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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36화 (3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36화

    낙원의 추방자들(3)

    고블린킹 파르카는 아리카 섬에서 꽤나 유명한 마물이었다.

    하이브 마인드 카타쿨라 만큼 절대적인 지명도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섬의 동부에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이나 모험가들 사이에선 심심치 않게 거론될 정도였다.

    도저히 고블린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거대한 체구와 놀라울 정도의 괴력. 거기에 수백에 달하는 고블린 병력을 거느린 네임드 몬스터.

    그렇기에 길드에서 정한 적정 수주 등급은 13급.

    한 자릿수 등급의 모험가만 되더라도 지방의 호족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다.

    13급의 모험가라면 이런 섬이 아닌, 본도에서 대규모 토벌팀에 무난하게 입단할 수 있는 수준.

    ‘이런 어린애가?’

    페페는 눈앞에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겉모습만 보기엔 대단할 것 없이 평범한 애송이 모험가다. 입고 있는 튜닉이라던가, 허름한 숏소드만 봐도 모험가로서의 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누구라도 한번 마주친다면 절대 잊지 못할 만큼 고혹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건 파르카 토벌과 관계가 없는 일이다. 미인계를 써서 잡았다는 둥의 해괴한 방법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거 대단하구만, 꼬맹이. 보기와는 다르게 터프한 모양이야.”

    “이거 촌구석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더니 방심 못할 경쟁 업자가 있었네.”

    한스와 잘론이 감탄하듯 누자베스를 칭찬했고.

    “쿨럭. 다른, 동료들은……? 쿨럭.”

    도루란이 그렇게 물었고 누자베스는 어깨를 으쓱인 뒤 대답했다.

    “이런 촌구석이라 같이 모험을 할 동료를 찾기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아직까진 혼자 잡다한 의뢰를 맡아 하고 있어요.”

    “말도 안 돼! 동료도 없이 혼자 파르카를 잡았다고?”

    “예, 기본적으론 그렇죠.”

    페페는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눈초리였다.

    물론 고블린킹 파르카가 네임드 몬스터에 속하는 고블린이라고 해도, 페페의 팀은 한 자릿수 등급의 모험가 팀이다.

    리더인 페페부터 9등급의 모험가.

    단신으로 하급 악마의 목을 쳐버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다. 파르카와 1:1로 붙어도 무난하게 승리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파르카가 거느린 수백 마리의 정예 고블린 전사들까지 포함시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혼자 수백 마리의 마물을 상대한다는 건 페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정도의 실력자면서 오늘은 왜 그렇게 맥없이 나한테 붙잡혔는데?”

    페페가 추궁하듯 물었고, 누자베스는 잠시 말을 고른 후 대답했다.

    “여자에겐 손을 올리지 않는다는 게 지론이라서…… 이런 이유로 되나요?”

    누자베스가 그렇게 대답하자, 잘론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이봐, 그 녀석은 여자가 아니야. 스텔라 님께서 애인하고 술을 잔뜩 마시고 정신없이 만들다가 여자의 몸에 남자의 정신을 넣어버렸거든. 겉모습은 여자 같지만 일주일만 지내보면 아주 상남자 중의 상남자…… 끄악!”

    “시끄러워, 잘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잘론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후 페페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무른 성격이면 모험가 그만두는 편이 좋아. 모험가들 중에선 질이 안 좋은 녀석도 많으니까. 만약 내가 나쁜 의도를 지니고 있었으면 누자베스 너 진짜 위험할 뻔했어.”

    “위험하다니, 어떤 식으로요?”

    누자베스가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순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게 만들 만큼 매혹적인 미소였지만.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둥지 토벌 전문이었지.’

    적의 적은 친구라는 옛말도 있지 않았나?

    누자베스의 안에서 음흉한 작전이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 * *

    “역시 이세계 라이프는 미소녀가 있어야지. 각하가 오늘 그런 중대한 사실을 깨닫고 왔단 말이다. 알겠냐, 코틀러?”

    “키…… 작업 힘들다, 어깨 아프다.”

    “이 자식이 각하께서 말씀하시는데 듣는 시늉도 안 하네? 라떼는 말이야, 어! 아니, 아니지. 내가 이거 소설로 쓸 때는 전부 각색해야겠다. 너희들 전원 다 미소녀 코볼트라고 묘사해야겠어.”

    굴덴 마을에서 둥지로 돌아온 뒤 잠시 코볼트들이 토굴 작업하는 곳에 와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코탈린 너부터 이름 바꾸자. 좀 더 미소녀다운 그런 이름으로. 주인공인 나하고 뭔가 썸이 있을 것 같은 이름 아무거나 하나 추천해 봐라.”

    “키…… 탈룰라?”

    “돌았습니까, 코탈린? 머리에 회충이 돌았나, 왜 하필 탈룰라냐고! 친구 엄마 이름 같잖아.”

    “키륵…… 효도하는 법 아시죠?”

    “하지 마. 그런 저질스러운 드립 그만해. 작품 질 떨어지니까.”

    “키륵! 히데! 히데!”

    “어느 쪽 히데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문제잖아! 코틀러 너 이 새끼 자꾸 비쥬얼락 관련 드립만 치는데 그거 하지 마라 진짜.”

    “미미쨩!”

    “너무 정석적인 미소녀 이름이라 태클을 걸 곳이 안 보이는데.”

    “미미즈쨩!”

    “너무 정석적인 미끼 이름이라 태클 걸 곳밖에 없잖냐.”

    “미래×기 유노쨩.”

    “너무 정석적인 미친년 이름인데다가 라임 맞추려고 작품명까지 끼워 넣은 부분이 감점 요소다.”

    하여간 코볼트 놈들에게 뭔가를 물어본 내 잘못이다. 어쨌거나 오늘 직접 체험하고 온 금발 미소녀의 파급력은 굉장했다.

    손만 잡아봤을 뿐인데 머릿속에서 손자 이름까지 지어놓게 될 줄이야!

    소설로 쓸 때랑 직접 경험하는 건 이렇게 큰 차이가 있구나. 금발벽안의 완벽한 외형을 지닌 미소녀가 손만 잡아줬는데 이 정도란 말이다!

    ‘도대체 류시혁 그 새낀 뭐가 문제였지?’

    내가 오늘 만났던 카를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건 하나 없는 미소녀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그런 시크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니…….

    게다가 손만 잡는 게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대놓고 적극적인 대쉬를 하는데, 뚱한 표정을 일관하는 건 재능의 영역이다.

    일단은 트렌드에 맞춰서 히로인들에게 시크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다. 설정을 대충 짜놔서 그냥 원래 성격이 그렇다는 정도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렇게 소설이 진짜 세계로 구현된 이상 구체적이고 명확한 원인이 생겨날 것이다.

    ‘젠장 알게 뭐야, 심영 아니면 빌리겠지.’

    어쨌거나 코볼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는 걸 뒹굴거리며 구경하던 중.

    “귀공, 오늘 마을에 다녀왔다면서 그 보상은 받아왔나?”

    “그래! 내 둥지에도 로리 뱀파이어 히로인이 있었지.”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혹시 나한테 연심을 품고 있다거나…….”

    “지랄 말고 보상 받아온 거나 얘기하세.”

    로리바바 속성에 욕쟁이 속성이라.

    욕쟁이 할머니를 컬트적으로 좋아하는 한국인의 니즈에 딱 맞다. 내 안에서 나름대로 고평가다.

    “보상금은 8,600벨. 그리고 봉인 스크롤을 하나 받았는데.”

    “공용통화는 이 재정난에 허덕이는 둥지 경영에 써야겠군. 그리고 봉인 스크롤은 확인해 봤나?”

    “아니.”

    “바빴던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혹시 꽝일까봐…….”

    스칼렛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후 어서 꺼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내가 진짜 이거 때문에 개고생했는데 별 시답잖은 스크롤이면 어쩌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두루마리 스크롤을 꺼냈다. 오늘 굴덴 마을의 길드에 맡겨져 있던 보상품을 받아온 것이다.

    “나는 그 길드라는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고작해야 고블린 우두머리 사냥에 걸린 품목 아닌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 나올 확률이 높겠지.”

    “뭐, 그렇긴 한데.”

    류시혁이나 백주월 같은 주인공 놈들이 깠다 하면 무조건 대박 나는 게 바로 이 봉인 스크롤이란 말이다.

    “진짜 큰 건 안 바라니까 5서클급 스킬만 걸려도 좋겠다.”

    “얼른 펼쳐보게. 나까지 궁금해지지 않나?”

    스칼렛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곳은 아리카 섬 아닌가?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여기는 ‘경주시’ 같은 곳이란 말이다. 뭐든 파냈다 하면 고대급 유물이 무더기로 터져 나오는 곳이다.

    그러니까 일말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었다.

    “제발, 제발제발! 하느님, 알라님, 부처님, 스텔라 님!”

    “하이브 마인드가 스텔라에게 기도를 하는 건 꽤나 골계로군…….”

    파앗!

    봉인 스크롤을 양손으로 꽉 쥐고 펼치자 새하얀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심장 박동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거칠어졌다.

    진짜 쓰레기 같은 스킬이면 오늘 하이브 마인드 접고 자연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 만났던 카를린 같은 참한 처자와 만나서 둘이서 오두막을 짓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상상을 했다.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봉인 해제자 ‘누자베스’는 스킬 ‘침묵의 밤’을 획득합니다.]

    “잠깐.”

    바로 스킬창을 열어 새롭게 획득한 스킬의 정보를 펼쳤다.

    [침묵의 밤(액티브)]

    [등급 : A]

    [정보 : 직경 20미터의 필드에 3분 간 ’침묵’효과를 적용합니다. 일몰 후 일출 전, 스킬의 적용 범위와 지속 시간은 두 배로 작용합니다.]

    -침묵에 걸린 플레이어 및 몬스터는 스킬 사용이 봉인됩니다.

    -중립 및 아군 플레이어 혹은 몬스터에게는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A급 스킬! 봤냐, 봤냐 스칼렛! 내가 이 봉인 스크롤은 당첨이 확정된 복권이라고 말했잖아!”

    무려 A급 스킬이다!

    이런 사기 스킬을 초반부터 얻는 건 주인공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거 내가 주인공을 해야 되는 모양이다. 안 그러면 개연성이 너무 없다. 일개 악당이 이런 운빨을 지니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침묵의 밤이라……. 고위종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잔재주겠군. 하지만 701호 둥지의 잡졸들을 상대하기엔 딱 알맞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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