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38화
방패의 망집 세글리트(1)
아비엥은 한동안 잠잠했다.
하긴 별거 아닌 버러지라고 생각하며 건드려봤던 것에게 호되게 물려 봤으니 신중해질 법도 하다.
병력을 보충하고 이쪽의 동태를 염탐하는 등의 밑작업은 하고 있을 것 같지만.
“누자베스…… 자네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대체 시궁쥐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굴덴 마을의 촌장 바커스가 아연실색하며 말했다.
오늘도 겸사겸사 마을에 들리는 김에 시궁쥐 꼬리를 잔뜩 가져왔더니 또 저런 반응이다.
물론 내가 직접 잡는 건 아니고, 언더 케이지 부대의 렛맨들이 매일같이 잡아대고 있었다.
병력 보충을 위한 재료 수급도 되고, 부대의 전투 연습도 되며, 이렇게 꼬리를 모아오면 공용통화인 벨로 환전도 가능하다.
“이제는 잡을 필요 없나요?”
“아니, 아니 그런 걸 아닐세! 하지만 이렇게까지 시궁쥐에만 집착하는 모험가는 처음 보는군. 자네에게 시궁쥐 슬레이어라는 이명을 붙여주고 싶을 정도네.”
“나쁘지 않네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견습 수녀와 엘프 궁수. 그리고 눈을 가리고 다니는 누님 히로인이 추가되면 더없이 완벽하니까.
“아, 그렇군. 랄프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네. 고블린킹 파르카를 사냥했다고 말일세. 보기보다 실력이 출중한 모양이야, 허허!”
“솔직히 말해서 파르카하고 다이다이 뜰 정도면 이 섬에서 상위 1% 되는 모험가 아닌가요?”
“그렇지, 그래. 대단하구만! 길드의 지부장 다울도 자네의 등급을 상향 조정해달라고 보고서를 올렸다는군. 이러다 카타쿨라의 둥지까지 자네가 토벌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빙긋 웃어 보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카타쿨라의 둥지까지 흡수하면 그 다음 타깃은 갈라우드다. 아리카 섬을 완전히 장악하고 본도로 진출하는 것이 현재의 목표였다.
그 다음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류시혁과 백주월 녀석이 이 세계에 적응하고 성장하기 전에 목을 쳐버리는 것이다.
그 먼치킨 사이코패스 새끼들이 활개를 펼치기 전에 어떻게든 손을 써야만 했다. 거기까지 목표를 달성한다면, 생존 확률이 확 올라간다.
둥지를 생추어리 레벨까지 올리면 더 이상 건드릴 수 있는 인간 모험가가 없지 않나? 대충 마왕군에 협력하는 척하면서 후방에서 꿀 빨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만 찾아내면 된다.
‘여기까지가 메인 퀘스트라면.’
서브 퀘스트로는 디드리트 같은 엘프 히로인을 찾아내서 현실로 돌아갈 때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다.
에필로그도 다 구상해 놨다. 엘프 히로인과 알콩달콩 신혼 생활을 즐기면서…….
“그래서 랄프가 자네를 믿고…… 이보게, 누자베스. 내 얘기를 듣고 있나?”
“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침까지 흘리나?”
“부부 생활에 대해 묻는 건 성희롱 아닙니까.”
“어, 어……? 아니, 자네도 꽤나 엉뚱하군. 어쨌거나 랄프가 자네에게 맡기고 싶다는 의뢰가 있다니 시간이 된다면 찾아가 보게.”
랄프가 새로운 의뢰를?
기왕 마을로 나온 김에 랄프의 오두막도 찾아가 보기로 했다.
* * *
“오, 왔나. 마침 자네가 길드에 찾아오지 않았는지 다울에게 물어보고 온 참이네.”
“촌장님한테 얘기는 대략 들었어요. 맡기고 싶은 일이 있다고.”
“일단은 안으로 들지.”
랄프는 파르카 토벌 이후부터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별 능력도 없으면서 허세만 부리는 애송이 모험가 취급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랄프의 눈빛에서 신뢰가 묻어나고 있었다.
오두막 안으로 발을 들이자 랄프가 곧장 차를 내왔다. 저번에 마셨던 것과 같은 구형의 검은 고체를 우려낸 그 차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두 가지겠지.
이게 이쪽 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타피오카 스타일이거나, 아니면 들판에 널려 있는 토끼똥을 주워다가 우려낸 것이거나.
합리적으로 추론하자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나무로 된 찻잔을 들어 홀짝이고 있자, 랄프가 뭔가 말을 꺼내기가 힘든 듯 머뭇거렸다.
“일단은 의뢰 이야기를 하기 앞서 먼저 해야 되는 이야기가 있네.”
“또 등급이 딸리니 사전 의뢰를 하고 와야 되나요?”
“아니, 그런 걸 아닐세! 누자베스 자네가 실력 있는 모험가라는 건 나를 포함해 마을 주민들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그럼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요?”
내가 묻자, 랄프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실은 이번 의뢰는 줄 수 있는 보상이 없네.”
좋다.
이제는 완전 호구로 보는 모양이다.
여기가 무슨 헬조선도 아니고 열정 페이라고?
작가가 김치맨이라고 헬적화 완료됐나? 이 새끼들이 진짜…….
입으로 토해질 때까지 콧구멍에 이 토끼똥을 모조리 쑤셔 박아줘야 저런 헛소리를 안 하게 되는 걸까?
‘아니, 아니. 누자베스 그만. 착한 생각. 좋은 생각. 착한 생각, 좋은 생각. 심호흡 하자, 심호흡.’
하이브 마인드로서 격무에 지쳐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다. 하꼬 둥지 운영이 다 그렇다.
힘없는 영세업자로서 여기서 얻어맞고, 저기서 치이고 그러다 보면 성격이 파탄 나는 거란 말이다. 참고로 최근엔 직원 하나가 계약기간 만료로 나가버려서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미안하네, 누자베스. 보상을 준비할 수 없는 탓에 길드에 의뢰할 수도 없고 자네에게 이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네.”
“얘기를 먼저 들어보죠.”
랄프는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하는지 잠시 상념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고대 디오르그의 병기라고 알려져 있네. 글로레나 왕조가 이 섬을 손에 넣기 위해 찾아왔을 때 봉인이 풀어진 마물이지.”
랄프는 20여 년 전 그 마물을 봉인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 랄프를 포함해서 굴덴 마을에서 실력이 출중했던 3명의 동료와 함께 지하 수도의 이변을 조사하러 나섰던 것이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방패. 아니, 군체라고 표현해야겠군. 우리가 목격했던 것은 그런 끔찍한 괴물이었네.”
랄프와 동료들은 결국 그 괴물을 토벌하는 데 실패하고 지하 수도 어딘가에 봉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도망칠 수 있었지. 동료 중 한 녀석이 죽고, 한 녀석은 끔찍한 상처를 입고 미쳐버리나 싶었지만…… 지금까진 마을에서 잘 지내는 듯했네.”
그 순간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반쯤은 비명 소리처럼 들렸다. 그것도 오두막의 밖이 아닌, 귓가에서 직접 울리는 듯 가까웠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 소름이 쫙 돋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여자는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지만. 랄프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괴물은 고대 디오르그어로 세글리트. 방패의 망집이란 뜻일세.”
세글리트……!
이 섬에 존재하는 위협적인 고대종 중 하나다.
그리고 위협적인 만큼 값어치가 있는 유물을 지니고 있는 마물이었다.
“지금 그 반응을 보니 누자베스 자네도 세글리트의 시야에 들어온 모양이군. 세글리트를 직접 목격하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들킨 것인가.”
“잠깐, 잠깐만요. 혹시 그 미쳐버렸다는 동료 분은…….”
“그래. 세글리트를 목격한 나도 세글리트의 환상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게 됐네. 상처를 입었던 동료는 그 정도가 더 심했겠지.”
철퍽철퍽.
소리가 머리 위쪽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자, 오두막 천장에 시커먼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철퍽철퍽.
시커먼 무언가가 네 발로 기어 다니며 벽면까지 내려왔고, 그 형태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여자였다!
하나가 아니다. 아직도 천장 쪽에 수십 명은 더 있는 것처럼 검은 형태가 꾸물거렸다.
“아니…… 아니아니, 아니 잠깐만요. 아니, ×발 얘기만 들었다고 이런 게 보인다구요?”
“그래, 그런 모양이군.”
“야이 개…… 으아악! 지금 발목! 발목 붙잡았어!!”
“누자베스, 진정하게. 그건 전부 환각일 뿐일세!”
“이런 상황에서 진정할 수 있으면 모험가 말고 고스트 버스터하러 갔죠!!”
“이젠 세글리트를 토벌하는 수밖에 없네. 세글리트를 처리하지 않는 이상 이 환상은 사라지지 않을 걸세.”
“이런 미친놈아! 그 얘기를 가장 먼저 하라고!”
“내 동료까지 완전히 미쳐서 세글리트의 봉인소로 끌려갔네. 거기까지 끌려가면 자네도 끝이네. 아니, 토벌해야 되니 갈 수밖에 없나.”
랄프는 서둘러 열쇠를 꺼내 내 손에 꼭 쥐어줬다.
“이게 세글리트를 봉인한 방의 열쇠일세. 꼭 세글리트를 토벌하고 내 동료 빌리를 구해주게!”
“하…… 엄마…… 엄마 보고 싶다…….”
내가 아무리 겁이 없다고 해도 귀신은 무리란 말이다.
* * *
“전쟁 군주가 잡령을 무서워하다니. 귀공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따, 딱히 무서워하는 건 아니고 그냥…… 으아아아악!! 저기, 저기 왼쪽! 왼쪽 왔다아아!!”
“하아…… 심지어 저건 잡령도 아닌 허상 아닌가?”
스칼렛의 품으로 파고들며 손끝으로 가리켰다. 귀찮다는 듯 스칼렛이 손을 가볍게 허공에 휘두르자.
파아앗!
세글리트의 환상이 부서지며 흩날렸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세글리트보다 스칼렛의 영적 위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적 개입조차 무효화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스칼렛의 허리에 양팔을 감아서 찰싹 달라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는 모처럼 얻은 기회도 놓치겠군.”
스칼렛이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 앉아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툭툭 쳤다.
“이리로 오게. 귀공이 진정할 때까지 같이 있어 주겠네.”
“한심하다고 매도할 줄 알았는데…….”
“귀공은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겐가? 내 그렇게 매정한 흡혈귀는 아닐세.”
스칼렛이 쿡쿡 웃으며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주춤주춤 다가가 무릎을 베고 눕자, 내 어깨를 끌어당겨서 부드럽게 감싸 안아줬다.
따스한 온기는 없었지만, 상상 이상의 폭신함과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확실히 고대 디오르그의 병기라면 나쁘지 않은 수확이로군.”
스칼렛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서늘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의식이 순식간에 날아갈 듯했다. 지금 당장 깊은 잠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눈이 스르륵 감겼고,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위치도 알고 있고, 아비엥과의 교전이 소강상태인 지금이 토벌하는데 적기겠지.”
“그래, 잘 알고 있군. 당장 병력을 소집해 움직여야 되는데 우리 주군께서 이 모양이라 큰일이네.”
목소리가 가까웠다.
어느새 스칼렛이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듯 다가와 있었다. 차갑고 향기로운 날숨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몸이 물에 잠긴 듯 무거워졌다.
모든 것이 어찌되어도 좋다고 생각될 만큼 안락한 느낌이다. 스칼렛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부드러운 입술이 귓등을 간지럽혔다.
“잠깐만, 이대로 잠 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스칼렛이 벌떡 일어났다.
쿵!
그대로 머리가 떨어졌고, 뒤통수가 동굴 바닥에 찍혔다.
“끄악! 왜 갑자기 일어나고 난리야!”
“헛소리 그만하고 눈 뜨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건 귀공도 알고 있지 않나? 그리고 내 냄새도 제대로 묻혀 놨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걸세.”
눈을 뜨자, 스칼렛의 말대로 더 이상 환상이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나 환각 역시 마찬가지다.
“아, 그리고 흡혈귀에게 안길 때 그런 식으로 방심하다간 물릴 수 있으니 앞으론 조심하게.”
스칼렛은 먼저 준비를 한다며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래서 흡혈귀한테 홀려서 물리는구나…….”
욱씬거리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그런 감상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