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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42화 (4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42화

    반 르낙시아 동맹(1)

    “정말 감사해요……. 아버지가 사라지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모험가님.”

    대장간을 찾아가자 먼저 반긴 것은 빌리의 딸인 율리아였다. 율리아는 빌리가 돌아온 것이 기뻤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중세 시대 배경의 평민 의복이 마음에 드는 건 저런 부분이다. 천을 아끼려는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지만, 깊게 파인 가슴골 덕분에 심신의 안정이 찾아온다.

    게다가 상당히 상의가 헐렁해서 고개를 숙일 때마다 굉장히…….

    “냐앙!”

    “아,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 진짜 아프니까 손톱으로 손등 긁지 마!”

    빌어먹을. 내가 이쪽 세계까지 넘어와서 팔자에도 없는 집사 노릇이라니. 게다가 성격이 파탄 난 떼껄룩이란 말이다.

    내 개인적인 취향을 토로해 보자면 더러운 떼껄룩보다는 아르고니안 쪽이…… 아니, 지금은 내 취향 얘기나 할 때가 아니다.

    “빌리 씨는 괜찮나요?”

    “아, 예! 지금 막 정신을 차리셨어요. 이쪽에 계세요.”

    율리아의 뒤를 따라 대장간 안쪽의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있는 빌리가 보였다.

    “오! 자네로군!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구만, 허헛.”

    “몸은 좀 괜찮습니까?”

    “그래. 아주 상쾌해. 머릿속에서 들려오던 그 환청도 더 이상 안 들리고, 다시 태어난 것 같네.”

    빌리는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아버지! 한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된다고 들었잖아요.”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 왔는데 이렇게 누워 있는 수도 없지 않니?”

    “저는 괜찮으니까 일단 누워 계시죠.”

    율리아가 차를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선 후.

    빌리와 단둘이 된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쪽은 빌리였다.

    “자네에겐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네. 20년도 넘게 나를 괴롭히던 환청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것도 자네가 세글리트를 토벌해준 덕분이겠지.”

    “마을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죠.”

    “아니, 충분히 대단하네! 요즘 같이 겉멋만 들어서는 실력도 쥐뿔도 없는 모험가들만 득실거리는 세상 아닌가? 그 세글리트를 토벌한 것만으로도 자네는 충분히 대단한 모험가일세.”

    빌리는 상체를 일으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 그럼 밑작업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할 차례다.

    철컥.

    문의 걸쇠를 잠궈 버린 후.

    “스칼렛.”

    내가 부르기가 무섭게 품에 안겨 있던 검은 고양이가 마룻바닥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대로 착지하나 싶더니 불투명한 검은 안개와 함께 그 모습이 뒤바뀌었다.

    “어둠의 종복이여. 그대의 주인 앞에서 보여야 할 마땅한 예를 갖추게.”

    스칼렛의 핏빛 동공이 빌리를 향했고, 빌리는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나 스칼렛의 앞에 엎드렸다.

    “흠, 빈큐럼은 이상 없이 걸렸군. 앞으로 세 달 정도는 효과가 지속될 걸세.”

    “그걸로 굴덴 마을 전체를 지배할 순 없는 거야?”

    “귀공은 나를 무슨 만능 해결사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빈큐럼 상태를 유지하는 건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하네. 마을 전체는 확실히 현재로서는 무리지.”

    “전에는 가능했단 거야?”

    “인간들의 왕국 수도를 통째로 200년 가까이 통제했던 적이 있긴 한데, 그 이상은 가능할지 모르겠네.”

    진짜냐.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하이브 마인드 때려치웠다! 둥지 같은 게 아니라, 육욕의 음굴 같은 걸 만들었을 것이다!

    “……혹시 하이브 마인드도 흡혈귀로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까, 그…… 포옹이란 걸 하면 흡혈귀가 된다며?”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서 흡혈귀로 만들어 달라고 해봤자 곤란하네. 게다가 나 같은 늙은이가 후대를 만들면 족보가 꼬여서…….”

    “뭐야, 그럼 전에 만든 애들도 없어?”

    “한 번도 없네. 후대로 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아이도 없었고…… 일이나 마저 하지.”

    “넵…….”

    스칼렛이 내 둥지에 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지만, 저 싸늘하게 식은 눈초리로 노려보는 건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다.

    ‘빌리에게 구태여 빈큐럼까지 걸어 놓은 이유는 하나뿐이지.’

    비밀 유지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빌리가 마을의 대장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조금 더 활용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럼 이쪽쯤에다가…….’

    마인드 모드로 잠시 위치를 확인한 후.

    [누자베스 : 코틀러, 그래 거기거기. 거기 쭉 파라.]

    [코틀러 : 누아아앙…… 피곤하구마안…….]

    [누자베스 : 그 드립 한번만 더 치면 박진가라테의 비기를 맛보여주마.]

    와르르륵!

    그때 빌리의 방에 달린 창문에서 보이는 뒤뜰이 무너졌다. 코볼트들이 무너진 구덩이에서 머리만 내놓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가져온 목판으로 구멍을 막았다.

    이걸로 내 둥지에서 빌리의 대장간까지 직통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빌리 씨. 저 구덩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로 만든 창고일 뿐이에요.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면 돼요.”

    “창고…….”

    “그래요, 창고.”

    “그리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뭔가 보답을 해줘야하지 않을까요?”

    “보답, 보답…….”

    빌리는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스칼렛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울리자, 빌리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별거 없고…….”

    빌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 그렇지! 앞으로 자네의 의뢰는 모두 무료로 해줌세. 제작이나 수리를 팍팍 맡겨주게.”

    “정말인가요?”

    “내가 빈말을 할 사내인가!”

    “아니, 이제 막 정신을 차렸는데 또 무리하다가 쓰러질까 걱정이네요.”

    “허허허, 걱정하지 말게. 이래 봬도 몸이 튼튼한 게 유일한 장점이니까.”

    “다시 한 번 확인할게요. 진짜 모든 제작 의뢰가 무료인가요?”

    “그렇다니까!”

    빌리는 껄껄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혹시 자네가 원한다면 대장장이 기술을 가르쳐 줄 수도 있네. 언제든 말만 하게. 내 수제자로 받아주지.”

    세글리트 토벌의 부수적인 수입이라고 치기엔 소득이 꽤 컸다. 무료 제작 지원과 대장장이 기술 전수라.

    “그럼 바로 일을 시작해 볼까요?”

    “오, 그러지. 누워만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던 참일세.”

    드디어 내 둥지에도 1차 가공 시설이 갖춰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쌓여 있었다.

    * * *

    “진짜 곤란합니다…… 진짜 이러면 곤란합니다…… 연맹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신용! 고객의 정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짜 곤란한 게 뭔지 알려줄까? 내가 개빡돌아서 야마에 스팀 돌면 그게 진짜 곤란할 텐데. 응? 영세업자 고혈이나 빨아 먹는 모기 새꺄.”

    “누자베스 님. 진짜 이럴 때마다 곤란합니다…….”

    “안 되겠다. 햄토리야 형아 불빠따 준비해라. 오늘 이 모기 새끼 면상을 씹다 뱉은 만두로 만들고 장사 접어야겠다.”

    “쮸쮸!”

    “아이고…… 저도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이러지 마십쇼, 진짜…….”

    오랜만에 찾아온 길리도를 격하게 반기며 심부의 내 개인실로 초대했다.

    곡괭이 자루는 왜 들었냐고?

    당연히 길리도와 화기애애하게 야구 놀이나 하려는 거지, 별 의미는 없다.

    “길리도. 이 근방의 둥지는 모두 네 관할이잖아. 그러니까 701호 둥지도 너랑 거래하고 있을 거 아냐?”

    “모, 모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새끼가 줄타기를 하네. 고객은 모두 평등하다며. 엉? 지금 딱 각을 보니까 아비엥이 더 뜯어먹을 게 많아 보여서 줄 타는 거지?”

    “결코 그런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아비엥 그 새끼가 요즘 뭘 샀는지 말해달라니까? 우리 이웃사촌이 좋은 거 구매하고 있으면 나도 같이 사보게. 응?”

    “차, 차라리 주, 주…… 죽이십셔! 죽어도 말 못합니다!”

    좋아.

    좋다!

    그렇게나 죽는 게 소원이면 머리통을 극락정토까지 홈런을 쳐주겠다!

    “햄토리야. 오늘 형아 말리지 마라. 진짜 말리지 마라, 오늘부로 장사 접자. 이런 장돌뱅이 놈한테 하꼬라고 무시 당하면서 하이브 마인드 짓거리해야겠냐?”

    “쮸, 쮸쮸!”

    “야, 길리도. 그런데 아비엥 그 새끼도 나하고 별 다를 바 없는 하꼬잖냐. 하꼬 둥지끼리 무슨 줄을 타냐?”

    “아니…… 줄타기가 아니라 진짜 안 됩니다…….”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 안 되는 모양이다.

    평소엔 이렇게 야구 놀이를 해주면 신나서 이것저것 다 들어줬는데. 미리 말해두지만 결코 폭력적인 겁박 수단을 취하는 게 아니다.

    길리도는 원래 마조 성향이라 살짝 무서운 야구 놀이를 좋아하는 남자일 뿐이다.

    “이보게, 내가 잠깐 얘기를 나눠 보겠네.”

    “아, 스칼렛. 그래 네가 직접 손 좀 봐줘라. 길리도 넌 뒤졌다. 얘가 보기엔 이래도 우리 둥지에서 가장 지랄맞은 년인데. 형이 좋게 물어볼 때 대답했어야지. 스칼렛, 이 새끼 이거 아주 독한 놈이야. 따끔한 맛을 보여줘.”

    “귀공은 협상의 기본부터 다시 배워야겠군…….”

    스칼렛은 한숨을 푹 내쉬며 길리도의 앞에 나섰다.

    길리도는 벌벌 떨다가 스칼렛을 자세히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쩍 벌렸다.

    “대, 대모님……?”

    “그래,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리쿼렐의 말예여.”

    “죄, 죄송합니다……. 엘더와 연이 끊긴 혈맥의 지방에서 자란 탓에 대모님의 존함을 알지 못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리쿼렐과는 어렸을 적부터 자주 다퉜던 사이지만, 이렇게 긴 세월이 흘러 그 말예와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군.”

    “저 역시 영광입니다. 반 르낙시아의 현존이시여…….”

    그러고 보니 길리도 역시 상당히 희석된 피를 지닌 것에 불과하지만, 일단은 흡혈귀 가문의 일원이다.

    그러니까 흡혈귀 중에서도 고대종에 속하는 스칼렛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비유하자면 2019년을 살아가던 내가 갑자기 단군 할아버지와 만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존재에 대해선 자네의 고용주에겐 함구하기로 하세. 그 정도의 약속은 해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도 절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금전으로 얽힌 관계의 규칙과 혈맥의 규율. 자네는 어느 쪽이 더 중하다 생각하는가?”

    “비록 몰락한 혈맥이라 할지라도 저 역시 위대한 아버지 나르시안의 후예입니다. 붉은 피의 규율에 따르겠습니다!”

    흡혈귀들에게 혈연이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다.

    같은 혈맥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다면, 목숨을 기꺼이 내던질 정도다.

    길리도가 저렇게 고분고분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자네에게 그 어떤 불이익도 없도록 힘쓰겠다 약조하겠네.”

    스칼렛은 길리도를 짐짓 안심시키듯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701호 둥지. 그리고 그 둥지의 관리자 아비엥이 최근 연맹과 나눈 거래를 알고 싶네만.”

    “밤의 어머니께 맹세코 제가 아는 모든 걸 대모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길리도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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