어났다. 바로 검을 챙겨 허리춤에 차고, 가죽 망토를 걸치자마자 문이 거칠게 열렸다.

    “루칸다 형님! 녀석들이 왔습니다. 루칸다 형님이 말한 대로입니다.”

    메루의 집을 찾아온 건 와탈라였다.

    루칸다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가죽 망토의 앞섶을 여몄다.

    “지휘자는?”

    “사크바하, 그 오크입니다!”

    “규모는?”

    “어두워서 확실치 않지만…… 백 마리쯤은 될 것 같습니다. 하라부가 당장 전사들을 집결시키겠다고 난리입니다.”

    “상대는 하이브 마인드의 군세다. 이 촌락의 고블린들이 나서면 뒤끝이 좋지 않겠지.”

    당장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의 선택지에 서게 된다면 나중에 죽는 쪽을 고르겠지만 말이다.

    최선의 해결책은 765호 둥지의 원군이 올 때까지 루칸다와 와탈라의 힘만으로 사크바하의 부대를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와탈라. 너는 안 따라와도 된다. 암컷을 놔두고 죽어버리는 수컷만큼 멋대가리 없는 것도 없으니까.”

    메루의 집을 나란히 빠져나온 뒤 루칸다가 와탈라를 향해 그렇게 말했지만.

    “그러는 루칸다 형님은 괜찮은 겁니까? 분위기 좋아 보였는데 말입니다?”

    와탈라가 킬킬 웃으며 대꾸했다.

    그 말에 루칸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 암컷하고 그런 관계가…….”

    콰앙!

    루칸다의 지근거리에서 포탄이 폭발했다.

    하지만 재빠르게 몸을 숙인 덕분에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아리카 섬의 고블린들이라면 이 기괴한 폭발을 마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본도의 전쟁에 참여했던 루칸다는 대포와 포격에 관해 알고 있었다.

    ‘역시 내 목숨이 목적이군, 사크바하.’

    포병대와 관측반.

    그리고 대포를 엄호할 머스킷 부대.

    사크바하가 끌고 나타난 부대의 대략적인 규모와 구성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루칸다의 무료한 듯 권태로웠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역시 짐승은 진흙탕에서 뒹굴 때 삶을 실감하는 법이다.

    * * *

    [누자베스 : 대포? 와, 아비엥 그 미친 사이코 새끼가 도대체 누구 둥지를 박살내려고 그딴 걸 샀다냐.]

    [스칼렛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누자베스 : 그럼 뭐가 중요한데? 에르바키나 연맹 그 새끼들이 중립을 표방하면서 특정 하이브 마인드만 밀어주기 하고 있었다는 게 중요한가?]

    [스칼렛 : 구태여 따지자면 그렇군. 결국은 숫자놀음 하는 장사치 무리일세. 숫자를 더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밑작업은 한다는 얘기겠지. 대단히 이상한 일도 아니로군.]

    길리도가 실토한 정보는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에르바키나 연맹에서 아비엥을 지원하고 있었을 줄이야.’

    솔직히 그 정도까지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 소설의 주인공인 류시혁이 아리카 섬에 왔을 때도 갈라우드와 카타쿨라의 대립 구도는 건재했으니까.

    비탄의 숲으로 진격 중인 부대의 병력을 바라보며 길리도가 실토했던 정보를 곱씹어 봤다.

    ‘연맹의 상부에서는 현재 아리카 섬의 상황을 달갑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갈라우드와 카타쿨라의 긴 고착 상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이 균형 덕분에 더 이상의 군비 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연맹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더 많은 병력과 더 많은 무기를 팔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안주하는 두 거대한 세력이 방해가 될 뿐이죠.’

    ‘연맹의 높으신 분들은 이 고착 상황을 타개할 수단으로써 아비엥을 택했습니다.’

    ‘아비엥은 이 섬을 통째로 삼킬 야망을 지니고 있는 하이브 마인드입니다. 아리카 섬 정복 후엔 본도 진출을 부채질할 작정입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연맹의 상품을 사용해주겠죠.’

    시장이 없으면 시장을 만들어 낸다는 논리다.

    그 과정에서 들어가는 아주 약간의 수수료 정도는 연맹의 어마어마한 재력으로 감당할 수 있으니까.

    [누자베스 : 그러니까 그거잖아. 아비엥 새끼한테만 돈도 빌려주고, 무기도 외상으로 주고.]

    [스칼렛 : 그렇지. 귀공은 지금 연맹이 돈을 들여 만들어 놓은 꼭두각시를 상대로 싸우고 있고 말일세.]

    [누자베스 : 나중에 연맹 놈들이 배상하라고 할까 겁나네.]

    어쨌거나 당장 병력을 이끌고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아비엥은 나하고 한판 뒹굴어본 뒤에 잔뜩 겁을 먹었는지 급하게 병력을 확충했다.

    그 과정에서 연맹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되었고, 상환에 지장이 생기지 않으려면 더 많은 초석을 캐내 연맹에 보내야만 했다.

    초석을 캐기 위해 필요한 건 고블린 노예.

    본래 고블린 노예의 공급책이었던 파르카가 당했으니, 직접 군세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자베스 : 안 되지. 그렇게 쉽게 고블린을 포획해가면 쓰나. 내가 무슨 개지랄을 해서든 초치고 재 뿌린다.]

    원래 심성이 꼬인 인간이라 이웃사촌이 땅을 사면 급성장염으로 일주일 정도는 입원해야 된단 말이다.

    내가 못 먹을 떡이면 뺏어서 흙바닥에 내던져야 직성이 풀린다! 나보다 더 처먹는 새끼가 옆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혈압이 오른다!

    ‘아비엥, 넌 미친 개새끼가 이웃집에 사는 시점에서 아웃이야.’

    어떻게 해서든 엿을 먹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인다!

    엿 그만 먹고 싶다고 울고불고 질질 짜도 먹인다! 두 번 먹인다!

    원래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게 헬조선 종특이라 어쩔 수 없다. 내가 안 되면 너도 안 된다! 그런 각오로 아비엥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질 각오였다.

    [누자베스 : 얘들아, 우리 이웃사촌들한테 헬조선 지옥불 맛 좀 쬐끔만 보여줘라.]

    불길에 휩싸인 고블린 촌락이 코앞이었다.

    * * *

    전장이란 집착이 심한 여자와 같다.

    사크바하는 자신을 거둬주고 키워줬던 남자가 버릇처럼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크바하는 드물게도 인간의 손에 자라난 오크였다. 그리고 그를 키워준 아버지는 용병단의 단장이었다.

    엄연히 따져 말하자면 어린 오크를 주워다 용병으로 쓴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사크바하는 두 다리로 걷게 된 순간부터 전장에서 자라났다. 수많은 인간과 마물을 죽였고, 빼앗았고, 눈물과 피를 보며 자랐다.

    그게 삶의 전부였다.

    그릇된 것과 옳은 것의 경계는 없었다.

    도덕과 윤리는 선인들의 말장난에 불과했다.

    이념과 민족의 정체성은 금전 몇 푼으로 대체되었다.

    성자의 가르침은 질 낮은 농담이었고, 깨달은 자의 진리는 금화가 짤랑거리는 소리보다 가치가 없었다.

    그래, 그런 삶이었다.

    ‘전장이란 집착이 심한 여자와 같아서 말이다. 한 번 안아버리면 헤어나올 수 없는 법이지. 자신이 전장을 쫓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삶의 마지막 순간에 돌이켜보면…… 전장이 나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야.’

    전장을 안을 때마다 사크바하는 많은 것을 놔두고 떠나야만 했다.

    처음엔 눈물과 공포를 전장에게 줘야 했고.

    자비와 관용, 그리고 양식을 빼앗겼다.

    노년에 이르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전장에게 지불한 뒤였다. 행복해질 권리 따윈 없었다. 구원과 용서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다.

    끊임없이 뒤를 쫓는 죽음의 그림자만이 사크바하에게 남겨진 모든 것이었다.

    ‘사크바하. 당신은 용서받을 권리가 있답니다. 지독한 자기혐오조차 그 권리를 앗아갈 수 없겠죠.’

    깜빡.

    찰나와 같았던 빛줄기를 떠올렸다.

    구원과 용서를 향한 여정에서 사크바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낙원에 당도하여 모든 과오를 용서받은 뒤 숨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스스로 전장을 쫓고 있다고 생각하나, 루칸다?”

    사크바하가 육중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자, 희망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던 칼날이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수컷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고,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