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35화 (35/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35화

낙원의 추방자들(2)

“무능한 놈! 그깟 쥐새끼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놓치다니.”

아비엥의 노성이 701호 둥지의 심부를 울렸다.

그의 앞에는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사크바하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서있었다.

아비엥에게 얻어맞은 흔적이다.

찢어진 입술과 코에서 피가 흘렀고, 얼굴이 흉할 정도로 부어 있었다.

“고작 고블린 놈에게 침입을 허락한 것도 모자라, 레드포지 부대까지 전멸했다. 신도 용서하지 못할 만큼 무능한 오크 놈!”

그리고 레드포지 부대에 뒤이어 765호 둥지로 향했던 제3부대 ‘인베이더’ 부대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이다.

순식간에 레드포지 부대의 무장을 빼앗은 구울 부대는 고블린 머스킷티어 부대로 대응하기 힘들었다.

사크바하는 이전부터 아비엥에게 기동력을 갖춘 타격 부대의 필요성에 대해 매일같이 설득해왔다.

병종의 다양성이 결여된 군대는 반드시 취약점을 갖게 된다. 그러한 기초적인 이야기를 해왔지만, 아비엥은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그런데 드디어 머스킷으로 무장한 구울 부대가 나타나자 그 취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오크. 필요 없다. 나. 지휘자 한다. 오크보다 잘한다.”

그리고 701호 둥지의 오거 챔피언 ‘분다’가 입을 열었다. 분다는 4미터에 달하는 거구를 지닌 오거다. 아직 어린 편에 속하기에 전투나 사냥의 경험도 적고, 근력도 평균보다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분다가 ‘오거’ 종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모험가라면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제압할 수 있으며, 맨손으로 돌벽을 깨부술 정도의 괴력도 갖추고 있다.

오거는 단순히 물리적 힘만으로 겨룬다면 바체트 령 내에서도 견줄 상대가 거의 없는 종족이다.

실제로 701호 둥지의 챔피언 중에서도 가장 비싼 몸값을 지닌 마물이었고 말이다.

“이제부터 둥지 병력의 지휘는 분다가 맡는다. 사크바하 네놈은 제2부대의 부대장을 맡는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사크바하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머스킷을 빼앗긴 건 뼈아픈 실책이다. 하지만 녀석의 둥지에서 그 정도의 머스킷을 운용할 만큼의 자원은 없을 터.”

아비엥은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의 수준을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고블린킹 파르카를 처치한 건 높게 평가해줄 수 있지만, 아비엥 자신의 군대를 한 번 물린 건 그저 요행이었을 뿐이다.

방심만 하지 않으면 짓밟기 어려운 둥지가 아니었다.

“곱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누자베스. 묶어놓고 산채로 껍질을 모조리 벗겨주마.”

아비엥은 이빨을 바득바득 갈았다.

보잘 것 없는 둥지 주제에 자신에게 칼을 겨눈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었다.

* * *

“이것이 고달픈 영세업자의 삶이란 얘기다. 빌어먹을. 매번 목숨 걸고 전진 한가운데에 들어가야만 하는…… 그런 고통스러운 길이지.”

굴덴 마을로 이어지는 하천의 하류에서 나온 뒤.

나는 호위로 대동한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들을 굴다리 밑에 숨기며 말했다.

“햄토리한테 이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전에도 인간 놈들에게 들켜서 잡아먹힐 뻔한 적이 있거든.”

“예, 누자베스 각하만큼 용감한 하이브 마인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내가 말이야 포위를 당했는데도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말해줬다니까. 내 15마력 피스톤 엔진에…….”

대충 15마력 피스톤 엔진은 아무런 대가 없이 멈추지 않는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설명해 주자, 비르겐슈타인 부대원들 모두가 내 용기와 남자다움에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요지는 내 주유구에 끈적끈적한 디젤을 주유하는 취미는 없단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신호하면 당장 튀어 와야 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물에 비친 모습을 보며 복장을 점검했다. 어딜 봐도 평범한 인간 소년의 모습이다.

아니, 평범하진 않고 누구나 돌아볼 법한 미형의 소년이다. 솔직히 인간들에게 붙잡혔을 때 최대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런 외형을 택했다만.

그러니까 그런 전개가 있지 않냐.

뚱뚱하고 못생긴 여기사가 붙잡히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목을 쳐버리는 전개가 나오겠지만. 반면 임무에 최적화된 몸매의 여기사라면 ‘큿…… 죽여라……!’라고 해도 절대로 죽이지 않는 그런 전개.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런 외형을 선택한 것이란 말이다.

‘이건 오히려 눈에 띄어서 한번 본 사람은 절대 안 잊을 정도잖아.’

예상치도 못한 디메리트다.

혹시나 일전에 나를 덮쳤던 그 모험가를 또 만나면 반드시 알아볼 텐데…….

어쨌거나 파르카를 토벌한 보상은 받아야만 한다.

마음을 다잡으며 굴덴 마을의 길드로 향했다.

* * *

“흐아아악……! 사, 사람 살려! 동네 사람드으으을!”

“잠깐, 진정 좀 해. 오늘은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안심시킨 뒤에 전체연령가 소설에선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짓을 하려는 셈이죠. 농후한 민달팽이처럼 끈적끈적한 짓을 하려는 셈이잖아요.”

“얘가 진짜 뭐라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진정하고 얘기 좀 들어봐.”

또 마주쳐버렸다!

일전에 나를 덮치고는 옷을 벗기려 했던 그 여자애와 또 만나버렸다!

이럴지도 모르니까 조심조심 길드의 안쪽을 살피고 있었는데, 건물 밖에서 딱 마주친 것이다.

이젠 글렀다.

더 이상 반항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본의도 아니며, 박태준 팀장에게 미안하지만 코코아페이지 런칭은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간 빼박 19세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전개가 이어질 테니까. 내 15마력 피스톤 엔진이 거칠게 점화돼서는…… 이후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 민망한 신이 연출될 것이란 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보아라’ 노블레스 연재나 노리자. 이문화 교류 태그도 붙여야지.

딱히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전부터 보아라가 한국 최고의 연재 플랫폼이라고 생각해 왔다! 진짜다!

그래, 각오는 끝났다.

이미 엔진의 이그니션 서킷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자, 여자애가 당황해서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걸어왔다.

“하아…… 이제 좀 진정했어?”

“예, 진정했어요. 인생 첫 플레이가 야외라니…… 상상도 못했지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어쨌든 전에 나랑 여기서 만난 적 있지?”

“그때는 미수에 그쳤지만…….”

이름이 페페라고 했던가?

모험가들이 팀에서 가명을 쓰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가문이나 출생지를 숨기기 위해서 말이다.

어쨌거나 페페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애였다. 덕분에 한 번 보고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페페는 잠시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 그때는 네가 인간으로 의태한 마족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어. 절대 나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용서해 줘.”

“예? 진짜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그럼 다른 이유라도 있어?”

“아니요…….”

“그렇게 실망한 눈초리로 쳐다봐도 의미를 모르겠는데…….”

역시 한국 넘버원 연재 플랫폼은 코코아페이지다! 어디 감히 보아라 같은 구석기 시대 플랫폼하고 비교할 수 있겠나?

런칭 플랫폼을 바꾸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언제나 코코아페이지만 사랑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보아라 노블레스는 진짜 농담이었다.

자리를 옮겨 길드 안으로 들어왔다. 길드는 여전히 한적한 분위기였지만, 구석진 자리에 페페와 함께 있었던 모험가 동료들이 있었다.

“오, 같이 들어온 걸 보니 제대로 사과는 한 모양이군.”

“그래! 사과도 했고 이상한 오해도 풀었어. 아, 이 멀대는 잘론이야. 팀에서 사수를 맡고 있고.”

“잘 부탁하네, 소년. 혼자 모험가 생활을 하는 모양이지?”

페페가 그렇게 소개하자 잘론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 손을 들어 인사했다.

뒤이어 뒤편에서도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그래, 뭐든지 순서와 절차가 제일이다. 남녀의 관계란 말이지…….”

“그런 거 아니라구요, 한스 아저씨.”

중장갑 차림의 중년 남성이 한스.

팀의 방패 역할을 맡고 있는 모험가겠지.

“아, 저기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쓴 녀석이 도루란. 저래 보여도 본도에서 꽤나 알아주는 아카데미 출신이야.”

“쿨럭…… 쿨럭, 쿨럭. 도, 도루란…… 쿨럭……이다. 잘, 부탁…… 쿨럭쿨럭…… 한다…….”

“팀에서 폐병 환자 포지션을 맡고 있나요?”

“아니 보다시피 마법사…….”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는데.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진 않는데 어째선지 머릿속에서 멜론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여자다.

어째서 멜론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멜론이다.

“누구를 그렇게 애타게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는 거야?”

“아, 아뇨…… 갑자기 멜론이 먹고 싶어져서.”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냥 내가 좋아하던 음료가 밀키 멜론 소다라서 그러는 거다. 밀키 멜론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흡족해지는 음료 아닌가?

“아! 페페! 이제 돌아온 거예요?”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던 중 때마침 길드 창고의 문이 열렸고, 스텔라 교단의 성직자 차림을 한 여자애가 물자 창고 쪽에서 관리인과 함께 나왔다. 길드에서는 모험가들이 필요한 물자를 저장해 뒀다가 판매하는 서비스도 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다음 모험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때 카를린? 돈이 부족하면 공용통화로 환전해 둘까 하는데.”

“아직까진 괜찮아요. 확실히 본도에서 먼 섬이라 여러모로 비싸지만요.”

“다음 둥지 토벌 때까진 괜찮다는 말이지.”

페페와 카를린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 후, 카를린이 페페의 옆에 서있는 나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내 시선은 얼굴보다 조금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그냥 내가 낯가림이 심한 인간이라 얼굴을 똑바로 못 보고 아래쪽을 보는 것뿐이다.

“누구…… 아! 저번에 페페가 덮쳤던 그 남자애잖아요. 제대로 사과는 했나요?”

“사과했어! 그리고 덮친 거 아니야!”

카를린은 방긋방긋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흔들린다, 흔들려…… 내 안의 번뇌가 흔들린단 말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 용어로 ‘번뇌 모핑’이라고 한다.

“이 섬에서 활동하는 다른 모험가는 찾아보기 힘든데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 저는 카를린이라고 하구요. 아직 미숙하지만 교단의 7정급 수녀예요.”

내 손을 덥석 붙잡더니 카를린이 활짝 웃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와 보드라운 감촉. 어제 파르카 놈을 조지느라 쌓였던 피로가 사르르 녹는 느낌이다.

그래, 이게 인생이지.

영어로 원더풀 라이프.

일본어로 스바라시 칭칭모노다.

이렇게 미소녀들에게 둘러싸여서 힐링받는 이세계 전이를 원했단 말이다.

땅굴에서 괴물들 두목 짓거리를 하는 이세계 전이가 아니라!

“혹시 의뢰를 수행하다 둥지를 발견하게 되면 서로 정보도 공유해요.”

“예, 예…… 당연하죠, 당연히 그래야죠. 제가 아는 둥지의 위치 정보를 죄다 실토하겠습니다.”

하마터면 내 둥지의 위치까지 불어버릴 뻔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보는 동안 지능이 40% 정도 떨어진다는데, 그 연구 결과가 진짜였을 줄이야!

“적당히 헤실거리지?”

한창 좋은 순간에 페페가 끼어들어 나와 카를린를 떨어뜨렸다. 페페는 어쩐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만 잡았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이해가 안 간다. 내가 신선한 밀키 멜론 소다라도 같이 마시러 가자고 꼬신 것도 아닌데…….

“그래서 오늘 길드에 온 목적이 있을 거 아냐?”

“아, 그게…… 고블린킹 파르카 토벌 의뢰를 받아서요.”

“파르카 토벌을? 네가?”

페페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 수주 취소는 약간의 수수료만 지불하면 언제든 가능하니까. 혹시 괜찮으면 내가 대신 내줄게. 지난번 일도 사과하는 의미로…….”

“그래요! 초보자 때는 의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리한 의뢰를 받을 때도 있잖아요. 이럴 땐 선배 모험자답게 도움을 주는 거예요.”

어째선지 내가 의뢰 포기를 하러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가지고 온 자루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의뢰 보상 받으러 왔는데요.”

그 순간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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