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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37화 (3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37화

    낙원의 추방자들(4)

    “이 한적한 생활도 조만간 끝이라고 생각하니 섭섭합니다.”

    와탈라는 망태기에 담아온 흙에서 갯지렁이를 골라내며 말했다. 그 옆에 앉아서 낚싯대를 붙잡고 있던 루칸다는 강가를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암컷이라도 생겼냐, 와탈라.”

    “그, 그런 거 아닙니다! 루칸다 형님은 뜬금없이 무슨 소립니까!”

    와탈라가 화들짝 놀라며 격하게 반응했고,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루칸다가 피식 웃었다.

    “무리해서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다. 비록 파르카가 사라졌다고는 해도 실력 있는 전사가 남아주는 게 촌락의 안전을 위한 길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루칸다 형님이 남는 게 제일 아닙니까? 형님만큼 대단한 전사는 바체트 령을 샅샅이 뒤져도 없을 겁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수도 없군.”

    루칸다에겐 저주처럼 새겨진 사명이 있었다. 그 사명은 루칸다의 몸에 새겨져 결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기도 했다.

    본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 아리카 섬까지 온 것도 그 사명을 위해서였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고, 강물의 표면이 옅은 선홍색으로 덧씌워졌다.

    스산한 숲의 바람이 수면을 스치고 지날 때마다 낚시찌가 흔들렸다.

    “저번에 촌락 뒤편의 언덕에서 열매를 따고 있던 암컷 기억하십니까?”

    먼저 입을 연 쪽은 와탈라였다.

    얘기하기 멋쩍은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느릿하게 이어 말했다.

    “얼굴이 예쁜 편은 아닌데 하는 짓이 귀엽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 천막까지 데운 돌을 가지고 왔더라니까요. 제가 무슨 암컷도 아니고…… 한겨울에도 얼음물에 씻을 수 있는데.”

    와탈라는 그 암컷이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고 있다는 투로 얘기했지만, 어째선지 멋쩍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루칸다도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와탈라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생을 죽이는 일만 해왔습니다. 인간도 많이 죽였고, 다른 마물도 죽였고, 같은 고블린 동포들도 죽였습니다. 칼 한 자루면 이 몸뚱이 하나 부지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부락을 이룬 고블린들이 아니라, 루칸다 같은 떠돌이 고블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약탈하고, 빼앗고, 죽이는 일 뿐이다. 그러다 역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악명이 퍼져 왕국군이나 모험가들의 손에 토벌당하는 것이다.

    “루칸다 형님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그런 식으로 살다가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형님께서 구해주신 이 목숨…….”

    “와탈라. 너는 이곳에 남아라.”

    루칸다가 와탈라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권리가 있다. 그 권리는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도, 왕의 권세도, 현자의 이념도 박탈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오로지 천부의 용서받을 권리만이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권리였다.

    “와탈라 너는 아직 늦지 않았다. 네 남은 삶은 그 암컷에게 헌신하며 용서받는 여정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칸다가 낚싯대를 거뒀다. 낚은 물고기를 담기 위해 가져온 망태기는 텅텅 빈 상태였다.

    “루칸다 형님도 이곳에 남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와탈라가 루칸다의 뒤를 따라 허겁지겁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루칸다는 먼저 두세 발 정도 앞서 나가며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태양의 어머니께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빌어먹을 짐승 새끼도 있는 법이지.”

    용서받을 권리조차 박탈당한 짐승은 오로지 순례의 사명에 따라 비루한 방랑을 거듭해야 했다.

    * * *

    “솔직히 말해 슬슬 가르치는 걸 포기하고 싶어지는구만. 그래도 열심히 가르치다 보면 중간은 할 줄 알았건만.”

    “그래도 고블린킹 파르카하고 다이다이도 떠서 살아남았는데.”

    “그깟 필멸종을 상대로 그렇게나 고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재능이 없다는 반증일세. 귀공의 동혈인 바하무트는 검을 뽑으면 산이 갈라지고, 검을 휘두르면…….”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바하무트 얘기 좀 그만해.”

    “같은 피를 타고났으니 그 절반쯤은 재능이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의 수련이 끝났고, 체력이 완전히 방전되어 드러누워 있자 스칼렛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물론 전투란 건 검사 하나가 날고 긴다고 한들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지만.”

    “그럼? 뭐가 중요한데? 역시 머릿수인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수없이 많지. 운이나 기적 같은 불확정적 요소도 그중 하나고 말이지. 하지만 이 늙은이가 생각하기에 전투의 판도란 늘 이유의 경중에 따라 기우는 걸세.”

    “더 간절한 쪽이 이긴다는 말인가.”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말도 있지 않나? 누가 했던 말이더라? 피콜로 더듬이 빠는 소리 하던 아줌마였던가, 아니면 목사 뿔을 턱 빠지게 빨던 아줌마였던가.

    어느 쪽이든 제정신이 아닌 아줌마들이니까 적당히 넘기자.

    “귀공의 검술 실력이 빨리 늘지 않는 것도 그런 절박함이 결여된 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스칼렛은 쿡쿡 웃은 후 검을 내려놨다.

    “검술을 수련할 시간에 보검급의 검을 찾는 데 노력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네! 왜 그런 명검은 안 나오지? 여기 아리카 섬인데. 전쟁 때 썼던 명검이 한두 자루 정도는 묻혀 있어야 정상 아닌가?”

    하루 종일 코볼트 작업대를 돌리고 있었음에도 유물 발굴 수는 여전히 0이었다.

    가장 먼저 손에 넣고 싶은 건 역시나 ‘세글리트의 미혹’이라고 불리는 유물이다.

    하지만 내가 쓸만한 명검도 대환영이란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필멸종이 차고 다니던 흑요석 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네.”

    “그러고 보니 루칸다는 검을 두 자루씩 가지고 다녔지.”

    허리춤에 채워진 검은 두 자루.

    루칸다가 즐겨 사용하던 것은 평범한 강철 곡검이다. 나머지 한 자루인 ‘흑요석 검’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실전용이 아니라 주술적 의미가 있는 장신구라고 생각해 왔다.

    ‘이 섬에서 찾을 물건이 있다고 했었지.’

    원래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이 섬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 와중에 고블린킹 파르카라는 공공의 적이 생겨서 나와 일시적으로 협력을 했던 것이고 말이다.

    오늘까진 하라부의 촌락에서 머물다가 내일 동이 틀 때쯤에 남쪽으로 향하겠다는 얘길 들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찌할 작정인가? 파르카를 토벌한 것까진 성공했지만 그 덕분에 이웃사촌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나?”

    “701호 말이지.”

    701호 둥지의 관리자 아비엥.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웃는 얼굴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녀석의 하청업체 사장인 파르카의 뚝배기를 깨버리고 도산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 아닌가?

    게다가 701호 둥지의 머스킷티어 부대 하나를 전멸시키고 90정에 가까운 머스킷까지 약탈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미수에 그쳤지만 암살 시도까지 있었다.

    이 정도면 철천지원수지간이 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녀석이 내 둥지를 가만히 놔둘 리 없지. 게다가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고.”

    701호 둥지만 손에 넣으면 막대한 양의 초석이 덤으로 들어온다. 초석 채집장은 머스킷티어 부대의 규모를 늘리고,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시설이다.

    “루칸다도 없어서 이제 암살 시도도 못하겠고.”

    “남은 건 전면전인데 상대가 천치가 아닌 이상 구울 부대의 대응법을 갖추고 올 걸세. 게다가 남은 탄환도 거의 없으니 구울 부대는 다음 전투에서 큰 도움은 못 되겠지.”

    구울 부대를 제외하면 내 둥지에서 운영할 수 있는 부대는 ‘언더 케이지’와 ‘고블린 서비스’뿐이다.

    비르겐슈타인 부대는 전면전에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니 제외한다는 말이다.

    ‘가용 전력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버리면 이쪽이 취할 수가 제한되는군. 제한되는 만큼 추측하기 쉬워지고.’

    이제와서 부화장을 급하게 돌려 병력을 양산해 내더라도 녀석들의 좋은 사격 연습판이 될 뿐이다.

    작정하고 병력을 잔뜩 뽑아서 인해전술로 승부를 보는 건?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있겠지. 문제는 내 지배력이 그 정도까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험가 팀을 이용하는 것도 검토할만한 작전이지만.’

    현재도 굴덴 마을을 거점 삼아 활동하고 있는 모험가 팀이 하나 있다. 페페라는 여자애가 리더로 있는 바로 그 모험가 팀이다.

    ‘701호 둥지의 전력만 약화시키고 둥지 토벌에 실패한다면 베스트. 하지만 만에 하나 토벌에 성공한다면?’

    701호 둥지에 쌓여 있는 전리품 및 초석 채굴장 전부를 눈 뜬 채로 빼앗기게 된다.

    그것만큼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뼈아픈 손실이다.

    ‘아비엥만 처리하면 북동부는 손쉽게 정리 가능한데.’

    남동부는 카타쿨라의 둥지가 통합을 끝내 놨고, 서부는 모두 인간의 영역인 갈라우드의 영지였다.

    초석 채굴장만 온전히 손에 넣는다면 이 섬의 1/4를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쥐꼬리만한 섬 하나 손에 넣기도 힘들군.”

    몸에 묻어 있던 먼지를 털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일수록 루칸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 * *

    “오, 파르카가 당했다고?”

    마치 흥미로운 얘기라도 들은 듯한 목소리였다.

    손에 묻어 있던 핏물을 털어내던 중년의 남성은 흥미가 동한 것처럼 눈을 빛냈다.

    아니, 중년의 남성이라고 표현하기엔 인간의 외형과 사뭇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보일 만큼 창백했고, 머리 양측으로는 산양 같은 거대한 뿔이 솟아나 있었다.

    인간 귀족처럼 멋드러진 연무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실체는 마물. 마왕 아일라드가 만들어낸 합성 생물인 하이브 마인드였다.

    “예, 카타쿨라 각하. 파르카와 함께 행동했던 결사대의 부대원들까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섬에 들어온 모험가 무리가 하나 있었지. 갈라우드 녀석은 자기가 관여한 일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딱 뗐지만 말이야.”

    카타쿨라 남작은 대충 상황을 추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걸어놨던 망치와 쐐기를 들었다.

    “으, 으읍! 으으읍!”

    그러자 반대편 벽에 묶여 있던 인간 남자가 새파랗게 질려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끔찍한 고문을 당한 것인지 만신창이였다.

    벽에 묶인 인간은 그 한 사람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부 헤아려 보면 16명. 젊은이도, 늙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을 고문하는 것은 카타쿨라 남작의 유일한 취미였다. 물론 본인은 이러한 행위를 ‘고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각하, 외람되지만 파르카를 처리한 것은 인간 모험가가 아닙니다.”

    콰득!

    부관이 보고한 것과 동시에 카타쿨라가 들고 있던 쐐기를 남자의 팔뚝에 때려 박았다.

    “끄으으윽!!”

    “음이 너무 높네. 약간 조율이 필요하겠어.”

    카타쿨라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부관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럼 아비엥의 배신인가? 그 천한 것이라면 사내답지 못한 치졸한 짓도 서슴없이 하겠지.”

    “그것 역시 아닙니다.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의 소행입니다. 파르카를 처리하고 아비엥의 둥지를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늙은 여성의 앞에 서서 쐐기를 들던 카타쿨라가 움직임을 멈췄다.

    “신참 같은데? 765호라면 아직 배양막도 다 안 벗겨진 어린애 아닌가?”

    “예, 각하. 자아를 각성한 지 두 달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 애송이가 아비엥에게 검을 들이대?”

    “한 번 접전이 있었고, 아비엥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모양입니다.”

    그 순간. 카타쿨라 남작에게 이 지루한 교향곡 연주보다 더 흥미로운 대상이 생겨났다.

    “누자베스. 누자베스라…….”

    과연 어떤 음색으로 울어줄지 상상하며, 카타쿨라 남작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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