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41화
방패의 망집 세글리트(4)
땅굴을 파내서 미량의 마나석을 캐내고, 고블린 주술사의 지팡이에 박혀 있는 마나석을 갈취해도 말이다.
중급 부화장을 설치해놨는데 다른 놈들에게 발견되어서 파괴된다면?
그 자리에서 정제된 마나 1,500이 증발하는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복통이 밀려올 만큼 끔찍한 일이다.
어쨌거나 세글리트 토벌 후 챙겨갈 만한 전리품이 없나 확인해 보자.
“쮸!! 쮸쮸!!”
“키륵, 키륵키륵!”
“쮸!!”
자, 레벨업으로 얻은 스테이터스도 다 분배했고. 스킬도 확인했으니 남은 건 세글리트 토벌에 따른 보상이다.
세글리트는 풋내기 모험가가 감히 토벌에 도전해볼 만한 마물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하이브 마인드가 아니라면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놈이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고블린킹 파르카 이상의 보상을 기대해볼 법했다.
“햄토리, 내려놔라. 각하의 자비심이 바닥나서 앞니를 두 동강 내버리기 전에 말이다.”
“쮸…….”
세글리트의 시체에서 쏟아져 나온 골드만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저렇게 수북이 쌓인 걸 봐서는 족히 3만 벨은 되지 않을까?
하지만 공용 통화가 중요하겠나? 세글리트는 숨겨진 고대종 마물인데.
“뭐가 나왔으려나.”
방패 더미를 쭉 둘러보자 눈에 띄는 무구가 두 개 있었다.
첫 번째는 검붉은 오라를 내뿜고 있는 방패였다.
[세글리트의 미혹]
[착용 조건 : 레벨15, 근력 10]
[방어력 : 60]
[민첩 : -5]
[화염 저항 : -10]
[내구도 : 20/20]
[옵션1 : 가드 성공 시 데미지의 70%를 반사.]
[옵션2 : 가드 성공 시 공격자에게 20%의 확률로 상태 이상 ‘매혹’을 시전.]
[옵션3 : 가드 성공 시 공격자에게 20%의 확률로 상태 이상 ‘공포’를 시전.]
[옵션4 : 자동 수복(3시간에 내구도 1 회복)]
[정보 : 방패의 망집 세글리트의 원념이 담긴 방패.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방패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헐…….”
일단 이건 확실히 에픽 클래스의 장비다.
에픽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게 가정 사실.
'옵션이 사기네, 사기야.'
공격을 막아내기만 해도 데미지를 70%나 되돌려주고, 20%의 확률로 매혹과 공포를 건다.
20%의 확률이라고 하면 굉장히 낮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높은 수준의 전사들의 싸움에서 1초에 몇 번의 공격이 오가는지 알고 있다면 결코 낮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패를 그럭저럭 쓸만한 방패라고 묘사해 놨다고? 미쳤냐, 한주호? 이게 그럭저럭이라고?’
이건 그야말로 주인공 혹은 녀석의 동료들에게만 허락되는 사기 아이템의 일종이다.
게다가 무려 자동 수복이라는 옵션까지 달려 있다.
민첩과 화염 저항이 조금 떨어진다는 것만 빼면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한 방패였단 말이다.
“쮸쮸!! 쮸쮸!!”
“이노무 쥐새끼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질겨!?”
방패 ‘세글리트의 미혹’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찰나. 햄토리가 잽싸게 다가와 방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생이별했던 연인과 재회한 것처럼 끌어안고는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쮸…….”
“내려 놔. 내가 전리품 하나 준다고는 했어도 그건 좀 욕심이 과하지 않냐.”
“쮸우…….”
내 말을 들리지도 않는지, 햄토리는 방패를 끌어안은 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쮸우, 쮸쮸, 쮸…… 쮸쮸쮸.”
“키륵키륵! 키르륵!”
“저 렛맨 전사가 뭔가 이상한 말을 하는데……. 어쩐지 기분 나쁜 방패로구만.”
“뭐라는데?”
“방패한테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있네…….”
“지저스 크라이스트…… 환장하겠네.”
어쨌거나 상당히 좋은 장비 아이템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햄토리가 초창기부터 고생도 많이 했고.’
초창기부터 이번 세글리트 토벌전까지 모두 통틀어 활약하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처음 준 방패도 꽤 오래 쓰지 않았나? 다른 렛맨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대장인 햄토리의 장비를 업그레이드 시켜줘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일단 햄토리가 쓰게 하고 나중에 급하게 돈이 필요하면 뺏어서 팔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후.
“그렇게 마음에 들면 햄토리 네가 써라.”
“쮸!! 쮸쮸! 쮸!!”
내가 허락해주자 햄토리가 눈물을 글썽일 만큼 기뻐했다.
[햄토리가 스킬 ‘강철 태세’를 획득했습니다.]
“쮸쮸!”
“하하, 그래. 각하가 좀 통이 크지.”
세글리트의 미혹은 사용처가 결정됐고, 남은 건 하나. 아까 전부터 방패 옆에 나란히 놓여 있던 거대한 알이다.
“스칼렛, 이게 뭘까?”
“글쎄. 크기로 봐서는 비룡종의 알 같기도 한데…….”
“비룡종?”
“나는 파충류 전문가가 아닐세……. 게다가 석화가 너무 진행된 상태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군.”
묵직한 알을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자.
[석화된 알]
[정보 : 딱딱하다. 그럭저럭 끼니는 될 것 같다. 중급 부화장을 이용하여 부화 속도를 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보는커녕 등급조차 표기되지 않았다.
‘그럭저럭 끼니가 될 것 같다니…… 이런 걸 깨서 먹는 것도 장난 아닐 거 같은데.’
중급 부화장에서 부화를 시킬 수 있다고?
하급 부화장에 넣는 것도 솔직히 주저가 되는데…… 중급 부화장이면 정제된 마나 1,500짜리 생산 시설이다.
그걸 만들어야 된다고?
이런 정체도 알 수 없는 알을 부화시키려고?
말도 안 된다. 언어도단이다. 그런 도박적인 수에 엄청난 코스트를 지불하는 건 얼간이나 하는 짓이다.
“스칼렛. 나는 말이다…… 이딴 알 같은 건…….”
“드래곤이 나올지도 모르지 않나?”
“당장 까자. 당장 까러 가자! 마력석 죄다 긁어모아! 계란 가챠 가즈아!”
그게 드래곤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 * *
“키륵, 키르륵!”
전리품의 처분을 결정지은 후.
혼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보르가가 멀찍이서 이쪽을 불렀다.
“뭔데?”
“키륵……? 키르륵, 키륵?”
“그래그래, 사람 고기는 훈제로 먹어야 맛있지.”
대충 맞장구를 쳐주자, 보르가가 펄쩍펄쩍 뛰며 손짓발짓을 하기 시작했다.
“키르륵, 키르륵! 키륵, 키륵!”
아무래도 날로 먹는 게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쨌거나 세글리트가 있던 공간은 어두컴컴해서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 보르가가 서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푸른색 점액에 푹 절여져 있는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시체인지, 그냥 의식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홀딱 벗은 것이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가끔 나도 콩나물을 먹으면 이런 걸 싸기도 하지.”
“……키륵.”
“어디 보자, 이거 뭐 뜯어갈 게 있나.”
챙겨갈 건 챙겨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가자, 점액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어? 이거 사람이잖아?”
뒤늦게 랄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세글리트에게 홀려서 봉인소로 소환되어버린 동료가 있다고 했지.’
부상을 입고 미쳐버린 동료.
그러니까 이 점액에 푹 절여진 아저씨가 빌리였다.
‘설마 죽은 건가? 죽은 거면 곤란한데.’
일단은 세글리트 토벌엔 성공했지만 끌려간 마을 주민까지 제대로 구출하지 못하면 추가 점수가 없지 않나?
슬쩍 다가가 생사를 확인하려던 순간.
“으, 으으…… 여긴……?”
“아, 빌리 씨! 살아 있었군요! 구하러 왔습니다.”
보르가에게 멀찍이 가 있으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다시 한 번 빌리에게 말을 걸어봤다.
“정신이 좀 듭니까? 여긴 지하 수도의 봉인된 방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 그, 그랬군……. 나는 또다시 망집에 사로잡혔던 거로군…….”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마을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빌리는 긴장이 풀리고 안심해서인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다시 의식을 잃었다.
좋아.
렛맨 전사들에게 빌리를 둥지 밖 출구까지 운반하라고 지시한 후.
“스칼렛. 혹시 모르니 저 녀석에게 빈큐럼을 걸어놓을 수 있을까?”
“알겠네, 안전장치를 걸어놔서 나쁠 건 없겠지.”
만에 하나라도 내가 하이브 마인드라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니까.
* * *
“오오! 정말 세글리트를 토벌해 주었군.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네, 누자베스!”
세글리트의 정수를 들고 오두막을 찾아가자 랄프가 크게 반기는 분위기였다.
“정말, 정말 고맙네……. 자네는 이 굴덴 마을의 큰 은인일세.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자네에게 고마워할 걸세. 마을에 하나뿐인 대장장이가 사라져서 불편했던 게 이만저만이 아닐세.”
“대장장이? 그 아저씨가요?”
“아, 자네는 아직 본 적이 없었나? 빌리는 굴덴에 하나뿐인 대장장이지. 머리가 좀 벗겨졌어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 나중에 이용해 보게.”
랄프의 풍성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식, 자기는 풍성하다고 은근슬쩍 탈모인 비하도 하네.
“정말 큰 고생을 했네. 내가 입이 닳도록 고맙다는 말을 해도 모자랄 정도야.”
“아닙니다. 마을의 주민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일이야 얼마든 더 해낼 수 있죠.”
“그 말이 정말인가?”
“제가 빈말은 못 하는 성격이라서요.”
“허허! 그것 참 믿음직스럽군! 아, 그리고 빌리가 정신을 차렸다니 한 번 찾아가 보게나.”
“네 그래야죠.”
짧게 대답한 후.
‘슬슬 나도 자리를 잡을 때가 왔군.’
굴덴 마을의 지리적 위치는 더없이 좋았다.
섬의 북동부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고 마을의 동쪽과 남쪽이 각각 갈라우드와 카타쿨라의 영지. 즉, 배후의 공격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산세가 험악하고 열악한 곳에 위치한 덕분에 다른 마을과의 거리도 꽤 떨어져 있다. 초기 거점으로 삼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일단은 빌리부터 확인하러 가봐야겠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중하고도 하나뿐인 대장장이 아닌가? 굴덴 마을의 점령까지 고려하고 있다면 빌리는 더더욱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나저나 그 검은 고양이는 어디서 난 건가?”
랄프는 내가 안고 있던 고양이를 보더니 그렇게 물었다.
“아, 오다가 주웠어요. 저녁에 야영이라도 하게 되면 나비탕 끓여 먹으려구요.”
대충 대답하고는 랄프의 오두막을 벗어나 곧장 굴덴 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