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39화
방패의 망집 세글리트(2)
“작가님, 동료들 장비도 업그레이드하죠.”
“하…….”
“한숨 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요. 제 생각엔 그 방패 들고 다니는 덩치 큰 멍청이. 걔 장비가 너무 수수한 느낌이라 주인공에게 도움이 별로 안 된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데부스요. 팀장님이 중갑 기사 파티에 넣으라고 해서 만든 캐릭터인데…….”
“아, 그래 데부스. 그런데 작가님 말은 똑바로 해야죠. 저는 어디까지나 중갑을 입은 망국의 공주 기사 히로인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앰병. 솔직히 여자가 중갑 입고 방패 들어봤자 뭐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데부스만큼 덩치도 있고 근육도 있어야 방패 전사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개죽강 소리 그만하죠, 작가님. 어차피 동료들이라고 해도 주인공 류시혁이 혼자서 싹다 쓸어버리면 박수나 치는 역할들인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합니까? 기왕이면 예쁘장한 공주 기사가 쳐주는 박수가 더 기분 좋지 않습니까? 어쨌든 걔 장비나 업그레이드합시다. 기왕 이번에 팍팍 밀어주는 김에 주인공이 안 쓰는 아이템 던져주자는 말입니다.”
“개죽강은 뭔데요?”
“개소리하다 죽빵 맞고 강냉이 나가는 소리요.”
“아니…… 그럼 박수나 칠 건데 장비 업글은 뭐하러 시켜줘요. 차라리 데부스가 마시면 미소녀가 되는 비전물약이나 주면 되지.”
“작가님 천재세요!? 당장 그 아이템 넣죠!”
고백하겠다.
당시엔 박태준 팀장이 퇴근하는 길에 괴한들에게 납치당해서 억지로 기름치를 꾸역꾸역 먹게 되고, 다음날 급성 설사로 결근하길 기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박태준 팀장님의 지혜로우며 은혜로운 선구안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박태준 팀장님…… 당신은 도덕책…… 조용필 오르가즘 추신수…….’
무사히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박태준 팀장의 집으로 찾아가 기름치를 한 박스 선물로 드리자. 그래, 그렇게 다짐하며 세글리트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세글리트 자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지.’
내 소설에선 류시혁이 지하 수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비밀통로에서 발견한 몬스터니까.
심지어 얼마나 잡몹 취급인지 전투 신도 없다.
‘대충 류시혁이 세글리트를 일격에 죽였다는 묘사.’
그 정도 수준이란 말이다.
그리고 세글리트를 잡아서 얻은 방패 역시.
‘대충 류시혁이 쓸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개쩌는 방패라는 설명.’
그 정도 수준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세글리트를 잡아 고대 유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자, 그럼 부대 점검을 해볼까.”
가장 먼저 언더 케이지 부대.
부대원의 수가 70마리로 늘어나 있었고, 평균 레벨이 30에 도달해 있었다.
햄토리의 전투 경험이 상당히 쌓인 덕분에 부대 전체가 상당히 정교하고, 날카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내 둥지의 검이자 방패. 그리고 핵심이다.
“햄토리.”
“쮸우, 쮸!”
“지금까지 해왔던 만큼만 해내면 전투 후 전리품 하나 정도 슬쩍해도 눈감아주마.”
“쮸!!”
햄토리의 북슬북슬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후 고블린 서비스 부대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에 부대 규모가 늘어나서 총 55마리의 고블린 사수가 대기 중이었다.
“오, 보르가. 와탈라가 없어지니까 네가 대장이냐?”
“키륵!”
“그래, 이번에도 고생 좀 하자.”
“키륵키륵!”
새롭게 고블린 서비스의 부대장이 된 보르가의 어깨를 다독였다.
전투의 기선 제압이 전열 부대의 충돌에 달려 있다고 해도, 원거리 지원 부대의 칼 같은 후방 지원 능력이 빠지면 안 된다.
되는 대로 쏘는 원거리 엄호 사격이 아니라, 철저하게 통제되는 ‘면 타격’이 핵심이다.
그리고 다음은 스칼렛의 통제를 받고 있는 비르겐슈타인 부대. 루칸다의 부재로 꽤나 심기가 불편한 놈들이다.
“이거 어쩌냐. 우리 둥지 형편이 이래서 흡혈귀의 명령에 따라줘야 되는데.”
“각하의 의지라면 따를 뿐입니다.”
“조만간 쓸만한 챔피언이 생기면 지휘권을 그쪽으로 넘겨주마. 그때까진 스칼렛 말 잘 들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비르겐슈타인 부대는 언더 케이지나 고블린 서비스와 평균 레벨 자체는 비슷하다. 하지만 원래부터 우월한 개체 성능과 잠재 성장력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레벨이라고 해도 훨씬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었다. 이번 세글리트 사냥에서도 활약을 기대해볼 만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스칼렛의 직계 부대 ‘그레이브 야드’가 남아 있었다.
90여 마리의 구울이 흐느적거리며 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머스킷을 한 정씩 어깨에 걸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급하게 마련한 철제 투구를 머리에 얹어 놨다는 점이다.
구울들이라 머리만 멀쩡하면 계속 싸울 수 있으니, 저 정도의 방어구로도 충분하다는데…….
“스칼렛. 그레이브 야드 부대는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냐?”
“한 마리당 세 발씩 탄환을 소지하게 했네. 만약 이번 전투에서 탄환과 화약을 모두 소비한다면, 다음 전투 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겠구만.”
최악의 경우 세글리트 토벌에 성공한 직후 아비엥의 군대가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레이브 야드 부대는 최대한 탄환을 쓰지 않는 방향으로 운영해야겠네.’
거기까지 확인한 후 내 능력치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꽤나 많은 전투를 겪어왔고, 그 덕분에 상당히 레벨이 올라 있었다.
류시혁이 카타쿨라의 목을 치기 전에 세글리트를 잡았으니 35레벨에 가까운 상태였겠지.
[이름 : 누자베스]
[레벨 : 38]
[클래스 : 하이브 마인드]
<스테이터스>
[근력 : 36(30)]
[민첩 : 36(30)]
[체력 : 33(28)]
[마력 : 63]
[지배력 : 53(75)]
<정보>
[진화 진행도 : 31%(2회)]
[경계도 : 80]
[위장 친화도 : 350]
[지배 : 272/320]
스테이터스는 2차 진화에서 ‘초월 의지’를 선택한 덕분에 직접 전투에 나서기 위한 스테이터스가 상향 조정되어 있었고, 반대로 지배력은 하향 조정되어 있었다.
'그럼 스킬도 확인하면…….'
<스킬>
[전쟁 군주(패시브)-지배 중인 마물의 전투 경험치 20%를 회수합니다.]
[하급 부화장 생성(액티브)-하급 부화장을 생성합니다.]
[크랙 펠론 렌드마이어(패시브)-모든 병기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크랙 에임페리얼 콜(액티브)-병기를 소환합니다.]
[침묵의 밤(액티브)-직경 20미터의 지역을 5초 간 ‘침묵’상태로 만듭니다.]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네.’
맨손으로 이 시궁창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벌써 이 만큼의 규모를 지닌 군대를 손에 넣은 것이다.
게다가 벌써 40레벨에 가깝게 나 스스로를 성장시켜온 것이 아닌가!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그럼 브리핑했던 대로 진행해 보자고.”
세글리트에 대한 정보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하지만 35레벨의 류시혁도 해낸 일을 내 군대가 못 해낼 리 없지 않나?
물론 그 녀석이 말도 안 되는 먼치킨 능력에 개연성 따윈 개나 줘버린 주인공 버프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이쪽은 군대란 말이다.
“세글리트 토벌전의 프롤로그부터 느긋하게 써보도록 하지. 그래, 첫 문장은 이런 느낌으로 하는 게 어떨까?”
지하 수도의 긴 통로를 빠져나오자 보물 창고였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표절시비 걸리면 오마쥬라고 우기도록 하자. 꼭이다.
* * *
“쮸쮸! 쮸!”
“우워어어어!”
“키륵!”
콰앙!
언더 케이지 부대가 문을 박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어두컴컴하게 칠해져 있던 공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인드 모드로 제법 넓은 지역을 한눈에 살필 수 있지만, 부대가 아직 정찰하지 못한 구역은 검은 안개로 뒤덮여 확인할 수 없는 구조였다.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허공에서 내려다보았다.
‘지하 수도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었군.’
도저히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광활했다. 게다가 광원도 희박한 덕분에 공간의 벽면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
기세 좋게 진입한 언더 케이지 부대가 민망할 만큼 고요했다.
[누자베스 : 스칼렛, 뭔가 보이냐?]
[스칼렛 :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군. 다만 이 공간이 작위적인 간섭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네.]
[누자베스 : 그래, 햄토리. 그대로 부대를 전진시킨다. 고블린 서비스 부대와 그레이브 야드 부대는 거리를 두고 뒤를 쫓는다.]
[햄토리 : 쮸!]
언더 케이지 부대가 선봉을 맡아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고블린 서비스 부대가 따르고, 후미를 그레이브 야드 부대가 경계하며 쫓고 있었다.
‘이거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데? 지하 고대 문명을 발견한 거야, 뭐야?’
부대가 전진할 때마다 내 시야도 같이 확장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햄토리 : 쮸쮸!]
[보르가 : 키륵! 키키!]
[햄토리 : 쮸으, 쮸!]
[스칼렛 : 그건 나도 처음 알았군.]
[보르가 : 키륵, 키르륵.]
[스칼렛 : 그런가? 흠…… 확실히 그럴 것 같구만.]
[누자베스 : 한창 담소를 나누는 중에 미안한데, 공용어가 아니면 해석 좀 해주면서 얘기할래?]
[스칼렛 : 인간고기는 직화로 구워 먹으면 맛이 떨어진다고 하는군. 신선할 때 훈제로 해놓는 편이 풍미가 산다는데.]
[누자베스 : ……작전하고 상관없는 지방방송 꺼라. 보르가 너 이 소름끼치는 새끼, 사람고기는 또 언제 먹어봤냐.]
[보르가 : 키륵…….]
[햄토리 : 쮸쮸!]
[스칼렛 : 햄토리는 자기도 어서 먹어보고 싶다고 하는군.]
[누자베스 : 쥐새끼 너 인마, 내 둥지에선 인육 금지야.]
[햄토리 : 쮸…….]
가끔 이럴 땐 이 녀석들이 의심할 여지없는 마물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인간이 아닌, 마물의 수장격인 하이브 마인드고 말이다.
‘망설이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살인에 대한 거부감.
그 거부감 때문에 생기는 찰나의 망설임.
그런 것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내 명운을 결정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부대가 전진하던 중.
덜그럭.
“쮸우!”
“키익!”
언더 케이지 부대의 선봉에서 소란이 일었다.
갑자기 놀라서 뒤로 펄쩍 뛰나 싶더니 이내 몰려들어 바닥을 숏소드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텅, 텅텅!
방패를 두들기는 소리가 넓은 공간에 반향을 일으켰다.
[누자베스 : 스칼렛, 확인해.]
[스칼렛 : 음……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방패를 밟고 놀란 모양일세.]
[누자베스 : 햄토리, 호들갑 떤 놈들 이름 기억해 놨다가 보고해라. 가뜩이나 혼자 있어서 무서운데, 놀라게 하고 있어.]
[햄토리 : 쮸쮸, 쮸우!]
이번엔 대열의 중간에 서서 진군 중이던 햄토리가 갑자기 대열에서 벗어나 측면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낡은 우드쉴드를 하나 주워들었다.
[누자베스 : 이노무 쥐새끼가 또또 손버릇 나오는구만. 당장 내려놓고 대열로 복귀해라.]
[햄토리 : 쮸…….]
햄토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방패를 놓으려는 순간!
“쮸!?”
마치 방패에 얇은 실이 달려있었던 것처럼 쭉 당겨졌다. 햄토리가 그대로 끌려갈 뻔했지만, 이내 손을 놓고 대열로 돌아왔다.
[스칼렛 : 낌새가 이상하군.]
[누자베스 : 나도 봤어. 진형 갖추고 대기해.]
덜그럭, 덜그럭.
사방에서 소란스러운 음색이 울리기 시작했다.
점점 시야가 밝아지며 내 부대가 위치한 주변이 자세히 보였다.
“방패?”
사방에 수십, 아니 수백 수천 개는 족히 될법한 방패들이 지면에 떨어져 있었다.
그 방패들이 갑자기 덜그럭거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는 심령 현상이다.
덜그럭거리던 방패들이 한 방향을 향해 밀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